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비천무영(飛天無影) (2)
중년인이 가느다란 수염을 살살 긁었다.
“산학(算學)과 기문진법으론 본좌를 따를 자가 없다. 아무리 육합폐문이라도 진안(陣眼)이 나무기둥인 이상 불에는 취약한 법이지. 화창반의 당두들이 모두 화기(火器)를 지닌 게 도움이 됐어.”
“공공께서 미리 예상하시고 하좌를 부르셨잖습니까.”
때를 놓치지 않는 아첨에 피식거리면서도 중년인의 눈매는 정당 안을 떠나지 않는다.
‘사상미리진도 그렇지만 육합폐문은 상당히 복잡한 진세. 비천무영 황정리가 신법뿐 아니라 진법에도 조예가 깊다고 했지만, 이런 학문을 어디서 익혔을꼬? 흥륭황가를 다루기 어려운 이유가 그저 황정리 때문이라곤.’
기민하고 재지가 뛰어나서 책임자로 임명된 자신이다.
비록 지금은 말을 듣지 않는 상계의 집안들을 처리하는 정도지만, 잘만 하면 얼마든지 더 높은 자리, 국면을 총괄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을 터.
용문세가와 흥륭황가의 내부를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려면 이 정당 내부의 인원을 생포하는 게 도움이 된다.
아첨에 바쁜 화창반의 영반(領班)에게 응해주는 대신에 기황반의 영반에게 머리를 돌렸다.
“독연보다 좀 더 효과를 낼 만한 게 없을까?”
검은 복면에 누런빛이 비치는 기황반의 영반이 어깨를 좁혔다.
“공공께서 먼저 쓰신 약이 워낙 특별해서. 저 독연도 마비와 혼절이 주 효과입니다. 조금이라도 강한 독을 쓰면 바로 목숨을 잃을 텐데요.”
“그걸 알고 물어보는 거지. 비천무영과 오가 계집은 놔두고 개방에서 파견한 호위만 끌어내면 좋겠구먼. 그 둘만 없애면 되잖아.”
공공이라 불리는 중년인의 나긋나긋한 재촉에 기황반의 영반이 잠깐 머리를 숙였다가 허리춤을 뒤졌다.
“독은 아닙니다만 이게 쓸모가 있겠습니다.”
“음?”
“약재로 쓸 희귀한 짐승들을 잡을 때 사용하는 거죠. 터뜨리면 지독한 악취가 숨을 못 쉬게 하고 더불어 이목구비에서 체액이 마구 분비되어 견디질 못하고 기어 나오니까요. 취류탄(臭溜彈)이라고, 좀 더러워질 겁니다.”
“어이, 공공 면전에 그런 고약한 걸 꺼내서야…….”
화창반의 영반이 불쾌한 목소리를 내지만, 중년인의 웃음이 먼저 그 입을 막는다.
“하하하, 짐승 잡을 때라. 그거 좋군. 거지들 꼬락서니 좀 보자꾸나. 써봐.”
“존명!”
기황반의 영반이 예를 표하고 곧장 몸을 날렸다.
이번에 온 백여 명은 화창반과 기황반, 각기 당두를 열 명이나 대동했고 당두 하나당 넷의 번역(番役)을 거느린다.
화창반이 육합폐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당두와 번역이 지닌 화기로 기둥을 태우는 동안,
할 일이 없었던 기황반에게 만회할 기회가 왔다.
취류탄을 다 지니지는 않았겠지만, 정당 안의 거지 둘을 끌어내기엔 넉넉한 양일 게다.
부하들만 내보내고 곁에 붙어 아첨만 일삼는 화창반의 영반보다는,
직접 나서는 게 편한 기황반의 영반이었다.
“흥륭은, 괜찮을 겁니다. 형님들이 있고, 아직 능력을 다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러나, 용문은, 저 때문에 피해를. 부, 부탁, 부탁합니다…….”
약에 취해선가. 황정리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부탁’이란 단어는 정말 힘겹게 나온다.
그래도 해원기를 붙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간절함.
“만약 당신이, 당신이 정말 그분의 뒤를 이었다면. 오 소저를 충분히 여기서 피신시킬 수 있을. 으음.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만.”
“황 대협.”
해원기가 목소리를 낮추며 황정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험한 일을 많이 한 듯 거칠고, 양쪽 손목엔 싸구려 천을 둘둘 감았으나. 해원기의 손은 생김새와 다르게 따뜻하다.
“내 안위는 돌보지 않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저도 사부님께 배웠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해원기의 사부님.
아련한 그분의 모습을 떠올리기 전에 황정리의 시선이 해원기의 양손에 머물렀다.
투툭.
촌스럽게 양쪽 손목을 감은 천이 저절로 끊겨 흘러내리고.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기세가 얼핏 느껴졌지만.
황정리는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었다.
약에 당하고 지금까지 견딘 것만으로도 대단한 고수라는 증거. 내리감기는 눈꺼풀과 함께 마침내 잠에 빠져든다.
해원기가 그 모습을 확인하면서도 여전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대협이란 칭호에 어울리는 분. 사부님의 뜻을 이어주셨으니, 저 비열한 자들에게 비천무영이 얼마나 훌륭한 협사인지를 제가 대신 보여줄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뭐가 고마운 걸까.
황정리가 듣든 말든 그렇게 속삭이고선.
몸을 돌렸다. 두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오 형, 이 두 사람을 지켜주게.”
“응, 응?”
한참 바깥 상황을 살피던 오소민이 대답하며 바로 해원기를 보려다 깜짝 놀랐다.
없다.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돌렸건만, 그 짧디짧은 순간에.
해원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당의 우측. 정당이 동향이니 우측은 북쪽이고 기황반의 영반이 먼저 수하들을 소집하기 위해 몸을 날린 곳이다.
정당의 기둥 곳곳에 화창반의 인원이 화기를 설치하느라 들러붙어서. 기황반은 한 걸음 물러나 구경하는 처지.
그들에게서 취류탄의 양을 파악하고 내부로 밀어 넣을 구멍을 찾는 게 먼저다. 물론 공공이란 중년인의 눈에 잘 띄는 곳이기도 하고.
“독연에서 화창반을 보호하는 지원은 중지하고, 전부 연락해서 취류탄을. 후읍?”
죄다 똑같은 복면을 해서 영반조차 수하를 구분하기 어렵기에, 알아보고 다가오는 수하에게 서둘러 명을 내리려다.
자신의 얇은 복면이 입속으로 말려들 정도로 숨을 삼켰다.
퍼펑. 퍼퍼펑.
“으앗!”
“허억!”
정당의 우측 편방이 무너졌으니 남은 기둥은 세 개. 그 세 개에서 연달아 화기가 폭발하면서 화창반 열다섯이 놀란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뛴다.
소매에 불이 붙은 자, 아랫도리가 불길에 휩싸인 자. 전부가 폭발에 튕겨 나가듯 땅바닥을 뒹굴어 자신의 바로 앞까지 굴러오고.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맹렬한 돌풍이 확 밀려들어서.
불기운과 독연이 거꾸로 자신을 덮쳤다.
이게 무슨 일이지? 화기를 다루는 능수들인 화창반의 인원이 자기 화기에 당한다?
이유를 따지기 전에,
기황반의 영반이 본능적으로 두 손을 떨쳐 불길과 독연을 날리려는데.
“컥!”
거친 숨을 토하느라 복면이 벗겨질 뻔했다.
전신이 밧줄에 감긴 듯 죄어들고, 목이 갈고리에 걸린 것처럼 숨이 막힌다. 그리고 어지러운 소음이 들리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목청껏 비명을 질러야 했다.
“우엑!”
기황반의 인원도 열다섯. 총 서른 명의 복면인들이 반항도 하지 못하고 한꺼번에 고꾸라지는 해괴한 광경을 볼 수도 없었다.
육합폐문은 폐색의 진법. 밖에서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시전자라도 정해진 시각이 되기 전에는 외부로 나가기 어렵다. 그만큼 견고하지만, 약점인 진안이 이미 노출되었으니 얼마나 버틸지.
어느 한쪽이라도 기둥이 무너지면 한꺼번에 진이 해제된다.
먼저 무너질 기미를 보이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해원기.
바로 바람으로 화했다. 몸은 질풍(疾風),
힘을 억제했던 손목의 천을 모두 풀었기에 두 손이 뜻하는 대로 벼락같이 검상(劍相)을 구현한다. 손은 신뢰(迅雷).
오른손에선 식지, 왼손은 엄지와 소지. 곧게 편 두 손에서 세 개의 손가락만 힘을 품고.
일지광한으로 꺼낸 유리검, 유리광한(琉璃廣寒)이 기둥에 붙은 화기를 베어 날렸다.
검이 가르는 공간이 곧장 거대한 수막(水幕)을 이루어 불길과 독연을 뒤집자마자, 오른손은 중지가 더해져 이지무성이요, 왼손은 벌어져 부챗살 같으니.
수막이 가지 치듯 뻗어 나가 복면인들을 남김없이 움켜잡는다.
유리검은 자재검(自在劍)으로 바뀌었고, 자재구룡(自在九龍)이 서른 명을 한꺼번에 후려쳐서.
비명이 합창처럼 울려 퍼졌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엄청난 속도.
질풍신뢰의 해원기가 문득 눈에 힘을 주었다. 다른 복면인들과 조금 다른 한 명. 얼굴을 가린 얇은 천, 남삼 중년인의 곁에 있던 자다.
질풍이 선풍(旋風)이 되어 목을 쥐는 순간에 오른발이 뇌격(雷擊)으로 배를 내질렀고.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는 걸 보지도 않고 서쪽으로 몸을 틀었다.
전신에 잠재해 면면부절(綿綿不絶)이 흐르는 힘. 보병청강(寶甁靑江)의 능력을 전부 끌어올린 상태다.
펑, 퍼퍼펑, 펑펑.
화창반의 영반만을 거느리고서 느긋하게 지켜보려던 중년인이 눈을 홉뜨고 소리를 따라 목을 돌려야 했다.
“으아아악!”
정당의 오른쪽에서 뒤를 돌아 왼쪽으로. 폭음이 터지면 바로 뒤를 이어 비명이 줄줄이 이어지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똑같이 바보처럼 목만 돌리던 화창반의 영반이 비로소 남쪽을 손가락질하며 급하게 외쳤다.
“공공! 저기, 수하들이!”
북쪽에서부터 시작된 비명, 정당 뒤쪽의 마흔 명이 당할 때쯤엔 남쪽의 서른 명도 이변을 눈치챘고. 전부 병기를 쥐고 달려들었다.
여섯 자루의 기형검과 스물네 자루의 기형도가 미친 듯이 공간을 베었지만.
그래 봤자 희미한 사람 그림자 하나를 확인했을 뿐.
그 그림자의 두 손이 번갯불처럼 움직이자 병기들이 하나같이 두 동강 나고, 거의 동시에 서른 명의 복면인이 바닥에 처박히는 광경.
“우와아아악!”
또 비명이 겹치며 수북이 쌓인 재가 독연 대신에 뿌옇게 일어난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면이다.
화창반의 영반이 기가 막혀 가리켰던 손가락만 까닥거리는데,
쉬잉.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 한 줄기. 희미한 그림자는 어느새 공중을 건너뛰었다.
화창반 영반의 정수리에 또 벼락이 치려는 순간.
쩡!
쇠를 때리는 지독한 굉음. 희미한 그림자가 거꾸로 솟구쳐 정당 지붕에 내려섰고, 비로소 정당 주위를 휩쓸던 질풍이 멈추었다.
내리치던 벼락을 막아낸 건 어중간한 길이의 송곳, 아니, 송곳보다는 커다란 바늘로 보이는 기형의 병기였고.
부들부들 떨리는 그 병기의 주인은 바로 공공이라는 남삼 중년인.
“이게 무슨?”
나긋나긋하던 목소리가 홱 뒤집혀 중년인이 치켜뜨는 눈을 따라 올라가는데.
“공공!”
겨우 목숨을 건진 화창반의 영반도 황망히 지붕을 보다가 또 소리를 질렀다.
송곳(錐) 같은 바늘(針). 추침(錐針)을 거두지도 않은 짧은 시간. 분명히 희미한 그림자가 지붕에 내려섰거늘,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순간에.
두 사람의 시야에서 물거품처럼 꺼져 버렸다.
휘이잉.
그리고 다시 휘몰아치는 바람. 조금 전의 정당 주위를 휩쓸던 바람이 오직 두 사람에게만 몰려가는 듯.
이미 주변을 뒤덮었던 불길과 독연은 다 사라졌고 잿더미가 된 잔재들이 이 돌풍에 홀린 듯 빨려든다.
정말 눈 깜빡할 새였지만, 그래도 이번엔 화창반의 영반까지 대처할 짬이 생겼다.
“공공!”
할 줄 아는 말이 이것밖에 없나. 기합처럼 중년인을 부르며 미친 듯이 휘두르는 쌍장에서 웅후한 장력이 마구 쏟아지자,
중년인의 추침도 수레바퀴처럼 맹렬히 돌았다.
파파파팡.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연달아 터지는 충돌음. 그나마 중년인의 추침이 바람을 찍어댈 뿐.
“커억!”
화창반의 영반은 어깨가 꺾이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통증에 당장 나뒹굴었다.
비명을 토하면서도 두 눈은 튀어나올 듯 커져서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
자신이 전력을 다한 쌍장, 숨도 쉬지 않고 십여 장을 때렸건만 손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멀쩡한 바람에 대고 헛손질을 한 격인데 어디서 날아온 건지 모를 무거운 타격.
하늘에서 떨어졌나? 그림자도 보지 못했는데?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듯해서 땅바닥을 구르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려야 했다.
“비, 비천……무영. 윽!”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능력을 지닌 자.
그 외에 누가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