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비천무영(飛天無影) (4)
해원기가 자신의 양쪽 손목을 힐끗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나풀거리는 낡은 소매. 토시처럼 묶었던 천이 다 사라져서 훤히 드러난 손목.
덕주에서 판과를 옆구리에 숨기려고 동여맸던 낡은 천을 풀어 다시 묶으려다.
그냥 두었다.
묶는 방법이 특이한 것도, 손목에 부적 같은 걸 붙인 것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 뜻한 바를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 뿐.
십대검상을 함부로 구현하지 않으려고 묶었었지.
지나치게 강대한 힘. 양손 열 손가락에 심어진 건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위력을 지녔고, 더구나 전부가 검이다.
검은 흉기. 일단 뽑히면 위험하기 짝이 없어서 남을 해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도 다치게 된다.
남을 돕는 무인이 되고자 했기에 굳이 흉한 검을 꺼내지 않으려고. 그런 뜻을 담아 손목에 천을 감기 시작했다.
어검대법(御劍大法)을 바탕으로 한 다섯 손가락, 검왕수를 이루는 검왕오지만으로도 충분할 터.
아울러 사부와 함께 창안한 검왕오형이 있잖은가. 사부의 검형수(劍形手)가 검왕수가 되었듯이, 신왕검형(神王劍形) 또한 검왕오형으로 더욱 심오해졌는데 검을 뽑을 일이 있을까. 그것도 하나같이 무서운 위력을 지닌 열 자루의 검을.
사부가 건네준 고죽(孤竹)의 지보(至寶), 이제검(夷齊劍)을 아예 봉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독문비전(獨門秘傳)의 천손검법(天孫劍法)을 다 배웠을 때, 사부가 조용히 알려준 얘기. 천손검법의 마지막 경지를 깨달으면 십대검상이 마침내 무상십검으로 바뀐다지만.
그다지 기대한 적도 없었다.
단지 사부가 정해준 좌우명, 박대정심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열심히 익혔을 뿐이었다.
이미 일신에 기연으로 얻은 가공할 힘이 있는데 또 무얼 바랄까.
그러면서 더욱 강해지는 걸 의식적으로 피했었구나.
‘풍뢰동의 기연 이후로는 박대정심을 핑계로 다른 짓만 했는데도 사부님은 아무 말씀 안 하셨지.’
스륵.
허리춤에 끼었던 판과를 원래대로 가슴팍으로 돌렸다.
다른 짓. 요리도 그중 하나였다. 오미오신(五味五辛)에 자증초작(煮蒸炒炸), 조화(調和)의 도리를 깨우친다는 엉터리 구실을 붙여가면서.
쓴웃음이 맺히고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바보 멍청이.”
오소민이 우스개로 부르던 게 꼭 맞다. 이제까지 잘난 척만 하지 않았나. 자조(自嘲)의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덕주에서, 그리고 흥륭의 별서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건만, 멍하니 오소민에게만 맡겨두다가 복면인을 죄다 놓쳤고, 비천무영인 척 환관의 무공 내력을 알아본답시고 헛손질만 거듭했다.
겁표의 도적 떼들과 황장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선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주제에.
지금도 어찌할 줄 몰라서 벗에게 기대고 있잖나.
답답하기 짝이 없다.
괜스레 판과를 묶은 끈을 만지작거리는데.
“으음.”
작은 신음에 얼른 머리를 돌렸다.
계단식 밭의 석축(石築) 그늘에 눕혀놓은 두 사람. 오보혜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조심스럽게 옆으로 이동하면서 해원기의 눈이 오보혜와 황정리를 훑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
처음 오보혜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무공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걸 파악했다. 그런데 절정고수인 황정리보다 먼저 깨어나다니.
동시안에는 황정리만이 여전히 혼수상태, 오보혜는 거의 완전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보혜가 그다지 당황하지 않고서 해원기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직은 무사한 것 같군요.”
해원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침착한 음성과 서두르지 않는 태도. 오소민이 조끼를 뒤집어씌워서 화려한 머리 장식은 엉망이 되었고, 통통한 볼에는 검댕이 묻었으며, 수놓은 치마까지 찢어졌는데도 조그만 눈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냥 부잣집의 귀하게 큰 아가씨가 아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오보혜가 바로 옆에 인사불성으로 누운 황정리를 확인하고 작은 눈을 깜빡였다.
“조금 노곤하지만 괜찮아요. 황 대협보다 내가 먼저… 적들이 쓴 약이 묘하군요. 아마 용문에 스며든 그 간세 역시 약효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거예요. 오직 황 대협을 무력화할 계획이었겠지요. 그나저나 용케 빠져나왔군요.”
상체를 일으키고, 찢어진 치마를 갈무리해 앉는다.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뻔히 알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명가의 자손답게 우아하고,
조끼를 무릎에 얹은 후에 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잠깐 머뭇대는 손. 시선이 해원기를 향한다.
“당신은 누구죠?”
빤히 쳐다보며 작은 눈에 힘을 주는 표정이 귀엽지만. 해원기의 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다.
“개방의 순행장로는 개방 안에서도 기밀로 취급되는데 아주 친한 친구로 보였고. 황 대협이 당신을 대할 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도 공경함을 잃지 않더군요. 개방과 흥륭은 아주 소원한 관계. 그런데도 흥륭의 손님으로, 또 황 대협이 신분을 보증했으니. 이런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똑똑한 티를 이런 상황에서도 내야 하나.
해원기가 조금 어이없어 입을 열지 못할 때.
“어, 아기 돼. 아가씨가 먼저 일어났네?”
마침 오소민이 돌아왔다. 흙투성이가 된 두 손을 탁탁 털면서.
짧은 시간 동안 꽤 바쁘게 돌아다녔는지 역용이 다 지워질 정도로 땀을 흘린다.
“이게 뭔 일이래? 그 빈모자화인가 뭔가 하는 약이 진짜 괴상하군. 하여간 동창 것들이 끼면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어. 썩은 고구마는커녕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아서…….”
“그간의 사정을 좀 알려주세요. 상황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얼씨구. 우리 똑똑한 대소저께서 여기서 구해줄 방도라도 있으신 듯.”
“지금 놀리는 거예요?”
“놀리긴 무슨. 이 와중에 먹을 거라도 찾으려 고생한 거 안 보이슈?”
“이 와중에 먹을 게 생각나나요? 참 속도 편한 분, 아니, 개방 분이라서 그런가?”
“허어. 여태 배 한번 곯아본 적 없는 분이.”
투덕투덕. 그래도 말이 통한다는 건가.
보자마자 또 말다툼이 시작되지만, 해원기는 오히려 한숨 돌리며 조금 전까지 별서를 내려다보던 자리로 돌아갔다.
여자와의 대화는 아무래도 힘들다.
‘비가 오겠군.’
시각이 아직 이른데도 컴컴해진 날씨. 육 년 동안 봄이면 황하 유역을 돌아다닌 경험이 민감하게 변화를 예측했고.
저 아래에선 관병들이 벌써 횃불을 준비하는 듯 점점이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둠과 비는 피신에 좋은 조건.
해원기가 몸을 일으켜 돌아보자 오소민과 오보혜의 똑같이 심각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새 얘기를 마친 모양.
“결국, 인질과 기밀 정보를 노리고 벌인 짓이겠군. 흥륭과 용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 중원의 상계는.”
“상계가 문제가 아니에요. 물가를 제멋대로 농락할 테니 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될 터. 천하의 재화를 손아귀에 넣을 셈이죠.”
“흐음, 흥륭과 용문에 이 일을 속히 알려야 하겠소. 그러려면 무엇보다 황 대협이. 아, 해 형.”
사람이란 어려움 속에서 사귀기 마련. 말다툼 대신 진지하게 상의하는 두 사람이 조금 낯설지만, 해원기가 하늘을 가리켰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움직일 때야. 황 대협은 그대로인가?”
오소민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오보혜가 한다.
“제 생각으론 내일 정오가 되어야 깨어나실 겁니다. 백초환을 쓰면서 경맥을 살폈는데, 빈모자화라고 했다죠? 음기가 성해서 다시 중화할 때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그런 약으로 봤습니다.”
“백초환?”
귀에 익은 이름에 해원기가 눈을 껌뻑이자, 오소민이 설명을 보탰다.
“오 소저는 예전에 약왕당(藥王堂)에 가서 의술을 배운 적이 있다더군. 그 빈모자화라는 약, 아무래도 궁중에서 환관들이 만들어서 자기들만 처먹던 거 같아. 에, 워낙 망측해서 입에 담기 그런데 여자가 되는 약이라나. 하여간 여자한테, 특히 순음지체(純陰之體)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고. 그래서 오 소저가 일찍 깨어난 거라네.”
순음지체는 처녀를 가리키는 말.
어려서 거세당한 남아가 환관이 된다. 그런데 이 약을 먹고 여자가 된다는 건. 오소민이 망측하다고 표현할 정도면 어지간히 듣기 거북한 얘기가 연상되는데.
해원기는 일단 황정리의 상태를 알게 된 게 마음이 놓였다.
“오 소저의 의술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 황 대협은 제가 모시고…….”
“먼저 감사드립니다. 해 소협이 없었다면. 음, 그리고 오 장로에게 경로를 들었는데 조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백 명에게 포위당하고서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해원기 덕. 그렇게 듣기는 했어도 선뜻 믿기는 어렵다. 직접 목격한 오소민조차 흐릿한 그림자만 보았고, 오죽하면 상대도 비천무영 황정리로 오인하고 있을까.
목숨을 구원받았으면서도 어정쩡하게 고마움을 표할 수밖에. 그리고서 얼른 화제를 바꾼다.
그런 면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해원기가 오소민을 보았다.
미리 상의했던 내용은 장청을 거쳐 제남의 남쪽까지 내려가는 것.
조끼를 걸친 오보혜가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적은 동창이 통솔한 금의위, 금의위의 화창반과 기황반을 대동한 환관이 우두머리입니다. 나중에 지원 온 관병은 지역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소속일 테니, 그렇다면 현지의 병력은 임시로 조달한 겁니다. 비록 동창 소속의 환관이 막강한 권력을 지녔어도 데리고 온 금의위를 다 잃은 이상 원활하게 움직이긴 어렵겠죠. 만약 저들이 황 대협이 우리를 구해 피신했다고 여긴다면 수색 범위를 넓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령체계를 급히 만들고서 넓은 지역을 뒤져야 한다.
상대에게 허점이 있다는 말.
“게다가 이번에 용문의 상단에 끼어든 간세가 제남의 흥륭까지 갔습니다. 또 무슨 불측한 짓을 저지를지 걱정이 앞서는군요. 저 때문에 황 대협이 곤란에 처하셨는데 이대로 제 안위만 따질 수 있나요. 어떻게든 흥륭에 연락을 취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해원기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피신보다 제남으로 들어가자는 소리. 오소민이 얼굴에 남은 역용약을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쩝, 틀린 말이 없어서. 장청에서 동쪽으로 확 꺾어 제남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물론 흥륭 쪽에 감시가 붙어있겠지. 그래도 일단 제남에 들어가면 나도 거지들과 연락이 쉽고, 에, 황하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잖아. 오 소저도 백초환 덕분에 기력을 되찾았으니 해 형만 고생하면. 해볼 만한 거 같은데.”
아웅다웅하더니 결국 설득당한 게 무안한가 보다. 자꾸 핑계를 만들며 슬쩍슬쩍 눈을 위로 치떠서 해원기의 시선을 피하듯.
그러나 해원기는 오소민의 의도를 바로 알아들었다.
확실히 흥륭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당장 황정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지만, 해원기에게 흥륭과의 인연은 소중한 것. 덕주의 전장에서 황륙의 태도로 이미 짐작했을 오소민이 오보혜가 의리를 내세워 제남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
황하문을 언급한 것도, 눈을 위로 치떠 동강이라는 신응을 암시하는 것도 다 해원기를 위해서다.
오보혜는 오소민의 눈짓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비가 내리면 우리에게 더 유리하죠. 궂은 날씨엔 시야가 좁아질 테니까 관도를 이용해도 눈에 띄지 않고.”
픽.
오소민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고, 해원기도 새삼 오보혜를 쳐다보았다.
말이야 참 당차지만.
머리에 장식을 요란하게 꽂고 비싼 옷을 걸친 이 부잣집 아가씨가 정말 말처럼 해낼 수 있을지.
그러나 작은 눈을 또렷하게 뜨고 입술을 암팡지게 다문 오보혜의 표정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오 소저의 뜻을 따르죠. 그럼 오 형.”
오소민이 묘한 웃음을 매달고 몸을 돌렸다.
“지금 출발하면 장청에서 제남관도로 꺾을 때는 해가 저물겠지. 비를 쫄딱 맞으면서 어둠 속을 달려보자고. 내가 앞에, 중간에 오 소저, 해 형이 황 대협을 업고 뒤에서 따르면 되겠네.”
적절한 배치라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들 옷을 털고, 해원기는 황정리를 업을 채비를 했다.
오소민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으니 다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험한 길을 무릅쓰려고 한다.
출신도 경력도 다 다른 세 젊은이. 그러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마다하지 않을 마음가짐이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협(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