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애수애각(碍手碍脚) (1)
궂은 날씨가 제남으로 은밀히 잠입하는 데에는 더 유리하다더니.
당장 빗방울이 굵어지자마자 오보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굼떠졌다.
조끼를 벗어 머리 위를 가리긴 했어도 워낙 어울리지 않는 복장. 금실로 산을 수놓은 저고리와 은실로 바다를 수놓은 치마로는 제대로 경공을 전개하기 어렵다.
더구나 순백의 옷에 붉은 천을 덧댄 조끼는 멀리서도 보일 만큼 튀어서 어두워진 날씨가 유리하긴커녕 불리할 지경.
곳곳에 널린 계단식 밭을 따라 울퉁불퉁 이어진 구릉 지대를 이용해 수색을 피하는 것도 한 시진이 한계였다.
선두를 맡아 부지런히 앞길을 찾던 오소민이 마침내 오보혜를 보고 혀를 찼다.
“쯧쯧, 귀한 집 아가씨가 이 무슨 고생이람. 이래서야 아까 보여준 결연한 호기도 소용이 없잖소.”
역용은 진즉 다 씻겨나가 빼어난 외모를 회복한 오소민. 덕주에서 변장할 때 썼던 낡은 돛도 이미 해원기가 황정리를 업는 데 쓰도록 건네줘서, 노란 안감이 겉으로 나온 복장이지만. 그래도 일부러 황토를 발라 더럽혀놓았다.
남자가 봐도 반할 미남자.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랐던 오보혜가 털모자처럼 머리에 쓴 조끼를 밀어 올리며 인상을 썼다.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요. 개방의 장로와 똑같이 취급하는 건 실례 아닌가요? 어지간히 고약한 성격이시네.”
역시 평소에는 한 치도 지지 않으려는 성격.
둘 사이의 말싸움이 또 시작되려나 했더니. 오소민이 피식거리며 뒤를 맡은 해원기를 손짓으로 불렀다.
“해형, 저 앞에 화전민들이 사는 집이 몇 채 있더군. 날씨도 시각도 그다지 적당하지 않으니 일단 잠시 쉬도록 하지. 황 대협의 상태도 점검하고, 오 소저도.”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거다.
오보혜가 말문이 막혔지만, 마침 해원기가 다가와서 어색한 표정을 감출 수 있었다.
“다행일세. 그러지 않아도 적당한 장소를 찾던 중이었어. 제남으로 들어가는 관도 쪽 상황도 살피면서 준비도 해야 하니까.”
천이란 천을 다 동원해서 황정리가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혹여 예상치 못한 싸움이 벌어져도 놓치지 않도록 황정리의 팔다리를 전부 해원기의 어깨와 허리에 고정해서 상당히 보기 흉한 모습이지만.
해원기가 흠뻑 젖은 것에 비해 황정리는 의외로 비를 맞지 않은 듯.
맨 뒤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이면서도 해원기는 양손에 풀뿌리 같은 걸 또 잔뜩 들어서.
실제로 가장 초라한 꼴이랄까.
오보혜가 작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새삼스럽게 해원기를 훑어보았다.
이상한 사람이다.
흥륭의 별서를 포위한 백 명의 복면인들을 혼자서 물리쳤다고, 우두머리인 환관까지 제압할 뻔했다고 듣기는 했으나.
영 믿기지 않는다. 오보혜 자신도 조끼를 머리에 쓰고 공력을 운용해서 되도록 비를 퉁겨내는데. 대단한 고수여야 할 해원기만 저 혼자 비를 다 맞은 듯.
또 뒤에서 뭘 하며 왔기에 흙투성이 풀뿌리 따위를 손에 들었을까.
정체도 성격도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두두두둑.
얇은 나무껍질로 덮은 지붕이 경기하듯 울어대는 좁은 공간. 다섯 집 화전민들이 공동으로 땔감을 모아놓는 헛간 같은 곳에서 머물 허락을 받은 후에, 빗줄기가 더 세졌다.
겨울이 다 갔으니 얼마 남지 않은 나무토막들을 대충 깔아서 황정리를 눕혀놓고,
의자 대신으로 쓸 두툼한 화목을 골라서 앉고 나자.
오소민도 오보혜도 다 지쳤다.
신시(申時)가 끝날 무렵인데 밤처럼 어두운 주위. 적의 눈을 피해 이동하느라 한껏 신경을 곤두세웠고, 비가 퍼붓는 날씨에 기껏 얻은 휴식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심심풀이처럼 주고받던 말다툼도 할 생각이 없는 듯.
그런데 황정리를 내려놓은 해원기는 도리어 기운을 되찾은 것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해서.
기슭의 물길을 판다, 물이 새는 지붕을 고친다, 화로를 청소하고 불을 피운다며 화전민들을 돕더니 기어이 계란 세 개를 얻어왔고, 곧장 헛간 바닥에 지로를 만들곤 부리나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다.
지로는 땅바닥에 구멍을 파서 임시로 불을 피우게 만든 것. 당연히 화로보다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서 불을 붙이기도 어렵고 화력도 약하다. 미리 오소민에게 불을 피우라고 얘기할 법도 하건만.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해원기가 지로 앞에 앉자, 오소민과 오보혜는 홀린 것처럼 쳐다보아야 했다.
가슴팍에 엄심경처럼 매달았던 판과. 빗물을 조금 받아 속에다 뭘 잘게 찢어 넣고는 지로랍시고 파놓은 구멍 위에 얹었다.
불은 언제 피웠을까. 별안간 불빛이 헛간 안을 밝히고 얇은 판과가 금세 끓어오르자, 이번에는 왼손 주먹을 펴서 뿌려 넣는 동작.
헛간 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옅은 향기에 오소민과 오보혜가 절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향기? 뭘 끓이기에, 아니, 끓일 거라도 있나?
“해형?”
훅하고 증기가 솟구치고 해원기가 계란을 꺼내는 것까지 보자 견디지 못한 오소민이 부르고.
오보혜는 아예 자리를 바짝 당겨 동그란 얼굴을 지로 쪽으로 들이민다.
“이게, 뭐, 땅콩기름?”
조그만 판과 위에 끓이던 것들은 한쪽 구석으로 몰아놓고, 물기가 사라진 쪽에다 작은 병에서 따라낸 액체가 풍기는 냄새. 그건 분명히 고소한 땅콩기름이다.
해원기가 기름병을 도로 요대자에 넣고 젓가락 한 쌍을 꺼내며 씩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됩니다.”
그 젓가락이 또 희한한 모양이라 오보혜가 해원기를 쳐다보았다.
나무로 만든 흔한 젓가락이지만 끝부분이 마치 차를 덜어내는 숟가락처럼 납작하다. 왼손으로 계란을 세 개나 연달아 깨 넣더니 오른손의 젓가락으로 빠르게 휘저어서 판과 위에 질펀하게 노른자와 흰자가 퍼지고,
미리 한쪽 구석에 몰아놓은 것들을 휘감아 고루 섞이게 만드는데. 그 솜씨가 눈이 돌아갈 만큼 현란하다.
오보혜가 궁금해서 쳐다보는 줄 알고,
“아, 오면서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구해봤습니다. 버려진 밭이라 기껏해야 마른 우엉과 자라다만 무청에 생강 몇 톨뿐. 그래도 다행히 화전민이 닭을 길러 계란을 얻을 수 있었죠. 어설프지만 먹을 만은 할 겁니다.”
“우엉, 무청에 생강…….”
해원기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오보혜.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지혜로운 그녀답지 않게 멍청해 보인다.
그럴 수밖에.
뭘 하나 했더니 요리란다. 계단식 밭에서부터 맨 뒤에서 따라오며 양손에 들었던 흙덩이가 이거였었나.
“그거 다 맛대가리 없는 거잖아.”
훌쩍 해원기 옆에 붙은 오소민이 대뜸 불안한 표정을 짓자, 해원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호사스러운 말씀 하는구먼. 그래서 일부러 잘게 찢어 데친 거라고. 생강을 조금 으깨 넣었고 시래기가 들어간 데다 땅콩기름으로 볶는 계란을 더하면. 흠, 이만하면 요기치곤 괜찮아. 소위 우방건채초계단(牛蒡乾菜炒鷄蛋)이랄까.”
화르륵.
해원기의 설명에 응하듯 지로 안의 불이 세져서 판과가 금방 달아오른다.
오보혜가 멍하니 판과를 바라보았다.
용문세가의 지낭이라고 불린 그녀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큰 기대를 받았고, 자라면서 다양한 지식을 얻고자 애썼다. 타고난 재지와 부단한 노력, 어린 나이에 세가의 일익을 담당할 인재로 인정받으면서. 강호에 대해 적잖이 안다고 자부했다.
이번 흥륭과의 거래에 자신이 나선 것도 그런 자신감 때문. 그런데 동행한 상인 중에 동창의 간세가 끼어 들은 걸 몰랐다. 흥륭의 별서가 무너지고, 황정리가 인사불성이 되었으며, 그녀 자신도 하마터면 잘못될 뻔했다. 모든 게 그녀 탓.
그래도 어떻게든 잘못을 만회하려고, 또 본래 지닌 세가로서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해본 적 없는 고생에 나섰다.
비위에 거슬리는 미남자는 그래도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는 신분. 마음에 들지 않아도 믿을만한데.
이 남루한 더벅머리는 어떤 인물인지 감도 잡을 수가 없다.
무공의 고수라면서 이 와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리를 한다? ‘우엉 시래기 계란 볶음’이란 엉터리 같은 이름을 요리랍시고 떠든다?
아니, 그보다 지로의 불은 어떻게 세지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지지만, 그런 생각보다 자신이 뱃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오보혜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꼬르륵.
지낭이든 뭐든 엉터리 요리에 식욕이 먼저 반응하니.
“흠, 흠. 그럴듯한데. 해형은 확실히 요리에 일가견이 있나 보네.”
코를 씰룩이며 나뭇조각을 뜯어 젓가락을 만드는 오소민을 따라 오보혜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해원기가 자신의 묘한 젓가락을 먼저 오보혜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쓰세요. 나는 숟가락이 있습니다.”
판과를 달구었던 지로의 불이 금방 숨이 죽고, 헛간 안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병기를 손에 쥐었으니 적을 섬멸할 때. 오소민과 오보혜가 서둘러 판과 위의 계란 볶음에 달려들었고,
해원기가 빙그레 웃었다.
탕을 떠먹는 조그만 숟가락. 해원기가 요대자에서 꺼낸 그 숟가락으로 두 번이나 떠먹었을까. 판과 위의 계란 볶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제야 입맛을 쩍 다신 오소민이 뒤로 물러앉았다.
“쩝쩝. 맛이 괜찮아서 계란이 부족한 게 아쉽구먼. 뭐 그래도 훨씬 기운이 나네, 흐흐.”
희한하게 웃는 건 막 젓가락질을 멈춘 오보혜를 봤기 때문. 붉은 천을 댄 조끼를 머리에 이고 귀한 옷을 상관하지 않고서 먹는 데 열중한 부잣집 규수의 모습은 확실히 진기하다.
오소민이 또 놀려댈까 싶어 오보혜가 얼른 젓가락을 소매로 닦았다.
“마른 우엉이라 쓴맛 대신에 식감을 좋게 했군요. 시래기와 생강이 나름 간을 맞춰주어서. 정말 잘 먹었습니다. 우방건채초계단이라고 하셨죠? 기억해둘게요.”
허겁지겁 먹을 때와는 생판 다르게 얌전히 젓가락을 돌려주는 자태. 요리에 대한 품평과 감사도 잊지 않는다.
해원기가 수저를 다시 요대자에 넣으며 머리를 저었다.
“우스개로 한 소립니다. 다들 지치고 답답해하니 웃자고 한 얘기죠. 노숙 준비도 하지 않고 나선 적이 없었거든요. 낯선 길에서 비를 만나 마실 물이 생겼고, 화전민이 또 계란을 줘서 요기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겁니다. 이제 좀 쉬면서 앞으로의 일을 다시 의논해보죠.”
차분한 음성.
오보혜의 작은 눈이 살짝 떨렸다.
황파제전에서 깨어난 후, 오소민과 상의하다 자신이 주장해 경로를 정했었다. 그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해원기.
가만히 따져보면 자신이 너무 성급했었다. 간세를 끌어들였다는 자책, 낯선 사내들에게 구해졌다는 부끄러움, 인사불성인 황정리에 대한 미안함. 협의를 내세워 당차게 밀어붙였지만.
아직 미숙하다.
그저 제남으로 들어간다고 머리를 굴렸을 뿐,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다.
오소민이 땔감 더미에 등을 기대며 말을 받았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수색을 계속하기 어려워. 도지휘사사의 관병들은 아마 길목에 관문을 설치하겠지. 문제는 우리도 지금 움직이기 쉽지 않고, 관문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거. 물론 밤이 깊어지면 관문에 횃불을 매달겠지만.”
오보혜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작은 눈을 깜빡였다. 조금이라도 배를 채우고 비를 피해 쉬게 되면서 확실히 아까보다 침착해진 자신을 느꼈고.
“관병만 있다면 다행이죠. 동창의 환관, 빈모자화를 쓴 그자가 데리고 온 금의위를 잃고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해 소협, 그 환관에게 뭔가 특이한 점이나 언행이 없던가요?”
실제로 싸운 이는 해원기. 자세히 들어볼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해원기가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기이한 무공과 병기. 영사태화 계통의 기공을 익혀 유연하면서 궤이(詭異)하더군요. 병기는 원규지만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비전, 무림에는 거의 출현한 적이 없는… 아, 영반이란 자들과 얘기를 나눌 때 반룡령이란 단어가 나왔지요.”
“영사태화? 원규? 죄다 처음 듣는데. 그 내시 놈 뭐야?”
오소민이 어리둥절한 채 욕설을 매달자, 오보혜도 미간을 찡그렸다. 전통의 명문세가에서 다양한 학문을 배운 그녀 역시 개방의 순행장로와 마찬가지. 무림에 출현한 적이 없다는 무공과 병기를 어찌 알까.
그러나 오보혜는 다른 말에 주의했다.
“반룡령. 과연 관계가 있군요.”
“이건 또 무슨 얘기일꼬?”
오소민이 급히 묻는 걸 무시하고 해원기를 보며 말을 잇는다.
“별서에서 황 대협의 얘기를 같이 들었죠. 제가 휘주 쪽을 여쭈었던 건 그저 차상 때문은 아니었고. 황 대협도 그 점을 짚어주시더군요. 근 십여 년간 무림 중에 동창의 주구가 된 자들이 꽤 있다는데 마각을 드러낸 자는 거의 없어요. 그러면서도 각지에서 의심스러운 사건이 동시에 발생했으니 금의위를 다 동원해도 어림없는 일이죠. 하북이나 산동은 워낙 경사와 가까우니 직접 손을 쓰겠지만, 다른 지역은 분명히 동창의 명을 직접 받아 지휘하는 거점이 있을 거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지혜로운 아가씨답게 꽤 크게 국면을 따져보았던 모양.
이미 황산에 운해산장이, 태호에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또 팽가장의 주인 구주신도 팽조린이 천호 벼슬로 불리는 걸 목격한 이상. 왕보혜의 추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