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9화 (40/410)

제10장 비천무영(飛天無影) (3)

송곳이든 바늘이든 추침이라는 이 기형 병기는 어차피 끝이 뾰족하고 날이 없다.

이 척이 될까 말까 한 어중간한 길이라. 어떤 효용이 있는지 어떻게 다루는지조차 모를 처음 보는 병기가,

은은한 옥빛을 띠면서 용케도 유리광한을 막아낸다.

해원기의 동시안이 이 추침을 넘어 똑같이 옥빛을 내뿜는 중년인의 두 눈에 주목했다.

병기만이 아니라 운용하는 공력도 특이하다.

해원기가 구현한 검상은 두 자루, 유리검과 자재검. 그러지 않아도 투명한 유리검에 광한지수(廣寒之水)를 담았으니 질풍의 신법 속에선 아예 보이지도 않을 터인데.

휘청이는 추침이 바람을 거슬러 타고는 그 끝이 검기를 예리하게 찌른다.

해원기가 비록 살생을 저어해서 검기를 쇠몽둥이처럼 무겁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본질은 검의 구현. 추침의 끝이 검기를 버티는 건 그 수법과 공력의 특이함 덕분이다.

화창반의 영반이 나가떨어지자마자 해원기의 오른발이 번갯불처럼 공간을 갈랐다.

질풍결(疾風訣)에 더한 신뢰격(迅雷擊). 백여 명의 복면인들 태반을 땅바닥에 누워 끙끙 앓게 만든 풍뢰동의 기본 공부다.

유리광한을 막느라 바쁜 중년인의 훤히 빈 허리를 내지르는데.

펑.

발끝을 때리는 기묘한 힘에 해원기가 거꾸로 회전하며 반대쪽으로 돌았다.

중년인의 왼손에서 불쑥 튀어나온 막대기. 손잡이에서 비스듬히 사선으로 뻗다가 끝이 다시 안쪽으로 꺾인 형태요, 그 길이 또한 이 척 남짓, 추침보다 조금 더 긴 또 하나의 기이한 병기가 절묘하게 해원기의 발차기를 막아냈다.

양손에 두 개의 기이한 병기를 쥐자 중년인의 움직임도 변했다. 목과 어깨를 움츠렸다가 펴고, 허리와 다리를 밀었다가 당겨서. 전신이 꿈틀꿈틀, 허물을 벗는 뱀 같은 동작에.

오른손의 침추는 해원기를 쫓아 연속으로 쪼아대고, 왼손의 막대기는 손잡이에서 벌어진 사선이 계속 각도를 바꾸어 질풍의 맥을 끊으려 한다.

하나는 가늘고 뾰족한 침추, 또 하나는 각을 마음대로 바꾸는 막대기, 소위 각간(角杆)이다.

두 눈과 병기에만 어렸던 옥빛이 이제는 중년인의 전신을 감싸고,

“흐흥, 비천무영은 그저 눈을 속이고 허점만 노린다는 뜻이냐?”

자신이 붙었나.

바람을 몰고 그림자로 어른거리는 해원기에게 비웃음까지 던진다.

침추와 각간을 양손에 쥐고 옥빛을 뿜는 신공을 드러냈으니 승리는 떼 놓은 당상인가.

여전히 비천무영 황정리라고 여기면서.

빈모자화라는 보약을 먹여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떠들었던 건 까맣게 잊었다.

덕주 안덕차행에서 마주쳤던 자들. 역장이 당두라면 당두만이 성형검기를 이룬 고수. 그러나 여기서는 영반 둘이 그와 비슷할 정도고 나머지는 무공보다는 화기나 독에 특화된 자들이다.

아직 동창의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백 명의 복면인 만으로 비천무영 황정리를 상대하려는 건 오판이 아니었을까.

빈모자화라는 해괴한 약, 황정리가 있을 때에는 이 별서의 경계가 소홀해진다는 점. 간세를 통해 약점을 찔렀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침추와 각간에 어린 옥빛이 해원기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공공이라 불린 이 복면인들의 우두머리. 남삼의 중년인은 혼자만으로 능히 절정고수라 불릴 능력을 갖추었다.

두 자루의 생소한 병기도 그렇지만, 질풍결과 신뢰격을 견디는 공력도 처음 겪는다.

검왕오형으로 바꾸면 단숨에 제압하겠으나.

중년인의 기병기공(奇兵奇功)에 흥미가 크게 일었다.

‘내가 모르는 병기와 공력. 연원과 배경이 궁금하군.’

중년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몸에 회전력을 높이고 유리검을 자재검으로 바꾸었다.

질풍결이 선풍결(旋風訣)로, 목기(木氣)가 아홉 마리 용처럼 뻗어 나가는 자재구룡이 추침과 각간을 꼼짝도 못하게 얽어매면서.

왼발이 또 한 번 중년인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러나 이미 괴상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 중년인. 복부가 홀연히 뒤로 쑥 밀려 들어가 벼락 같은 발차기가 닿지 않고, 허리가 밀가루 반죽을 꼬듯 뒤집혔다.

마치 등뼈가 없는 것처럼 배와 허리 어림만 물렁물렁해졌고, 두 손을 빠르게 가슴팍에 모으자 침추와 각간이 철컥 들러붙는다.

“이놈!”

뒤집힌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도로 내지르는 손.

끼익.

선풍에 꽂아 넣는 침추를 따라 각간이 괴성을 토하며 반원을 그리는데.

자재구룡이 모조리 끊겨 나가면서 거꾸로 해원기의 상반신을 구속하려는 기세. 선풍결까지 해제되려 한다.

해원기가 조금 놀랐다. 대첨산에서 눈보라도 사역하던 이지무성에 변화무쌍한 자재검을 구현했는데. 사람의 신체라고 믿기 어려운 움직임에다 기이한 병기의 심상치 않은 위력.

선풍결이 해제되면 황정리가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검상의 변화를 주지하던 왼손으로 빠르게 원을 그리고, 자재검의 기운을 그 가운데로 무찔렀다.

우웅.

뜨르르릉.

검왕오형의 발검제형. 안덕차행의 건물까지 무너뜨렸던 장쾌한 검기건만. 침추와 각간이 들러붙은 기형 병기가 종을 때리듯 울어대며 막아선다.

“으음.”

뱀처럼 꿈틀거리며 삼 장이나 밀려난 중년인이 오만상을 썼다.

침추와 각간을 결합하고 신공을 한껏 끌어올렸으며 비장의 신법까지 동원했는데도 겨우 견뎌내다니.

눈가가 찢어질 정도로 부릅뜬 눈이 도로 희미한 그림자만 남기는 정면의 회오리바람을 노려보았다.

‘반룡령의 요청이라 굳이 간세를 이용하고 금의위를 거창하게 대동했을 뿐이다. 비천무영 황정리 따위는 눈에도 두지 않았거늘. 이건 용호방이 아니라 풍운책에 올릴 정도의 능력이잖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산책이나 하는 기분으로 나왔었다.

설사 일이 조금 틀어져도 혼자서 황정리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몰릴 줄이야.

찜찜한 기분에 선뜻 달려들 생각이 들지 않았고,

가느다란 세 가닥 수염이 다 날아간 것도 깨닫지 못했다.

‘환관?’

선풍결을 회복했지만, 모습을 감춘 채로 해원기도 손을 멈추었다.

발검제형에 밀려나긴 했어도 옷깃 하나 상하지 않은 중년인. 옥빛의 신공과 두 자루의 병기가 장쾌한 검기를 기어이 견뎌냈고, 보기 흉하게 꿈틀거리는 신법이 충격의 여파까지 다 풀어낸 모양이다.

자재검과 신뢰격은 반응을 보기 위한 탐색이었지만, 발검제형은 어쩔 수 없이 펼쳤던 순수한 강수. 검왕오형을 익힌 이래로 처음으로 버티는 자를 보았고, 그 이유를 밝히느라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신지(神智)와 공체(功體)가 완전하진 않아도 신왕공을 일으키면 어느 정도 지혜가 밝아지는 법.

“원규(圓規)였군. 영사태화(靈蛇蛻化) 계통의 신법에 진귀한 공력까지.”

혼잣말이 찾아낸 답을 중얼거린다.

추침을 축으로 삼고 각간에 붓을 물려 돌려서 원을 그리는 도구. 이걸 병기로 쓰는 건 극히 드문 경우지만 길이나 재질이 본래 병기로 제작된 거다.

그리고 뱀이 허물을 벗고 새 몸을 얻는다는 영사태화는 선가(仙家)의 전설에나 등장하는 술법이니 이름 모를 공력과 마찬가지로 유래가 불분명하다.

고대의 숨겨진 비밀까지 아는 해원기가 확실히 짚어낼 수 없다면 수백 년간 무림에 출현한 적이 없다는 의미.

중년인의 얼굴에 붙였던 가짜 수염이 날아간 걸 보고서 상대의 신분을 확신했다.

동창의 환관.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 중에서. 수족과 주구가 아니라 몸통이 직접 나선 것이다.

‘사로잡아야겠군.’

죽일 마음도 없었고. 머릿속에 떠오른 ‘대내무림’이란 단어를 포함해 알아야 할 게 많았다.

이런 수준의 고수라면 동창에서 고위직일 터.

검왕오형을 제대로 쓸 마음을 먹었고, 중년인의 능력을 고려해 공체를 바꿀 셈.

뇌정결(雷霆訣)을 일으키면 해원기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겠지만,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선풍결을 풀려는 순간.

쉬익.

돌연한 파공성과 함께 눈앞으로 닥치는 점 하나.

퍼엉!

해원기가 피하기도 전에 공중에서 폭발해 새까만 연기를 퍼뜨린다.

“대인을 지키고 제기(緹騎)를 지원하라!”

우렁찬 고함이 먼 거리임에도 귀를 울리고, 곧이어 검은 점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화살.

처음에 해원기를 노린 것보다는 느려도 수십 발이 정당 주위로 떨어지자 단숨에 새까만 연막이 뒤덮는다.

펑펑펑펑.

누굴 겨냥한 것도, 불을 지르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시야를 차단하려는 목적.

두두두.

곧장 말굽 소리와 소란스러운 기척이 전해지니.

해원기가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미시(未時)가 될까 말까 한 시각.

쾅!

흥륭의 별서가 폭파되어 황토 먼지가 뿌옇게 이는 걸 십 리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늘어선 황파제전(荒坡梯田). 울퉁불퉁한 거친 언덕에 계단식으로 일군 밭은 손을 댄 지 오래되어 흔적만 남았지만, 그 한구석에선 별서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터졌구먼. 기어이 건드렸단 말이지. 멍청한 것들이.”

오소민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곁에 주저앉자,

해원기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음. 육합폐문이 무너지고 지하의 기밀고를 억지로 열려 하면 화약이 터지도록 해놓았던 모양일세. 오 소저는 괜찮은가?”

“아기 돼지? 생긴 것보다는 가볍더구먼. 워낙 장신구를 많이 하셔서 아예 조끼로 머리통을 동여매고 치마를 찢어 묶었지. 잘 자고 있네. 그러니까 통통해졌나. 킥!”

평소의 걸진 말투를 회복하고 키득거리지만.

별서에서 여기까지 여자를 들쳐메고 뒤를 밟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세심히 신경을 썼을지.

해원기가 뭔 생각을 하든 오소민이 표정을 바꾸어 짧게 혀를 찼다.

“쳇! 황 대협이란 양반도 그렇다고. 화약을 매설한 걸 알려주지도 않고 그저 용문세가의 천금 아가씨만 살리려 했잖아. 까딱 잘못했으면 우리까지.”

해원기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우리보다 오 소저가 더 걱정돼서 억지로 버틴 걸 알잖나. 그나저나 오 형이 이쪽 길을 찾아 피한 건 좋은데 저 두 사람이 언제 회복될지. 여기 계속 머물기는 어렵겠네.”

시선이 다시 흥륭의 별서가 있던 곳을 향하고.

오소민도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병까지 동원했으니 여기까지 수색이 미칠 가능성이 있어. 나중에 화살을 쏜 놈이 제기라고 하던데. 그거 금의위에서 호종(扈從)의 임무를 맡은 자를 부르는 통칭이야. 내시 놈 하나 모시는데 백 명이나 몰렸군. 흥!”

아직 자세한 얘기를 들을 틈은 없었으나.

오소민이 정당 안에서 멍하니 구경만 한 건 아니었다.

코웃음을 치면서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곤란한 상황이야. 제남은 산동의 중심, 흥륭황가의 중요한 거점이라 별서도 저곳에 뒀겠지. 당연히 저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알겠지만, 내시 놈 쪽도 모를 리 없어. 관병을 동원할 정도인데 흥륭에 대한 감시가 소홀할까? 어떻게든 황 대협과 아기 돼지를 잡으려 들걸.”

잠에 취한 두 사람을 데리고 제남으로 갈 수도 없다.

해원기가 요대자를 문지르며 아쉬운 듯 목을 울렸다.

“흐음.”

호중객잔의 식구들을 치료하느라 백초환을 다 써서 손 쓸 도리가 없다.

당최 빈모자화란 게 뭔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 언제 깨어날지,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

오소민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해원기의 어깨를 건드렸다.

“일단 이 구불구불한 언덕을 이용해서 시간을 벌자고. 평원현 남쪽, 평음(平陰) 쪽이니까 아예 장청(長淸)으로 내려가는 것도 한 방법이야. 날이 저물면 내가 괴음(槐蔭)으로 넘어가 제남 상황도 살피고 아울러 거지들을 동원할 수 있으니까.”

낯선 지명이지만 오소민의 뜻을 알아듣는 데는 지장이 없다.

북쪽에서 제남으로 내려가던 중이었으니 아예 제남의 서남쪽을 돌아 더 남쪽으로 내려가자는 얘기. 별서에서 제남까지를 집중해서 수색한다면 더 남쪽은 맹점이 될 공산이 크다.

또 오소민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해원기가 고마움을 표하는 대신에 오소민의 허벅지를 가볍게 쳤다.

벗에게는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전할 수밖에.

한데.

“엑? 뭐 하는.”

질색하며 벌떡 일어서는 오소민. 해원기의 머쓱한 표정을 째려보다가 헛웃음을 뿜는다.

“풋, 나 참. 하여간 엉뚱한 친구라니까. 거기서 잘 살펴보고 있어. 난 이 근처에서 썩은 고구마라도 찾을 참이야. 굶는 건 사절이라고.”

오소민의 반응이 좀 아리송하지만, 워낙 제멋대로인 성격이니.

해원기가 더벅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돌렸다.

“알았네.”

그러고 보니 덕주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후로 지금까지 식은 찻물 한 잔 마시지 못했다.

별서에서 벌어진 난리 때문일까. 날이 차츰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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