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애수애각(碍手碍脚) (2)
“막간산(莫干山)에 있다는 소문이지만, 현지인도 그런 고개는 들어본 적 없다는데. 강남의 양곡상들이 위협을 받았을 때 반룡령이란 이름이 몇 번 나왔답니다.”
동창이 각지에서 일을 벌이기 위한 거점. 오소민과 해원기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보혜가 자세히 얘기하는 이유.
“혹시 그 환관이 또 다른 자들을 불러들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듯해서 꺼낸 얘기입니다.”
관병만이 아니라 무림 인사들을 조달했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터.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구주신도 팽조린과 같은 자가 곳곳에서 동창을 대신해서 일을 처리한다면.
금의위 대신에 관병들만 상대한다는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훈련을 받은 정규의 병사들과는 다르다. 무림인 중에는 별별 희한한 재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고. 개중에는 뛰어난 추종술(追蹤術)을 지닌 자도 수두룩. 비가 좀 많이 왔다고 흔적을 놓칠 리 없다.
“허, 위치도 확실치 않은 관문에만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무림인이라면 추종, 매복, 함정…골치 아프네.”
오소민이 일부러 과장되게 이마를 짚었고.
해원기가 식어가는 판과를 내려다보았다. 무림을 잘 모르는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얘기란 걸 모를 리 없다.
제남으로 흥륭을 찾아가는 길이 점점 어려워진다.
해원기가 입을 다물자,
오보혜가 그 얼굴을 힐끗거리다가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저, 실례지만, 해 소협은 사문(師門)이 어디세요?”
“에?”
해원기보다 오소민이 먼저 놀랐다.
이건 그야말로 기습. 이렇게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할 때 엉뚱하게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물으면 자신도 모르게 답이 나오잖나.
뭐니 뭐니 해도 해원기의 정체를 밝힌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행하는 오소민이거늘. 이 아기 돼지가 선수를 칠 줄이야.
그러나.
오소민이 놀라든 말든 해원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내려다보던 판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 소저의 말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서두르는 게 더 좋을지, 아니면 경로를 다시 바꿀지. 이걸 씻으면서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아예 오보혜의 질문은 듣지도 못한 듯, 슬쩍 오소민을 보고 나갔다.
오보혜가 작은 입을 좀 삐죽거렸다. 기껏 기회를 잡아 내막을 캐보려 했더니. 설거지나 한다고? 의논은 오소민과 하라는 투. 진짜 헷갈리게 하는 사내다.
오소민이 눈치 빠르게 몸을 앞으로 당겼다.
“막간산이라면 항주(杭州) 쪽이구먼. 그거 묘하네, 소주의 태호, 항주의 전당강(錢塘江)인가. 전부 양호의 물길, 즉 장강선단과 이어지잖소? 그래도 반룡령에서 제남은 무리지. 오 소저 말대로 하북과 산동은 거점을 두기보단 동창이 직접 나설 거리니까. 그렇다면 제남행을 서두르는 게 나을까?”
오보혜의 기습적인 질문이 실패한 게 일단 맘에 들었고,
해원기가 다른 의도로 자리를 피했음을 짐작하고 말을 거는 거다.
오보혜가 심통을 내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선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급선무고, 이 재수 없는 미남자가 마침 해원기의 친구라니 뭔가 아는 게 있을지도.
과녁을 바꾸려고 오소민을 향해 고쳐앉았다.
헛간 밖은 이미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워졌다.
쏟아지는 비로 판과를 닦으면 다 닦기 전에 전신이 폭 젖겠지만, 해원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젖혔다.
새까만 하늘을 향하는 비췻빛 시선. 심령으로 부른 동강이 어디쯤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오보혜의 말대로라면 상황을 세밀하게 파악해놓을 필요가 있다.
동창이든, 금의위든. 복면을 하고 신분을 가장한 상태에서는 어떻게 상대해도 괜찮다. 그러나 제대로 복장을 갖춘 관병과의 충돌은 피하는 게 상책.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한다고, 강물이 우물물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세속이 어떻게 변해도 강호는 강호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
관병들의 눈을 피해 지키는 관문을 넘어 제남으로 가기도 쉽지 않은데, 낯모르는 무림인들이 중간에 끼어들면 곤란을 피하기 어려울 터.
오보혜의 추정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반룡령’이란 명칭을 아는 것만으로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서.
동강을 써서 도움을 받을 생각이 들었다.
한참 하늘을 쳐다보던 해원기의 동시안이 비로소 날개를 활짝 펴고 서서히 내려오는 그림자를 찾았다.
비가 쏟아지면 조류 대부분은 둥지를 떠나지 않지만, 청강주의 기연을 나눠 받은 이후로 동강은 비나 눈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수기(水氣)를 접하면 더욱 기운이 나는지 거의 삼 장에 다다를 어마어마한 날개를 한껏 펼친 채 유유히 활공을 즐기기 일쑤.
지금도 이전에 폭풍처럼 내리꽂히던 것과 달리 구름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해원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식, 눈치는 빨라서. 그래, 오형 말고 또 누가 있단다. 잘했어. 심부름 좀 다녀와야겠다.]
자신의 더벅머리를 횃대 삼아 앉은 게 되레 비를 가려주어서, 해원기가 얼른 요대자에서 몇 가지를 꺼냈다. 자질구레한 천 조각, 지로에서 가져온 숯 조각으로 그 위에 짤막하게 몇 자를 써서 바로 동강의 단단한 발목에 묶었다.
[전에 갔던 황하문 기억하지? 철탑거령 막 문주, 덩치가 되게 큰 사람을 찾아. 전해주고 돌아올 때는 이상한 게 없는지 잘 보고. 아얏!]
쿡쿡.
강철로 벼린 것 같은 부리가 정수리를 바로 쪼아댄다. 이것저것 시키는 게 영 귀찮은 듯.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기도 전에 또 거대한 날개가 철썩 어깨를 쳐서.
촤악.
제대로 물벼락을 맞게 해놓고서야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어휴, 저걸.”
해원기가 참다못해 입속으로 을러대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연 이후로 영혼으로 묶인 사이라서 그런가, 어떤 때는 얄밉기까지 하다.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른다는 말이 버릇없음을 비유하지만, 해원기의 머리를 아예 횃대로 삼는 동강에게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새까만 하늘에다 주먹을 쥐어 보이곤 판과를 도로 가슴팍에 묶었다.
몸을 떨었던 건 추워서도, 화가 나서도 아니다. 판과를 묶는 손에서 쭉 뻗은 세 손가락, 삼지화정의 열기에 전신의 습기가 남김없이 수증기로 화했고.
해원기가 머리를 가볍게 털면서 다시 헛간으로 돌아갔다.
황정리를 업고 올 때 그의 몸이 젖지 않도록 했던 기예다.
“흐음, 아홉 개의 오리 알을 훔친 도적 떼라. 정말 수상하군요.”
“그렇지. 공표라고 해도 하필 목적지가 절강이니. 어, 해형.”
판과를 치운 지로에다 다시 피운 불. 그 불을 가운데 두고 오보혜와 오소민이 한참 얘기를 나누다 돌아본다.
해원기가 묘한 표정이 되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남행에 관해 의논하는 줄 알았더니.
오보혜가 물기 하나 없이 들어서는 해원기를 작은 눈으로 살피다가 자리를 권했다.
“별서에선 기회가 없었죠. 마침 생각이 나서 오 장로에게 듣던 참이에요. 어쩐지 황 대협께 얻은 정보보다 이 얘기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긴 상황을 모르면서 의논만 할 수는 없는 노릇.
해원기가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오 소저도 이 표행은 금시초문이라더군. 물론 그 경로가 하남과는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용문세가가 소문도 듣지 못했다는 건 이상하지.”
관상무일체라는 용문세가. 상계와 무림 외에 관계(官界)에도 배경이 있는 집안인데.
오소민과 처음 만난 양곡현, 그리고 거쳐온 덕주까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해원기가 휘어지는 눈썹에 손을 대려다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이 사건은 정말 이상하다.
해원기가 호중객잔에서 뜻밖에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아마 강호에서 아무도 모른 채 흐지부지되었을 것이다.
오소민의 말에 오보혜가 고개를 저었다.
“경로부터 수상해요. 경사에서 절강을 가려면 하남관도가 가장 편하죠. 그런데 굳이 편한 길을 놔두고서 제남을 거쳤으니, 그렇다면 소주나 휘주를 거쳐 항주로 빠지는. 어지간히 복잡한 경로거든요. 공표든 아니든 굳이 그렇게 여러 곳을 거쳐서야 안전을 담보할 수 있겠어요? 마치 일부러 겁표를 원하듯이.”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일부러’. 그 단어가 걸린다.
“원래 흥륭의 별서를 찾은 건 황 대협께 조언을 구하려는 거였지요. 오 소저의 말대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표행이 과연 제남을 거쳐 남행했는지부터 확인할 필요도 있었고. 무엇보다 덕주에서 동창이 개입했음을 확인했으니까요.”
“그러면서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거지. 하여간 동창이 끼면 귀신놀음이 되는 것 같아. 아홉 무리의 도적이라, 내막을 알려면 고생깨나 하게 생겼어.”
오소민의 덧붙이는 말에 오보혜도 머리를 외로 꼬았다.
확실히 동창이 개입했다면 깊은 내막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십이태감 중 상보감의 장인태감, 절강이라는 아주 먼 지역으로의 이동, 아홉 개의 상자와 아홉 무리의 도적, 그리고 동창.
간단히 풀릴 문제가 아니다.
그나저나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해원기라는 사내. 어떻게 이런 일에 연관되었을까.
아직 해원기로부터 사정을 다 듣지 못한 오보혜는 새삼 궁금해졌다.
해원기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누운 황정리를 보았다.
“지금은 눈앞에 집중할 때입니다. 요기도 했으니 잠시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죠.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제남으로 가는 동안 다시 쉴 곳을 찾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땔감 몇 개를 다시 지로에 넣고,
불이 환하게 일어나 헛간 안이 아까보다 더 훈훈해진다.
특별히 손을 쓴 것 같지 않은데도 화력을 마음대로 다루는 솜씨. 이 기묘함에 오보혜의 눈이 또 깜빡였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소민 역시 해원기를 지켜보기만 할 뿐, 말없이 뒤로 몸을 젖혀서.
헛간 안이 조용해졌다.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고 여겼는데.
역시 피곤했던 모양. 살짝 잠이 들었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오보혜가 화들짝 일어났다.
“아, 깨어났군. 슬슬 준비하쇼. 비가 살짝 그칠 기미라.”
해원기를 도와 황정리를 해원기의 등에 묶던 오소민이 건네는 말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 출발하려고요?”
“여기서 장청까지는 딱히 걸릴 게 없고. 곧장 관도를 타고 제남으로 향하는 거지.”
여유만만한 오소민의 말에 오보혜의 작은 눈이 커졌다.
“아니, 상황을 어떻게 알아서…….”
그저 헛간에서 쉬기만 했거늘, 뭘 믿고 지금 움직이자는 건가.
오소민이 해원기의 허리에 천을 단단히 묶으면서 피식 웃었다.
“훗, 요 희한한 친구에게는 하늘의 눈이 있거든. 관도로 들어가면 황하문과도 만날 수 있을 듯하니 훨씬 마음이 놓이잖소?”
또 모를 소리. 하늘의 눈은 뭐고 언제 황하문과 연락을 취했을까.
‘희한한 친구’는 설명할 생각도 없는지 오소민에게 인상을 쓴다.
“하늘의 눈이니 뭐니 그런 말 하지 말게. 콧대만 높아져서 아주 힘들어진다고. 마침 황신 대비로 황하문이 관부와 함께 곳곳에 나와 있어서 다행이지.”
“그래. 그 황신 대비가 이번엔 큰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잘하면 우리 거지 떼도 끌어들일 수 있겠어. 양곡현에서 이미 전갈을 보냈으니까.”
개방이 황신 대비에 황하문을 돕는 게 관례라고 했었다.
남자 둘이 활기차게 말을 주고받자 오보혜가 손을 내저으며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먼저 설명 좀 해봐요. 하늘의 눈? 황하문과는 언제? 아니, 황하문과 어떻게 아는, 누구를 아는 거죠?”
용문세가의 지낭이 헷갈려서 말이 마구 꼬인다.
오소민의 입가에 살짝 비웃음이 걸리지만, 괜한 말다툼이 귀찮은 해원기가 얼른 입을 열었다.
“내가 키우는 새가 있습니다. 황하문의 막 문주와는 과거의 인연이 좀 있고요. 술시(戌時)쯤이면 관도로 접어들 수 있을 겁니다. 오 소저가 달리 불편한 점이 없으면 출발했으면 합니다.”
이게 설명.
오보혜를 놀려먹으려던 오소민이 입을 가리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자신도 이미 겪었던 상황. 해원기에게 뭘 물어보면 꼬박꼬박 대답은 해주지만, 안 들으니만 못한 대답이라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다.
오보혜라고 별수 있나. 그 동그란 얼굴이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따라올 뿐.
헛간을 나서자 몸이 조금 떨렸다.
비는 그쳤으나 캄캄한 하늘, 한기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