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애수애각(碍手碍脚) (3)
오소민의 자신 있는 말처럼 장청까지는 아무런 장애가 없어서.
반 시진 만에 남쪽으로 향하던 행로를 동쪽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제는 남쪽으로 황하를 끼고 곧장 제남으로 향하는 길. 아직 유시(酉時)가 끝나지 않아서 예상보다 빠른 이동인데, 여전히 비구름이 끼어있는지 주위가 캄캄하다.
밤길을 달리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경공이 뛰어나도 중요한 건 시각. 무공을 갖추면 밤눈이 밝아지고, 고수라면 대낮같이 볼 수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달도 별도 뜨지 않은 완전한 암흑 속에선 당연히 시야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경공에다 시야까지 밝히려면 내공의 소모가 극심한 법.
반 시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변을 경계하며 쉬지 않고 달려서.
오보혜는 모자처럼 쓴 조끼 속의 이마가 땀으로 젖었고,
동행하는 두 남자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란 걸 실감했다.
화전민의 헛간에서 쉬었다고 해도 제대로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 그녀와 달리, 그녀 좌우의 둘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선도를 맡은 오소민은 부지런히 전방을 탐색하면서도 일행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하니.
과연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유룡개라는 이름에 어울린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건 정체도 배경도 불분명한 해원기라는 사람.
인사불성의 황정리를 계속 업고 있어서 남보다 훨씬 힘이 들 텐데도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고. 아니, 셋 중에서 가장 가뿐하다고 여길 만큼 더욱 경쾌하게 움직인다.
맨 뒤에서 따라오다가 수시로 앞으로 나와 오소민이 비운 자리를 지키곤, 오보혜의 바로 뒤로 빠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옆에 붙어서 오소민과 번갈아 좌우를 지켜서. 그 때문이랄까, 오보혜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경공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실제로. 뭔지 모를 기운, 바람 같은 게 떠받쳐서 나를 더 가볍게 해주었다. 설마?’
황정리를 업은 채로 또 오보혜를 도울 능력이 있단 말인가. 그런 엄청난 내공, 남의 경공을 이끄는 기예란 건 오보혜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그 경지를 감히 잴 수 없는 절세의 고수.
설마 그런 고수가 정녕 존재할까.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지우려고 오보혜가 머리를 흔들자,
“흐음, 봤소? 관도에는 확실히 관문을 설치해두었구먼.”
오소민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작은 불빛. 꽤 먼 거리겠지만, 사방이 워낙 캄캄해서 바로 눈에 띄었다.
해원기가 이마에 손을 얹고 불빛이 있는 곳을 살폈다. 보통은 대낮에 눈이 부시는 걸 막기 위한 동작, 이렇게 캄캄한데도 버릇이 된 건가.
공력을 알뜰하게 들인 동시안이 거리를 뛰어넘어 지형을 살폈고,
해원기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사람이 적지 않네. 아직 제남까진 먼 곳인데 관병을 저렇게 많이 배치할 여력이 있나. 음, 관도가 비록 높고 그 옆의 물길이 바짝 마르긴 했어도 우리가 지나기엔 폭이 좁아.”
“에? 그게 보인다고…….”
오보혜가 결국 목소리를 높였으나. 오소민이 얼른 말을 받았다.
“이상한데. 조금 더 접근해볼까? 아니면 여기서 관도의 북쪽으로 넘어갈까?”
오소민 역시 아직은 불빛밖에 보이지 않는다. 해원기에 대한 믿음, 이 친구가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결정을 서두르는 게 옳다.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비췻빛이 사라진 눈이 오소민을 향했다.
“오 소저와 기다리지. 부탁하네.”
정찰을 맡긴다는 말. 오소민이 이가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더니 두 손으로 진흙을 쥐어 마구 얼굴에 발랐다.
“뭐가 있을지 모르지. 조심할게.”
여자 뺨치게 아름다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고서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보혜가 바보처럼 벌린 입을 다물 줄도 몰랐다.
간결한 대화. 어째서인지 말투까지 똑같은 두 사람.
그걸로 족하단 거다. 그 간결한 말 속에 서로 의사가 통했고, 똑같은 말투는 같은 생각이라는 의미. 그만큼 믿는다는 건가.
묘한 감상이 드는데. 그러면서 또 다른 생각에 오보혜가 조그만 입술을 암팡지게 물었다.
오소민이 정찰을 맡은 건 해원기의 결정.
불빛이 비치는 관문을 정찰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겠지만, 그곳까지 살피는 시력을 지닌 해원기가 굳이 오소민에게 부탁했다.
황정리를 업은 것처럼 오보혜를 보호하기 위함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기에.
게다가 이 결정에 자신은 말 한마디 끼어들 여지가 없다. 멀쩡하게 자기 발로 따르긴 하지만, 인사불성인 황정리와 마찬가지. 위험한 상황이 되면 그저 지켜져야 할 대상이다.
‘지켜진다고? 방해되는 군더더기로 여기지 않으면 다행.’
용문의 지낭이요, 세가의 천금으로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오보혜는 속이 부글거리는 것 같았다.
어수룩한 모습의 해원기.
언제부터 이 정체 모를 사내에게 휘둘리기 시작했나.
오보혜는 혼자 속을 끓이느라 해원기의 눈이 다시 비췻빛을 발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믿음직한 벗에게 위험한 일을 부탁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바로 뛰쳐나갈 작정.
황정리를 업었고, 오보혜가 곁에 있다. 신경을 써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하나라도 소홀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무공을 익히고, 무엇을 위해서 ‘박대정심’을 목표로 두었는가.
배움은 곧 쓰임이다.
사부의 말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서. 전부 짊어질 마음을 먹었다.
채 반 각도 되지 않았을 때.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하고, 곧장 오보혜의 소매를 쥐었다.
“몸을 가볍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그대로 바람처럼 나아가니.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끌려가는 오보혜는 모자로 쓴 조끼가 날아갈 뻔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 그리고 자신의 몸을 휘감은 기운.
오보혜의 암팡지게 물렸던 입이 또 벌어졌다.
지금까지 해원기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상황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해원기가 금방 발을 멈추며 소매를 놓아주어서.
“음?”
오보혜가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바로 앞으로 다가온 세 개의 그림자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오소민, 온 얼굴에 진흙을 처바른 우스운 몰골 옆의 두 사람.
누리끼리한 황의의 가슴팍에 똑같이 하(河)라는 글자를 새긴 단삼 차림이다.
‘황하문.’
그렇게 여길 때 오른쪽의 삼십 대 장한이 돌연 앞으로 넘어지듯 납작 엎드렸다.
땅바닥에 머리를 때려 박듯 격한 인사. 한껏 낮춘 쉰 음성이 떨린다.
“황하문 제자 공호정(孔湖淨)이 문주의 명을 받들어 삼가 검(劍)…….”
“되었습니다. 예를 거두세요. 오형, 그럼 이쪽 분은?”
다들 공호정이란 장한의 돌발적인 인사에 놀랄 틈도 없이, 해원기가 서둘러 말을 자르고 왼쪽의 나이든 인물을 가리켰다.
“아, 여긴 양곡현의 거지. 마침 여기 있어서 금방. 이것 참!”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띄엄띄엄 소개를 마친 오소민이 더러워진 얼굴을 문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해원기의 과거와 얽힌 자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어려워하고. 그걸 또 굳이 밝히지 않으려는 해원기.
‘저 바부탱이 앞에서는 나한테 붙는 신비라는 단어가 우습다니까.’
나이든 인물이 눈치 빠르게 포권을 취했다.
“양곡현에서 온 장칠(張七)이라 합니다. 순행장로의 지시로 왔다가 마침 막 문주의 연락을 받은 제남 형제들에 섞여서 황하문으로 위장했습죠. 우리 장로가 이 못난 얼굴을 용케 기억해줬군요. 히힛.”
흔하디흔한 이름에 평범한 얼굴이지만, 역시 개방은 개방이라 이 어색한 장면에서도 넉살 좋게 히죽거린다.
세상엔 별별 희한한 인연이 있는 법.
자신이 황신의 소식을 전할 때만 해도 관례로 대하던 황하문이 갑자기 뭔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바빠지고, 여간해선 만나기 어려운 황하문주가 직접 나와서 중요한 일을 알려주었다.
황신 대비로 황하문뿐 아니라 제남 근처의 개방까지 다 나와 있는 판이라, 손을 나누어 연락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기에.
관부가 제남의 제일 서쪽에 설치한 관문에 이르렀을 때도 아직 자세한 내막을 알진 못했었다.
이쪽을 담당하는 황하문의 형제, 공호정이 꽤 통하는 성격이라 함께 움직였지만. 이렇게 극진하게 예를 차려야 할 사람이라니.
포권을 마치고 얼른 공호정을 부르면서도 해원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이, 공 형제. 지금 이럴 때가 아닐세. 일단 상황부터 알려야 하지 않는가?”
비로소 공호정이 몸을 일으켰고, 이마에 묻은 진흙을 닦을 생각도 없이 급히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포정사와 지휘사까지 왔다면 지부대인이 제남의 유명인사를 다 불러들인 게 사리에는 맞지만. 음.”
오보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미간을 모으며 오소민을 보았다.
공호정의 얘기는 오직 해원기에게만 아뢰는 보고였고, 중간중간에 말을 보탠 장칠도 오소민을 의식해서다.
인사를 나누긴 했어도 황하문이나 개방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신. 먼저 말문을 여는 게 어색한데.
오소민이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흥륭의 가주와 총관까지 직접 데리고 간 건 수상하지. 아예 대놓고 붙잡아놓을 셈일까. 더구나 막 문주까지. 관에서 황하문의 주인을 모셔간다? 기가 막히는군.”
아무리 한 지역에 이름을 날린 무림의 고수라도 관의 입장에서 결국 민초(民草). 그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불령(不逞)의 무뢰배에 불과하다. 설사 황하문의 문주라도 일부러 무시하는 게 일반적인 대우이거늘.
공호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하급이지만 통판(通判)이 직접 관병을 데리고 정중하게 초청하는 바람에 문주도 거절하지 못했답니다. 지난 몇 년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작자들이 돌연 그간 황신 예방에 힘쓴 공로를 치하하고 장구지책(長久之策)을 마련하는 모임이라니. 지부대인도 어쩔 수 없었다고 나중에야 은밀히 전갈이 왔습니다만. 아, 산동에는 그래도 바른 관원들이 꽤 있습니다.”
역시 해원기에게만 하는 얘기. 서쪽으로 태항산 기슭에서부터 동쪽으로 바다까지 이어지는 황하를 바탕으로 세워진 황하문. 그 황하문에 속한 이들은 거친 산동 사내들이라고 알려졌건만, 공호정은 말 한마디, 동작 하나까지 공손하기 이를 데 없다.
해원기가 묵묵히 듣고는 오보혜에게 얼굴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대로 말할 기회를 준다.
“관병을 동원하려면 도지휘사사를 통해야, 또 흥륭의 가주를 포함한 유명인사들을 모으려면 승선포정사사의 이름이 아니면 곤란했겠죠. 황신이라는 큰 재난을 앞에 두고 제남지부를 압박할 방법은 더 높은 직위로 눌러대는 수밖에. 역시 동창이 손을 썼다고 봐야겠어요. 그렇지만.”
입이 풀린 오보혜가 잠깐 말을 쉬었다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오는 건 밀행(密行)을 즐기는 동창에게 드문 일. 확실히 손이 부족한 모양이죠. 다른 곳에서 부릴 주구들을 불러오지 못한 상황이라면, 지금이 제남으로 들어갈 적절한 기회일 수도. 일단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에요. 황 대협이 회복되면 그들도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할 테니.”
오소민을 보면서 말을 맺자.
오소민이 얼굴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쩝. 그 재수 없는 내시 놈이 지금 뭔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일단 황 대협과 용문세가의 천금을 별서에서 잡으려고 했지. 그런데 다 도망갔다, 더구나 용문의 지낭 옆에는 개방의 둘이 호위병으로 붙었고. 어떻게든 제남에 들어오기 전에 찾아내야 다시 붙든 말든 발을 묶을 수 있는데…….”
오보혜가 이 자리에서의 위치를 생각해서 말을 간결하게 한 걸 수도 있지만, 머리가 좋은 이들은 언제나 비슷한 상대를 시험하기 마련.
오소민이 지금 제남으로 들어가자는 오보혜의 의견을 이해하려고 말을 조금 끌자.
해원기가 등에서 풀어 내린 황정리를 잠깐 보았다.
공호정과 장칠이 바짝 붙어 부축하고 있는 황정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오소민의 말대로 상대는 그걸 모른다. 해원기가 비천무영을 가장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백 명의 금의위에게 중상을 입히고 우두머리인 환관까지 몰아붙였던 비천무영. 제남의 흥륭으로 향하는 걸 관병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내시 놈도 시간이 필요하구먼. 황 대협이 오 소저를 개방 호위에게만 맡겨놓고 제남으로 오지 않을 테니. 그동안에 흥륭을 방문한 용문세가의 상단이 수작을 부릴 수 있잖아. 별서가 파괴된 소식에 손님들이 당황하는 걸 어떻게든 안심시키려 할 때. 제남에선 아직 황 대협이 멀쩡한 걸 모르지. 이런 교활한 놈!”
그새 오소민이 문제의 초점을 풀고는 버럭 욕을 내뱉었다.
황정리의 정확한 상태를 모르는 건 동창만이 아니다. 별서가 파괴당하고 황정리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흥륭으로선 거꾸로 동창에게 당했다고 여길 가능성이 있고. 만약 동창이 이를 이용해 허세를 부리면서 간세를 이용해 또 다른 짓을 벌인다면?
장칠이 눈을 껌뻑거리며 말을 보탰다.
“흥륭 가주와 막 문주가 다 없으니까 우리 제남 분타주(分陀主)가 할 수 없이 성내에 머문다고 했습죠. 흥륭의 춘분 제사 때 먹을 걸 먼저 챙긴다나 어쩐다나.”
“아차!”
오소민이 탄성을 내며 장칠을 확 째려보았다.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제남 분타주가 적각(赤脚)이던가? 젠장. 그 덜떨어진 녀석. 아니, 그게 아니라.”
째려보던 눈매 그대로 해원기와 오보혜를 보며,
“그냥 겁박하려는 게 아니야. 염상단을 먹을 셈이지.”
이를 갈 듯 건네는 말에 다들 안색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