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세가천금(世家千金) (4)
“…하지 않는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겨우 새어 나온 말.
정당 안에 있는 이들은 다들 비범한 능력을 갖추었고, 황정리는 당세에 손꼽히는 절정고수건만.
귀를 기울여도 무슨 소리인지.
“해형?”
혼잣말이 버릇인 걸 아는 오소민이 다시 부르고서야 해원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릴 줄 몰랐기에. 흥륭과 용문, 두 가문의 기밀한 얘기까지 듣고 말았군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폐를 끼친 셈이고, 오형이 저를 위해 힘써 준 것도 고맙지만.”
뭔 소리를 하나. 오소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고리타분한 바부탱이가 또 엉뚱한 고집을 피우려는 낌새. 아니나 다를까.
“저는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차분한 한 마디에.
오소민은 김이 팍 샜고, 오보혜는 작은 눈을 한껏 치떴으며, 황정리의 찢어진 눈매는 더욱 가늘어졌다.
기껏 오소민이 황정리의 동의를 얻어내 오보혜에게 한 가지를 물을 수 있게 되었거늘.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면.
해원기가 오소민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형, 친구라는 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본래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 이해해주게.”
“내 이럴 것 같더라.”
오소민이 마른 입맛을 쩍 다시며 그저 맥 빠진 혼잣말을 할 수밖에.
해원기가 고소를 지으며 오보혜에게 손을 모아 보였다.
“오 소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낯선 불청객이 끼어든 걸 이해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처음 보는 사이. 예를 취하며 눈까지 슬며시 감아 오보혜도 작은 눈을 깜빡이며 얼른 답하지 못했다.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다. 정중한 언행에 진심이 담겨서,
‘이 사람은 뭐지? 개방이 아닌가? 그럼 어떻게, 아니, 무엇 때문에 여길.’
지낭이라 불리는 그녀도 순간적으로 머리가 헝클어졌고,
해원기가 손을 내리며 황정리를 향했다.
차분한 두 눈이 황정리의 가늘어진 눈매를 똑바로 응시하며,
“제가 아직 어려서 제대로 행하질 못합니다. 옛 인연을 빌미로 삼아 이곳에 온 것부터가 옳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황 대협의 존안을 뵙고 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에 감명을 받은 걸로 충분하군요. 그럼.”
다시 올라가는 두 손.
오른손이 주먹을 쥐고 왼손이 그 주먹을 감싸면 포권(抱拳)의 예가 된다.
이걸로 인사를 마치고 바로 떠날 셈인데.
“잠깐!”
매서운 외침에 해원기의 손이 멈추었다.
미간이 패도록 인상을 쓴 황정리. 가늘어진 눈에서 외침보다 더욱 무서운 빛이 바늘 끝처럼 해원기를 쏘아본다.
오보혜의 머리 장식이 전부 바르르 떨고, 오소민이 의자 팔걸이를 쥐고 엉거주춤.
정당 안에 퍼지는 날카로운 기세가 머리끝을 쭈뼛하게 할 정도라.
비천무영 황정리가 당장에라도 손을 쓸 것만 같은데.
그 무서운 기세에도 차분히 쳐다보는 해원기요, 황정리도 단지 노려보기만 할 뿐.
침묵이 흐르다가,
황정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래를 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말해주겠습니까?”
처음의 냉막한 무표정과 딱딱 끊기는 어투.
이미 해원기에게 노기를 드러냈으니 그 말도 따져 묻는 듯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라도 했다간 경을 칠 것 같은.
그러나 해원기는 들어 올렸던 자신의 양손을 보며 오히려 쓴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딱히 다른 뜻 없이, 말 그대로입니다. 서로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상응하는 가치를 제시해서 주고받는, 그런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왜, 라고 물어도 되겠습니까?”
황정리의 반문이 곧장 따라붙자,
엉거주춤하던 오소민도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었고,
오보혜의 머리는 갸웃거리며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을 올려다본다. 전혀 작아 보이지 않는 눈에 의혹이 가득하다.
어째서 황정리가 계속 말을 높이는 거지?
이 무서운 기세 아래에서 태연자약한 저 허술한 사내가 누구기에?
해원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선선히 말을 받았다.
“준 적이 없는데 뭘 받을 것이며, 받을 게 없다고 주기를 꺼려 할까? 어차피 주어진 걸 돌려주었을 뿐, 본디 똑같이 지닌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황정리의 가늘어진 눈이 껌뻑였다.
인용하는 말투란 걸 느끼자마자 다시 묻는다.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스스로 깨달은 겁니까?”
올림말이라도 이렇게 연달아 캐물으면 문초와 다름없지만.
어쩐지 조금 급해진 물음에,
“어리석은 제가 어찌. 사부님께 배웠습니다.”
쓴웃음이 더욱 짙어진 해원기의 조용한 대답. 주고받는 것에 관해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더니 그게 사부에게서 배운 거란다.
즉 사부에게서 거래를 하지 말라고 배웠다는 얘긴데.
오소민과 오보혜는 이 기묘한 문답의 의미를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털썩.
돌연 자리에 주저앉는 황정리, 꼭 감은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풀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허허,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허허허, 그런데 왜, 허허.”
아까의 통쾌한 파안대소와는 전혀 다르게. 알아듣기 어려운 혼잣말이 허탈하게 뒤섞여서.
오보혜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미 무서운 기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건만, 그보다 더한 한기를 느꼈기에.
황정리가 갑자기 보이는 이 비할 데 없는 서글픔은 또 뭔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오만상을 쓰는 오소민까지 흘끔거려야 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눈을 꼭 감고 웃음조차 사라진 황정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황정리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해원기.
오소민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뭔가를 궁리하고, 오보혜도 그런 세 사람을 번갈아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갑작스런 정적이 답답했을까. 오보혜가 작은 눈을 빛내며 돌파구를 찾았다.
“도적을 쫓는다고 하셨는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난해한 문제를 풀려면 아는 것부터 접근해야 한다. 오소민이 요구했던 화제로 되돌려 말머리를 끌어내자.
해원기가 오보혜를 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오 소저께 굳이…….”
“거래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이건 거래가 아니라 제가 궁금해서 그래요. 도적이라고 외치는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와서 잡는 법. 저희 용문세가는 상인 이전에 무림의 일원이랍니다.”
구주정문에 속한 전통의 명문. 누구나 아는 얘길 일부러 꺼내며 관심을 보이니.
해원기가 버릇처럼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기서 오보혜가 자진해서 대화를 이끌 줄은 몰랐다. 게다가 사람으로서의 상식, 무림의 도리를 내세우는 바에야.
웬만하면 끼어들 법한 오소민도 잠잠하다.
난처해서 머리를 묶었던 낡은 천까지 풀어내는데.
“흐음. 오 소저, 그건 내가 말하겠네. 자세한 내용을 전갈로 받았고, 나 역시…….”
문득 눈을 뜬 황정리. 그 또한 화제가 바뀐 걸 말할 기회로 삼은 셈이지만.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감았다가 뜬 눈에 비친 해원기의 기묘한 행동 때문에.
별서라는 건 한적한 농장을 말하기에, 해원기와 오소민이 도착한 이 장원도 여느 농촌의 촌장 집과 같이 소박한 구조.
높다란 천장은 대들보와 서까래가 고스란히 드러나 특별할 게 없거늘.
그 천장을 향해 해원기가 돌연 목을 홱 젖혔다가, 곧바로 정당의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본다.
말없이 앉아만 있다가, 황정리와 뭔지 모를 소리를 나누며 답답해 보이더니.
이 무슨 경망스러운 짓인가.
그러나 그 눈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예리한 빛이 번뜩여서 황정리조차 지켜봐야 했다.
“해형, 왜…….”
말을 거는 오소민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빛나는 시선이 황정리에게 돌아갔다.
“황 대협, 이 주변에 펼친 사상미리진(四象迷離陣)의 범위가 얼마나 됩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황정리가 벌떡 일어날 만큼 놀라지만,
“육십, 오십 장까지 몰려들었군요. 인원은 백여 명, 전부가 둔형류의 신법을 익힌 복면인. 완벽하게 포위되었습니다.”
해원기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지고.
오보혜가 기가 막혀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누가 감히. 아니, 오십 장? 그 말을 믿으라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짧아지는 것도 당연하다. 대체 어떤 고수가 오십 장 밖의 기척을 알 수 있단 말인가. 혹시 황정리라면 몰라도 이 어수룩한 사내 따위가 엉터리 같은 소릴 지껄이다니.
그러나 이 중에 유일하게 해원기를 믿는 오소민은.
“엥? 혹시 동강인가?”
대뜸 얼마 전에 안면을 튼(?) 신응을 떠올렸다. 덕주 성문에서 둔형류의 신법을 극성으로 익혔다는 팽조린에게 하마터면 들킬 뻔했었던 기억.
해원기가 머리를 끄덕이며 빠르게 몸을 돌렸다. 홀연히 전해진 동강의 경보가 없었다면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
장원 주위에 펼쳐진 사상미리진을 알아보았기에, 황정리의 태도와 자신의 처신에 너무 집중했었기에.
방심했었다.
잠심침령이 이제야 좋지 않은 느낌을 거듭해서 깨우치고 있으니.
훤한 대낮에 한적한 장원을 향해 조여드는 백여 명의 복면인. 어찌 좋은 의도로 몰려왔겠는가.
우선 자신이 밖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러 나가려는 순간.
퍼퍼퍼펑.
귀를 울리는 폭음이 연거푸 터지면서 사방에서 자욱한 연기가 치솟고,
“컥.”
“으윽.”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 장원에서 꽤 떨어진 농장에서 보았던 농부들 몇이 쓰러지는 걸 확인할 새도 없다.
퍼퍼퍼펑.
또다시 터지는 폭음. 조금 전보다 십 장이나 가까워져 불길이 확 이는 게 보인다.
주변이 농장이라도 이맘때는 아직 황량한 황토 바닥이거늘. 태울 것도 없는데 흙에 불이 번지고 곧장 허연 연기가 좌악 번져서.
장원 주위가 온통 연기로 뒤덮였다.
“젠장. 이거 화탄(火彈)이잖아! 도대체 몇 발이나 쏘는 거야.”
퍼퍼퍼펑.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는다. 마치 폭우처럼 쏟아져서 오소민이 옆에서 욕하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요, 터질 때마다 가까워져서 이제는 나무로 엮은 담장과 헛간까지 불이 붙어 무너져 내렸다.
독한 화력, 무엇이든 불이 붙고, 일단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재를 만들면서 허연 연기를 뿜어대니.
해원기가 오른손을 휘두르며 크게 외쳤다.
“그냥 화탄이 아닐세. 독연(毒煙)이야!”
머리를 긁을 때 벗어 쥐었던 낡은 천을.
식지, 중지, 무명지의 세 손가락에 끼워 무너지는 헛간을 검처럼 쳐내려 했건만, 낡은 천까지 순식간에 재가 되고.
허연 연기를 무형의 기운이 벼락같이 무찌른다.
일지광한으로 열기를 누르고, 이지무성으로 범위를 확장시켜, 삼지화정으로 불길을 밀어내려는 생각보다, 먼저 제탁지검이 운용되었다는 건.
이 화탄이 전부 독연을 낳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
정당에서 헛간까지의 공간에서 허연 연기가 확 밀려 나가자, 오소민이 지체 없이 허리띠를 풀었다. 낡은 돛을 찢어 가렸던 옥구슬 달린 고급 요대. 그 요대를 뒤집어 양손으로 활짝 펼쳐 던지니.
파파팍.
산산조각이 난 요대가 노란 연기를 뿜으며 정당 주위로 뿌려졌다.
“쓰벌. 개방 비전의 웅황탄(雄黃彈) 여섯 알이면 독사 떼도 못 덤빈다구. 아이구, 아까워라!”
집 없이 돌아다니는 거지에겐 독충을 피할 수단이 절실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웅황탄은 엔간한 독기는 물리치는 효과를 가졌으나.
그 웅황탄 여섯 알이 속절없이 허연 연기에 휘말리는 광경.
속이 쓰린 오소민이 벌컥 욕설을 내뱉기 전에.
멀리서 낯선 음성이 먼저 전해졌다.
“호오, 개방이었나? 용문세가의 지낭인 오 소저의 호위가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하긴 개락일통이라고 낙양에도 총타를 둔 개방이 용문세가와 가까운 건 당연하겠지. 그런데 황 대협은 뭘 하는 게야? 비천무영은 주인 노릇도 제대로 못 하는구먼. 쯧쯧.”
안타까운 듯 혀 차는 소리까지 더한 조롱.
해원기와 오소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용문세가의 오 소저. 비천무영 황 대협.
상대는 이 별서에 누가 있는지 미리 알고서 쳐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