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비천무영(飛天無影) (1)
퍼퍼퍼펑.
수십 발의 화탄이 또 떨어지고 헛간뿐 아니라 부속 건물 전부가 재가 되었다.
남은 건 정당 하나뿐.
“빌어먹을! 기계로 쏘는 거야. 어디서 쏘는지도 모르겠다고!”
오소민이 밀려드는 불길과 연기를 막느라 정신없이 장풍을 펼쳐 대지만, 폭음 탓에 그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나마 정당이 멀쩡한 건 오로지 해원기 덕. 두 손을 번갈아 사방으로 뻗을 때마다 불과 연기가 공간에서 사라진다. 마치 베어진 것처럼.
해원기가 돌아보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 형! 안쪽 상황을.”
이런 소란, 적의 목소리까지 들으라고 전해졌는데.
황정리와 오보혜는 전혀 움직임이 없다. 용문세가의 천금인 아가씨가 혼자 여기까지 왔을 리 만무하고, 절정고수로 알려진 비천무영이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다.
정당 앞에 깔린 돌바닥을 힘껏 밟으면서 양손을 힘차게 내밀었다.
모았던 손가락을 활짝 편 손바닥.
오소민이 빠질 틈을 주기 위해 수법을 바꾸었다.
쿵.
지면이 크게 울리며 황토까지 태우던 불길이 물결치듯 밀려가고, 동시에 독연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거꾸로 휘말린다.
지유진(地維震)의 보법과 대우신장(大禹神掌)을 한꺼번에 시전하자 십여 장이 넘게 시야가 넓어졌다.
지유진은 지면에 경력을 전달하는 진각(震脚), 대우신장은 공간을 통째로 뒤집는 힘이 있다.
정면으로 접근하던 적들이 중심을 잃는 기척, 날아오던 화탄도 멈추었다.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고 적을 찾을 기횐데.
“에? 오 형! 두 사람 다 중독되었…… 어떻게?”
오소민의 놀란 목소리에 해원기가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중독이라니. 화탄과 독연이 접근하기 전에 밀어냈거늘.
급히 고개를 돌리자 불그스레해진 오보혜의 얼굴과 비틀거리며 억지로 일어나려는 황정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잇!”
이를 악물고서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힘주어 누른 황정리. 다리 네 개가 정당 바닥에 파묻히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린다.
손꼽히는 고수가 기껏 의자를 내리누르려고 그리 힘을 써야 하나.
“헉! 독이 아니라. 제길, 용문의 손님들이 가져온 차가. 으음, 지하의 기밀고(機密庫)는 폐쇄했으나. 오 소저를…….”
숨찬 음성에 하는 말도 두서가 없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오보혜에게 가려고 애쓴다.
해원기가 급하게 다가가고, 동시안이 비췻빛으로 황정리와 오보혜를 살폈다.
중독이라는 오소민의 말을 듣자마자 준비한 제탁지검, 그러나 동시안이 일그러지며 두 손의 힘이 빠졌다.
“독이 아니다, 이건?”
독을 포함한 일체의 사기를 베어내는 제탁지검이라도 대상을 찾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두 사람의 신체는 중독은커녕 오히려 몇 시진이나 술이라도 마신 듯 열이 오른 상태. 아니, 술이라면 이미 내공으로 배출했을 터.
퍼엉!
정당 바로 앞에서 굉음이 터져 더 돌볼 여유가 없다.
화탄이 아니라 강한 경력 한 줄기, 독연이 정당 지붕 위까지 말려 올라가면서 불길이 양쪽으로 쫙 갈라지고.
예의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참, 거지들은 차를 안 마시지? 그건 예상 못했네. 세상에선 모르는 희귀한 약이 있지. 그 약은 순수한 양기를 전신에 고루 퍼뜨려 음기로 바꿔줘. 소위 빈모자화(牝牡自和)란 건데 체질이 부드러워져 무병장수하는 보약 중의 보약이야. 거지들이 맛도 보지 못했다니 안타깝구먼. 노곤하니 그냥 독에 취해 가면 좋았을걸.”
가까워지면서 상당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란 걸 깨달았다.
갈라진 불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스무 명의 복면인, 그리고 가운데 선 남삼의 중년인.
고급스러운 사모(絲帽)를 살짝 비틀어 쓰고 허리에는 넓은 띠를 느슨하게 둘러 꽤 한가한 복장이고. 얼굴은 관옥처럼 맑은데 붓으로 살짝살짝 그린 듯한 이목구비, 가느다란 세 갈래 수염이 붙었는데도 영 인상이 희미하다.
나긋한 목소리에 딱 어울리는 용모.
남삼 중년인이 좌우를 둘러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지나치게 신경을 썼나 보네. 비천무영이란 이름에 너무 겁을 냈나? 이러면 화창반(火槍班)과 기황반(岐黃班)을 동원한 게 무안하잖아. 내 나중에 반룡령(盤龍嶺)에 책임을 물을게.”
조금 무안한 듯 건네는 말에,
중년인의 바로 곁에 모시어 선 두 복면인이 냉큼 고개를 조아린다.
“황송한 말씀.”
“하좌(下座)는 오직 공공(公公)의 명을 따를 뿐이옵니다.”
자세히 보니 두건을 통째로 뒤집어쓴 다른 복면인들과는 달리 이 둘은 붕대를 감듯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얇은 천이 더 검어 보이는 좌측의 복면인.
“비천무영 황정리는 확실히 주의할 만한 고수. 일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진 건 전부 공공의 주도면밀함 덕분이지요.”
누런빛이 비치는 우측의 복면인에게 뒤질세라 치사를 올리자,
남삼 중년인이 가볍게 코를 울렸다.
“킁, 외부에선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됐다. 들어가서…….”
칭찬에 기분이 나쁠 사람이 누가 있나. 남삼의 중년인이 가벼운 기분으로 다음 지시를 내리려다가 그만 말을 삼켜야 했다.
우웅.
정당 전체가 불쑥 숨 쉬듯 울고, 지붕 위까지 치솟아 가라앉으려던 독연이 도로 퉁겨 나가는 광경.
중년인이 눈을 깜빡이다가 황망히 양쪽을 가리켰다.
“양쪽의 편방(偏房)을 부숴! 빨리!”
다짜고짜 외치는 소리에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좌우의 복면인이 더 당황했다.
정당이란 단층으로 길게 지은 건물. 중앙의 넓은 마루 좌우로 기둥을 나누어 작은 방을 두는 데 이걸 편방이라고 한다. 이 별서는 한적한 시골 농장, 당연히 정당도 작아서 기껏해야 열 명 정도가 들어갈 크기이니 편방은 그저 한두 사람이 앉아 쉴 대기실 정도인데.
기껏해야 기둥 사이의 벽장에 불과한 편방을 왜 부수라는 건가.
그렇다고 떠받드는 중년인의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아무 소리 없이 손을 뻗자 경력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펑, 펑.
벽을 종잇장처럼 터뜨리고 지붕을 날려 버리는 힘줄기. 정당 앞의 불길을 가른 것도 이들이리라.
그러나 부서져 나가던 편방 속에 멀쩡하게 버티는 기둥.
두 복면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손을 썼다.
쉬이잉.
바람 소리까지 동반한 더욱 강한 장력이라 기둥을 단번에 부러뜨릴 듯하지만.
우웅.
기둥이 또 숨 쉬듯 흔들리자 도리어 두 복면인이 휘청거렸다.
“으음?”
“이게 왜?”
손이 미끄러진 것처럼 중심을 잃을 뻔했고, 그제야 중년인이 인상을 쓰면서 제지했다.
“그만. 사상미리진의 중심에 육합폐문(六合閉門)을 설치하다니. 머리를 썼군. 그래 봤자지. 내가 온 이상 일각이나 버티겠어?”
자신만만한 태도로 정당을 살펴보며 손가락을 짚기 시작한다.
사상미리진을 해제한 것도, 화탄과 독연을 함께 발사한 것도, 미리 해괴한 약을 차에 타도록 안배한 것도.
전부 자신이 계획했다. 어떤 수를 숨겨놨더라도 피할 수 없도록.
오소민이 오보혜를 살펴보고 바로 해원기 옆으로 왔다.
“잠이 들었어. 다른 이상은 없어 보이고. 무슨 몽혼약(曚昏藥)인가?”
좀도둑이나 흑점에서 사람을 재울 때 쓰는 몽혼약이라 오해할 만큼 오보혜가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그렇게 간단하지 않네. 몽혼약이라면 두 사람이 멀쩡하게 상담을 이어갔을 리 없지.”
독이나 약리에 관한 배움이 가장 취약한 편이지만, 해원기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정보를 묻고 답하고, 심지어 오소민과 신경을 건드리며 말다툼까지 했었잖나.
해원기가 황정리를 부축해 다시 자리에 앉혔다.
“기관진식을 발동시켜 육합폐문으로 바꾸었어도 마음을 놓기 어렵습니다. 따로 벗어날 암도(暗道)가 있습니까?”
잔뜩 일그러진 황정리의 눈이 해원기를 향하며 흔들렸다.
지하의 기밀고를 폐쇄했다고만 말했는데 육합폐문이 발동한 것도 알아본다. 정당으로 들어오면서 사상미리진을 알아챈 것처럼.
처음부터 해원기의 정체를 알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 한 잔도 내지 않고 냉정하게 대했는데.
황정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음. 지하의 기밀실 외에 다른 암도는 없습니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는 이 별서를 지키는 인원도 십여 명밖에 되지 않고. 용문세가의 무인들도 오 소저의 뜻에 따라 다른 일행을 보호하려고 제남으로 향했습니다. 설마 그중에 적의 간세(奸細)가 끼었을 줄은. 으으음.”
가늘게 패인 눈이 붉게 충혈된 건 노곤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힘도 쓰지 못할 처지가 된 게 기가 막혀서.
해원기가 대강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보혜가 요구한 첫 번째 정보는 바로 휘주에 관한 것. 그래서 명차상단에 관한 얘기가 나왔었다. 같이 온 일행 중에 차상(茶商)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미리 상품이랍시고 이 별서에 시음을 권했을 터.
상대는 진즉 용문세가를 주목했고 황정리를 노렸다. 이 별서에서 오보혜와 황정리를 제거하면 단번에 부호 두 집안을 무력화하고, 동시에 흥륭이 취합한 정보까지 획득했을 것. 양곡과 비단에 소금까지 장악할 절호의 기회.
해원기가 황정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정리의 눈이 커지든 말든 그 복부에 올리는 손.
“왜…….”
당혹감을 표할 새도 없다.
“역시 몽혼약과도 달라. 빈모자화란 말은 처음 듣지만 이건 마루에 올라 방에 들기 전과 비슷하다. 나쁘진 않으나 주화입마(走火入魔)할 우려가 있어. 오 형.”
“오 소저도 거의 같아. 자고 나면 오히려 내력이 충일해질 듯해서. 뭐 이따위 보약이 있나? 젠장맞을.”
잠깐 오보혜의 완맥을 쥐었던 오소민은 계속 해원기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고. 거침없는 반말이 해원기가 아는 바를 되짚어 보느라 나온 혼잣말이란 것도 안다.
‘마루에 올라 방에 들기 전’. 이른바 등당입실(登堂入室)이라고 경지가 한 단계 오를 때 쓰는 좋은 표현이지만.
지금은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다.
당장 정체도 불분명한 적은 황정리를 상정하고 쳐들어왔건만, 그 황정리는 제 몸도 가누지 못한다. 주화입마할 우려가 있을 정도. 더구나 불길과 독연에 뒤덮인 채 백여 명에게 포위당한 상황을 피할 방도조차 없으니.
욕설이 절로 나올 판.
해원기가 침중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데.
“자, 잠깐만.”
황정리의 손이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해원기의 손목을 찾았다.
“내, 내 자만심이 여러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했습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용문세가의 오 소저는 피하도록. 마, 만약…….”
힘이 달려서 말을 끄는 게 아니다.
손목을 부여잡은 황정리를 잠시 쳐다본 해원기.
“적은 오래전부터 기회를 엿보았을 겁니다. 황 대협의 잘못이 아닙니다.”
침착한 위로에도 황정리의 얼굴은 더 굳어지고,
“내 잘못입니다. 나만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여섯째 형의 글에 주의했어야.”
“아, 지금 도란도란 얘기나 할 때입니까? 저놈들 또 뭔가 수작을 시작하는 것 같은데.”
낡은 문짝 몇 개가 달려 있긴 해도 훤히 밖이 보이는 정당이라.
경계를 늦추지 않던 오소민이 미간을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자연히 정면을 향하는 해원기의 눈에,
남삼 중년인이 삐딱하게 쳐다보며 씩 웃는 표정이 들어왔다. 좌우에 모시고 선 복면인 둘 외에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사방에서 전해지는 기묘한 진동. 정당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전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해원기의 손목에 황정리의 경악이 전해졌다.
“이, 이럴 수. 육합폐문이 해제되려는!”
사상미리진 내부, 정당에 심어놓은 육합폐문. 지하의 기밀실을 지키기 위해 여간해선 해제가 되지 않도록 한 폐색(閉塞)의 진법이거늘.
기둥들이 버티지 못하면 진법의 중추가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