제11장 애수애각(碍手碍脚) (4)
별서에서 들은 얘기. 조금 있으면 춘분이요, 그때 염상단이 모여서 의식을 치르는 게 오래된 전통이랬다.
오소민의 영민한 두뇌가 마침내 이번 사건의 노림수를 간파해냈고.
간세를 데리고 온 꼴이 된 책임감으로 제남행을 계속 주장했던 오보혜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결국, 그녀의 잘못으로 자칫하면 흥륭이 몰락할 위기.
국면이 더 커지면서 상황이 급해졌다.
해원기가 얼른 몸을 굽혔다.
“다시 묶게.”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일. 한시라도 빨리 제남의 흥륭으로 가야 한다.
오소민에게 하는 말이지만,
“황 대협은 저희가…….”
공호정이 황망히 황정리를 안으면서 장칠을 쳐다보고, 오소민은 손을 내미는 대신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힘으로 돌파할 셈이야? 상대는 일반 관병이고, 황하문 형제들이 섞여 있다고.”
해원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반 관병에게 손을 쓰는 것도 내키지 않은데, 나중에 이 일로 황하문이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원기 혼자서 흥륭에 갈 수도 없는 노릇. 가주와 총관까지 자리를 비운 집안에 낯선 이가 들이닥쳐 어쩔 것인가. 신원을 보증할 황정리는 인사불성이요, 또 간세를 찾아내려면 오보혜가 필요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오소민이 창백해진 오보혜의 얼굴을 보고 허리를 폈다.
“황 대협과 오 소저, 다 같이 가야 해.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지금은 천상 황하문의 도움을 받아 관문을 넘는 수밖에. 일단 저 관문을 조용히 넘으면 그 뒤로는 달리 염려할 게 없지. 어이, 오 소저, 용문의 지낭은 어찌 보시는가?”
당장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정하고, 그 방안을 마련한다. 개방의 순행장로다운 면모고, 그러면서 오보혜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잘못한 건 바로 잡아야 하는 법.
오보혜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남까지 관문이 몇 개 있더라고 특별히 소동이 나지 않는 한 문제 될 건 없겠지요. 첫 관문에서 경보가 울리지 않는 이상…….”
“성까지는 이곳을 포함해 모두 세 곳입니다만, 마지막은 평소의 성문이니 실제로는 두 곳이지요. 관도는 원래 황신을 대비한 경계초소가 있었고, 대부분 저희 황하문이 맡았으니까 관병이 몰린 곳은 이곳과 십여 리 지나서.”
“근데 다음 관문이 좀 수상하던데. 관병들이 이곳으로 우르르 몰려들면서 황하문 형제들까지 소집했잖아. 그쪽에는 누굴 배치했는지 모르고.”
해원기의 심정을 알았는지, 공호정과 장칠도 예를 따질 새 없이 연거푸 끼어든다.
오소민이 또 장칠에게 눈을 부라렸다.
“거 참, 이게 뭐 꿍쳐놨다가 꺼내먹을 거냐? 아는 거 있으면 한꺼번에 죄다 토해내야 할 거 아냐?”
“아, 그게. 저야 분타주가 객식구라고 황하문에 붙여놓은 처지잖습니까. 여기 공 형제 따라오면서 눈도 껌뻑거리고 귀도 후벼보고 했던 정도여서.”
장칠의 변명에 오소민도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제남의 개방도는 아마도 황하문의 부탁을 받았을 터. 흥륭이 처한 상황이 미심쩍고 황하문이 황신 대비로 전부 밖으로 나가 있는 판에, 가주와 문주까지 불려들어갔으니. 만일을 위해서 개방의 제남 분타밖에 믿을 데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양곡현에서 온 장칠이 있기에 황하문에 붙여 연락을 담당할 이목으로 썼겠지.
여기서 오소민을 만난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다.
공호정이 미간을 모으고서 다시 말을 꺼냈다.
“장형이 본 게 맞습니다. 이곳에 온 관병은 오십 명, 도중에 불러모은 저희 형제들이 약 삼십 명 정도. 그런데 오십 명을 인솔하는 군관(軍官)급이 둘밖에 되지 않고, 병사들도 태반이 궁병(弓兵)인데, 순패(盾牌)도 없는 창병(槍兵)이 나머지더군요. 심지어 밤을 새울 준비도 거의 저희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관문은 누가 준비를, 아니, 준비를 마친 관병들일까요. 따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오소민과 오보혜가 나누는 얘기를 실감하진 못했어도, 현재의 상황은 세밀한 부분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서.
되도록 자기 생각을 추가하지 않으려 애쓰는 보고.
해원기가 황정리를 다시 한번 훑어보곤 몸을 일으켰다.
업으려고 재촉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느린 동작, 그리고 늘어뜨렸던 두 팔을 올려 팔짱을 낀다.
왼팔 위에 올라온 오른손이 조금씩 움직이고 천천히 둘러보는 시선.
그 자세가 기이하게 무거워 보여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굳이 더 말할 것도 없이, 두 번째 관문이란 곳은 관병보다 무림인을 배치했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
별서에서 마지막에 환관을 보호했던 화살들, 그때의 궁병들을 먼저 넓은 지역에 배치해놓아 경보를 울리는 신호로 삼고, 제남에 접근하면 무림인들이 나설 참. 아무리 비천무영 황정리라도 돌파하는 데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으며, 기어이 흥륭에 이르려면 막대한 힘을 소모해야만 한다.
오소민의 예상대로 염상단을 괴멸시킬 수작이라면 벌 수 있는 만큼 시간을 벌 셈이요, 막판에는 오보혜를 보호하느라 기진맥진한 황정리까지 처리할 수 있는 계획.
별서에서 놓쳤을 때, 아니 별서를 공격했을 때부터 이런 연환계를 꾸몄을지 모른다.
이 난관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상대에게 수작 부릴 틈을 주지 않고, 황정리와 오보혜를 무사히 흥륭으로 데려가는 방법이 무얼까.
오소민이 가벼운 헛기침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일깨웠다.
“어흠, 일단은 황하문도로 변장하는 게 어떨까? 황신 대비에 관병들 뒤치다꺼리까지 필요한 게 적지 않아서 도울 손이 더 필요하다는 핑계로. 오 소저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장칠이 공호정과 함께 올 수 있었던 것처럼 모두가 황하문으로 변장해 성내로 잠입하자는 의견인데.
세가의 천금이 허름한 남장을 감수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먼저 해원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너무 걸리네. 성내로 들어가게 해줄지도 장담하지 못하고.”
황하문이라고 무사통과가 보장되진 않는다.
오소민도 그런 점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려고 머리를 짜낸 것이고.
오보혜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할 수 없어요. 지금으로선 가장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네요. 저도 무림의 여자, 그깟 변장 정도야 얼마든지…….”
“!”
그녀의 각오가 어떻든.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해원기가 갑자기 머리를 들었고, 뒤이어 오소민도 몸을 홱 돌려 관문의 불빛을 향했기 때문에.
오보혜로선 아직 들을 수 없는 소리.
관문 쪽이 돌연 소란스러워진 걸 해원기가 가장 먼저 감지했고, 오소민이 그다음으로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뭐지?”
눈을 크게 뜨는 오소민에게 해원기가 잠깐 손짓을 해 보였던가. 그 자리에서 퍽 꺼진 것처럼 사라진 신형.
상상도 못 할 속도로 튀어나간 걸 오소민만이 알 뿐.
“으이구. 이걸 어떻게, 젠장. 장가가 오 소저를, 공 형제는 황 대협을. 바짝 숙이고 살살 따라오라고.”
자기도 바로 해원기를 뒤따르고 싶지만, 해원기의 손짓이 뒤를 부탁한다는 뜻이니. 줄줄이 붙은 군더더기(?)를 팽개칠 수가 있나.
뭔가 의외의 변화가 생겼고, 해원기가 불현듯 뛰어나간 것도 특이해서.
오소민이 일행을 이끌고 납작 엎드려 뛰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병기가 부딪치는 쇳소리에 섞여 여자의 높아진 웃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호호호! 이 벽창호들이,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들을까? 전부 다 주우글래?”
젊은 여자, 소녀의 앙칼진 음성인데.
오소민이 자신이 잘못 들었나 여길 정도로 거친 말투다.
바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오보혜가 비록 건방지고 입이 날카롭긴 해도, 세가의 천금답게 의젓한 티를 내고.
자신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긴 하지만, 저렇게 막돼먹은 소리를 내지르진 않는데.
웬 소녀가 이렇게.
챙, 챙.
내밀었던 두 자루의 창에서 창날만이 베어져 날아가자, 대번에 분위기가 살벌해져서.
열 명이 넘는 관병들이 부챗살처럼 퍼져 활을 겨누었다.
새까만 학창의를 두르고 커다란 방립을 머리에 쓴 소녀. 한껏 피워올린 화톳불 덕에 학창의에 수놓은 용 무늬가 언뜻 드러나고, 토시로 덮인 오른손에는 붉은 수실이 달린 보검 한 자루가 번쩍거린다.
하얀 얼굴에 오뚝한 코, 짙은 눈썹이 한껏 세워졌고 붉은 입술이 비웃듯 비틀어져 성깔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궁병들에게 포위를 당하고도 겁내는 기색 없이 코웃음을 쳤다.
“흥! 활과 화살이면 본 낭자가 무서워할 줄 알고? 대체 너희들은 뭐 때문에 여기를 막는 게야?”
이 당찬 호통에 도리어 관병들이 주눅이 들고, 화톳불 뒤로 웅성거리는 서른 명의 장한이 신경 쓰이는지 뾰족한 투구에 연갑(軟甲)을 걸친 군관이 앞으로 나섰다.
“잠깐 멈추어라. 어린 계집이 어이해 관군 앞에서 야료를 부리는고?”
딱딱한 관어(官語)를 써서 나름 위엄을 보이려 하지만.
“야료? 본 낭자가 이미 급한 일로 제남에 간다고, 태원부 통판대인의 이름까지 대었거늘. 대뜸 잡아 꿇리려 했잖으냐? 보아하니 오밤중에 불쌍한 백성들을 부역이랍시고 끌고 온 것 같은데. 야료는 너희가 부리는구나.”
뽑아 든 보검을 까딱거리며 을러대니.
화톳불 뒤에 모여 있던 황하문도는 졸지에 부역으로 끌려온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이 기승스러운 말대답에 군관이 기가 막힌 듯.
“허! 이런 고약한. 태원부 통판 따위가 뭐라고! 지금 이 관도로 제남을 향하는 자는 하인을 막론하고 억류한다. 이는 통판이 아니라 지부대인이라도 거역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린 명이거늘. 당장 검을 버리고 꿇지 못할까!”
목청을 높이다가 아예 호통을 쳤다.
군관이 나서자 창병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이제 소녀를 둘러싼 병사는 서른 명.
웬만하면 낯빛이라도 변할 법한데.
소녀는 도리어 생긋 미소를 짓는다.
“아, 그러셔? 대개 관이랍시고 엉뚱한 짓을 해대는 것들은 항상 이런 핑계를 대더라. 어마어마하게 높은 분이 내린 명이라. 그럼 황명(皇命)일까? 본 낭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오느라 산동의 민심을 잘 모르지만, 제남은 태원보다 더 썩었나 보네. 처음 산동에 온 기념으로다가 한바탕 경고를 내려줄까?”
앙칼졌던 음성도 부드럽게 바뀌어 군관과 관병들이 또 어리둥절할 때.
용이 수 놓인 검은 학창의가 크게 펄럭였다.
차차차창.
십여 자루의 창이 전부 꺾이고 창병과 군관이 벌렁 자빠졌다. 순간적으로 닥쳐들어서 채 활을 당길 새가 없었던 궁병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다가 검은 학창의가 폭풍처럼 덮쳐든다.
퍼펑, 퍼퍼퍽.
“으엑.”
“켁.”
활이 부서지고, 화살이 꺾이고, 팔다리를 움켜쥔 궁병들이 제각각 비명을 올리니.
군관을 포함한 서른 명이 전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놀라운 솜씨.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화톳불 바로 앞에서 화살 하나가 공중으로 치솟았고.
피리리리.
캄캄한 밤하늘을 울리는 피리 소리. 신호로 사용하는 명적(鳴鏑)에 불까지 붙여서 불화살이 우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졌다.
거침없는 손속. 소녀는 서른 명을 쓰러뜨리고는 곧장 화톳불로 몸을 날렸고,
부역으로 끌려온 불쌍한 백성(?)들을 위협하는 나머지 관병들을 칠 셈이었다.
화살로 신호를 하든 말든, 썩어빠진 관병들을 남김없이 때려눕히고 백성들을 풀어줘야지.
날 대신에 면으로 휘두른 검을 고쳐 잡는데.
“증 낭자!”
별안간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절로 멈추게 되었다. 처음으로 오는 산동길, 누가 그녀를 알기에?
그러나 자신을 부른 자의 형상을 확인하자마자 두 눈에 쌍심지가 섰다.
“이놈!”
더벅머리, 허름한 사냥꾼 차림에 가슴팍에 매단 판과. 밤낮을 도와 뒤쫓은 악적(惡賊)이 여기 있구나.
한 소리 호통과 함께 몸을 뒤집어 땅을 박찼다.
관도로 뛰어오르는 해원기를 맞아 번갯불처럼 뻗는 검.
이미 호중객잔에서 해원기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걸 겪었었다. 관병들을 때려눕힐 때의 면이 아니라 날을 제대로 세운 검, 검광이 그림자를 이끌고 검기가 그 사이를 갈마들면서 용솟음친다.
해원기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호중객잔의 맏딸, 항산검파를 계승한 용낭자 증명단. 이 소녀가 어째서 지금 여기에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이유도 알 수가 없다.
관병들과의 충돌, 괜히 무모한 살생을 벌일까 하는 염려에 뛰어나갔건만.
더구나 닥쳐드는 검이 전혀 가볍지 않다.
검기성형을 뛰어넘어 검기성강(劍氣成罡)의 초입에 이른, 즉 검강지기(劍罡之氣)를 뿌리는 검법.
경지에 이른 고수라도 경솔히 대할 수 없는 상승의 기예다.
해원기의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나아가며 다섯 손가락을 모았다.
쨍!
쇠와 쇠가 맹렬히 부딪친 듯. 증명단의 검이 부르르 떨지만, 해원기는 검왕수를 거둘 새도 없이 어깨를 크게 흔들었다.
휘릿.
공중을 번갈아 디딘 것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물러서는 신형. 표풍결(飄風訣)을 쓰지 않으면 벗어나기 어려운 검세다.
복룡검식은 오악검법의 하나. 본래 기본적으로 검강의 경지를 지향하는 상승검법이지만, 오래전에 그 정수를 잃었거늘.
‘박룡쇄운(縛龍鎖雲)의 비결을 되찾았는가. 그래도 증 낭자의 나이로는 어려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아니다.
“이 악적! 황장촌을 불태운 게 네놈이지?”
증명단이 악을 쓰며 검을 뒤집자, 번뜩이는 검광이 줄줄이 이어지고 어둠에 가린 검영이 사슬처럼 얽힌다.
“증 낭자, 멈추시오!”
해원기의 만류하는 외침은 들리지도 않는 듯.
급히 제남으로 가야 할 이때, 또 이상한 오해에 휘말려서,
참으로 손발이 다 묶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