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세가천금(世家千金) (3)
오소민뿐 아니라 해원기와 황정리도 놀랐다.
아기돼지같이 귀여운 소녀, 용문세가의 지낭이라고 해도 그렇지.
만난 적도 없는 이를, 더구나 역용으로 본래의 면목을 숨긴 사람을 단번에 알아맞힌다?
개방 내부에서도 신비로 통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
“에헤?”
오소민의 얼굴과 목소리가 한꺼번에 뒤집히자, 오보혜의 웃음이 더 짙어진다.
“호호호, 총타에도 가지 않는 분을 소녀가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그저 존함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죠. 개락일통(開洛一通), 저희 집안과 귀방은 오랜 맹우(盟友). 동명이인이 많더라도 흥륭의 별서에 손님으로 오실 분은 순행장로뿐이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이런. 쯧.”
오소민이 뒤집혔던 얼굴을 구기며 얼른 혀를 찼다.
개락일통은 개방의 총타가 개봉과 낙양을 번갈아 쓴다는 뜻. 당연히 낙양의 용문세가와는 같은 구주정문(九州正門)으로서의 친분이 있고, 오소민의 이름도 그렇게 들었을 테지만.
자신이 오보혜를 대뜸 알아본 게 되레 신분을 노출한 빌미가 되었던 것.
아는 척 기선을 점하려다가 거꾸로 당한 셈이니.
이 소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용문세가의 꾀주머니라는 이름이 괜히 붙었을까.
오보혜가 웃음을 거두며 해원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황 대협께서 갑자기 기다리라고 하시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랍니다. 개방 분들이라면 같이 얘기를 나눠도 관계없겠죠. 흥륭과 언제부터 안면을 트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물거리는 귀여운 입술이 잘도 움직인다.
이미 오소민의 신분을 파악했으니 옆에 있는 해원기 역시 같은 개방 사람이라고 여겼다.
해원기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도 일단 차림새가 오소민보다 훨씬 개방스러웠으니까.
‘같이 왔으니 순행장로와 같은 급이란 건데. 들어본 적이 없어. 하긴 당세의 개방은 고수를 계속 배출하는 융성기라.’
그쯤 생각하면서 황정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미리 약속을 잡았던 자신을 이렇게 한자리에 부른 이유가 개방의 손님인 건 조금 의외. 그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이다.
황정리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가 펴졌다.
“흥륭의 사정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나는 이미 본가에서 지워진 이름, 단지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강호의 소식을 전해줄 뿐이야. 오 소저를 만나기로 한 것처럼 이쪽 친구들 역시 본가의 요청을 따르는 걸세. 자, 무슨 얘기를 듣고 싶나?”
구차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자, 오보혜가 머리를 조금 숙였다.
어떻든 간에 상대는 당세에 손꼽히는 절정고수. 괜스레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소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럼 약조대로 두 가문은 상응하는 정보를 교환하기로 하고. 음. 개방 분들은 흥륭의 몫으로 치겠습니다.”
사과하는 예는 갖추어도, 개방을 끌어들인 책임은 흥륭이 져야 한다는 완곡한 표현.
비천무영 황정리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
나이나 생김새로는 부잣집의 응석받이 같은데. 보통내기가 아니다.
황정리의 입가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스치고.
“오 소저가 용문세가를 대표해 직접 온다고 들었을 때부터 흥미가 일었지. 과연 당차구먼. 굳이 흥륭을 들먹이지 않아도 나, 황정리의 이름으로 이번 모임을 보증하지. 되었나?”
오소민 때도 그렇고.
무표정한 황정리를 즐겁게 하는 건 젊은이들의 대담함인 듯.
충분한 대답을 들은 오보혜가 통통한 볼에 예쁜 보조개를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소녀는 두 가지를 여쭙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휘주와 양호 지역의 최근 상황이고, 두 번째는 흥륭이 작년에 입은 피해지요.”
거침없는 질문에 황정리의 미소가 더 짙어진다.
두 가지라면서 범위가 상당히 넓다. 휘주만 해도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게다가 양호라면 호북과 호남을 통틀어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흥륭에서 지워진 황정리에게 흥륭 내부의 구체적인 사항을 말하라니.
교활하다고 할 만한 질문이지만.
황정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휘주라면 차상(茶商)과 황산(黃山)이 기억나는군. 금년부터 차 가격을 올리기로 했는데, 이를 반대하는 작은 행상들이 많아서 예전처럼 춘차(春茶)를 편히 즐기기는 어려울 거라는 얘기가 하나. 또 하나는 명차상단의 대당가(大當家)가 누군지 모르는 이로 바뀌었고, 그 때문에 모봉차(毛峰茶)가 아닌 벽라춘(碧螺春)이 대량으로 풀렸다는 것이지.”
“휘주의 상단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황산에서 나는 모봉차 대신에 강소(江蘇)의 벽라춘을요? 흠.”
명차상단이 중원에서 가장 큰 차상이긴 해도, 다른 상단처럼 긴밀하게 조직되어 있지는 않다.
원래 차상이란 작은 행상들로부터 비롯되어 차츰 서로 손을 잡아 커진 형태. 상단의 이름을 걸었어도 몇 개의 집안이 함께 사업을 의논하고 결정한다던데.
오보혜가 작은 눈을 깜빡이자. 오소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나도 들어봤는데. 이당가(二當家)와 삼당가(三當家)가 전부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행상들이 많이 흩어졌다고. 벽라춘이면 태호(太湖) 쪽이구먼.”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셈으로 아는 체를 했지만.
오보혜는 그저 고개만 까닥거렸다.
“고마워요. 우선 황 대협 말씀부터 듣죠.”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얘기.
오소민이 인상을 쓰든 말든,
황정리의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조금 접혔다.
“그래서 모봉차의 산지인 황산을 한번 둘러보다가 천도봉(天都峰) 기슭에 묘한 산장 하나가 새로 지어진 걸 발견했네. 이름은 운해산장(雲海山莊)인데 과거에 남궁검문(南宮劍門)이 있었다던 바로 그 위치더군.”
“네?”
황정리의 묘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듣지 못한 오보혜.
오소민도 의아한 듯 눈을 껌뻑이는데.
해원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에 걸리는 단어, 남궁검문. 오래전에 멸문되어 무림에서 잊힌 이름이라 오보혜도 오소민도 생소하겠지만.
그 후대가 잠시 등장했었던 일을 해원기는 사부에게 들었었다. 그 후대도 이미 죽어서 남궁검문의 맥은 완전히 끊겼다고.
황정리는 못 들은 척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작년 추분을 지났을 때였나. 일부러 방문하진 않았으나 드나드는 자들이 꽤 실력을 갖춘 것 같더군. 다음은 양호 지역. 장강선단이 갑자기 세력을 확장해서 동정호만이 아니라 파양호(鄱陽湖)를 비롯한 각지의 유명한 물길까지 직접 배를 보낸다네. 물론 태호도 포함되지. 내가 남쪽으로 가면서 직접 목격한 걸세.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정도로.”
휘주 쪽은 들은 얘기, 황산에선 새로 발견한 운해산장, 양호 지역은 직접 목격한 장강선단의 변화.
황정리는 그저 정보를 제공할 뿐, 해석은 듣는 이의 몫이란 건가.
냉정하게까지 느껴지는 음성이 바로 두 번째로 넘어간다.
“오 소저가 흥륭의 피해를 알고자 하는 건 용문세가와 비교하려는 목적이겠지. 흥륭의 작년 피해는 예상의 칠 할이 되지 않았네. 주로 염상단에서 발생했고 전장은 현상유지랄까. 자세한 금액은 내가 말할 부분이 아니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이 극히 간단했지만, 오보혜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예상의 칠 할 이하라면. 황 대협이 전장의 상차를 지켜주신 게 큰 힘이 되었군요. 그들이 노리는 건 소금이 아니라 돈이니까요. 게다가 염장이 많이 망가졌음에도 흥륭이 소금 가격을 그대로 유지해준 데에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본가의 위탁을 받았을 뿐. 감탄은 흥륭에게 직접 전하게.”
황정리가 무표정을 회복하며 말을 거두었지만, 오보혜는 활짝 웃는 얼굴.
“소문이 많이 나지 않았다고 강호가 황 대협의 음덕을 입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계란이 탐이 난다고 닭의 배를 가르는 무지한 자들, 양곡과 소금의 가격이 안정되고 옷감만 조절된다면 다른 쪽도 여유가 좀 생길 것이고. 무지한 자들도 깨달을 때가 오겠지요.”
‘그들’, ‘무지한 자들’.
황정리에게 감사하는 말 속에 두 번이나 나온 표현.
뭔가 다른 의미가 담겼는데, 황정리는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돌렸다.
“되었네. 오 소저가 흥륭에게 건네준 용문세가의 양곡거래 상황, 그에 따른 거래니까. 그럼 이번 모임은…….”
“아, 죄송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평소와 다른 오소민의 정중한 말투가 황정리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역용약을 발라 얼굴빛을 바꾸긴 했어도, 잘생긴 얼굴을 정색한 오소민.
오보혜에게서 얼굴을 돌린 황정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불청객이 함부로 끼어들 자리가 아님은 이미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황 대협께서는 흥륭을 떠나셔서인지 거래를 너무 여유 넘치게 하시는 듯합니다. 이건 거래라기보다, 그냥 자선이라고 하는 게. 용문세가의 지낭인 대소저도 이렇게 공정하지 못한 거래는 하지 않을 거로 사료되옵니다.”
지나친 공손함은 비아냥거림을 감춘 것이지만.
오소민이 그 반짝이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건네는 소리에, 굳었던 황정리의 입가가 다시 씰룩였다.
오보혜에게 무시당한 오소민이 역전의 계기를 찾았음인가.
황정리가 다시 오보혜를 보자, 오소민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두 분의 대화만으로 자세한 사정을 짐작하는 건 무리. 그래도 대소저의 질문은 그저 두 가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요. 공정한 거래란 주고받는 게 서로 대등한 가치를 지녀야 하는 법. 황 대협께서 제공한 정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세 가지는 넘어 보이니, 그렇다면. 어흠.”
일부러 말을 줄이며 헛기침으로 마무리하자,
활짝 웃던 오보혜의 작은 눈이 살짝 흔들렸다.
굳이 ‘대소저’라고. 큰아가씨라는 호칭을 거푸 사용한 이유가 뻔히 보이지만, 마땅히 반박하기도 어렵다.
많은 정보를 얻고자 잔머리를 쓴 건 확실하니까.
웃음을 거두고 작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소녀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나 보군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순진하게 되묻자 오소민이 바로 받았다.
“간단하죠. 오 소저가 상응하는 정보를 알려주시면 끝. 상도덕의 모범적 사례가 될 겁니다. 하하.”
입만 웃을 뿐. 별빛 같은 두 눈은 오보혜의 작은 눈을 놓치지 않는다.
제대로 되갚아주고 나서 상대의 패색을 확인하려는 시선.
‘흥, 아기 돼지가 어지간히 순진한 척한다만. 본 공자 앞에서 어딜 감히.’
허나 오보혜 역시 괜히 용문세가의 지낭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오보혜가 다시 통통한 볼에 보조개를 그려 넣었다.
“상도덕의 모범적 사례. 개방의 순행장로께선 의외로 상계에도 밝으시군요. 옳은 말씀이에요. 거래는 공정해야죠. 그렇지만…….”
일부러 말을 끄는 게 영 불길하다.
오소민이 콧등을 찡긋거리자, 오보혜가 고운 손을 살짝 들었다.
“거래란 건 본래 서로가 원하는 바가 맞아떨어질 때 성립하는 거예요.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백 가지를 내주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대등한 가치? 용문의 양곡거래가 어느 정도 가치인지. 황 대협께서 두 가지 답변을 거절하지 않으신 걸로 이미 거래는 성립되었다고 봅니다만.”
갓난아기처럼 포동포동한 손, 그리고 부잣집의 큰아가씨다운 우아한 손짓.
하지만 조그만 입술에서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또랑또랑한 말이 쏟아진다.
“더구나 거래의 상대는 흥륭. 황 대협이나 흥륭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이번 거래를 따질 자격은 없죠. 하물며 지금 개방은 손님이시니. 호호.”
일부러 말을 줄이며 웃음으로 마무리. 고스란히 오소민을 흉내 낸다.
황정리의 시선이 오소민을 향했다.
이젠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뚜렷해진 미소.
이번 공격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오소민이 잠깐 옆을 보다가 콧등을 문질렀다.
“하긴 손님 처지에 주제를 몰랐을 수도 있겠네. 아, 그 부분은 나중에 주인에게 사죄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렇지만 그 전에, 처음에 인사를 나눌 때에 오 소저와 황 대협이 나눈 말을 기억하시겠죠?”
오소민의 옆은 해원기. 황정리의 말이 끝날 때부터 깊은 생각에 잠겨서 두 사람의 흥미진진한 설전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
오소민의 말이 끝나자, 오보혜의 작은 눈이 가늘게 떨리다가.
해원기까지 셋이 전부 깜짝 놀랐다.
“하하하하!”
황정리가 고개를 젖히고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파안대소(破顔大笑)란 게 뭔지 여실히 보여주는 폭소.
정당이 울리게 웃어젖힌 황정리가 오소민과 오보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훌륭하군, 훌륭해. 둘 다 보통이 아니야. 오랜만에 이렇게 웃어보네. 오 소저는 개방 분들을 흥륭의 몫으로 친다고 했고, 나는 개인적으로 보증한다고 했으니 지금 오 장로의 질문은 내가 보증하는 흥륭의 질문이 된다라. 하하. 그래, 뭘 묻고 싶은가?”
말 그대로. 오소민이 노린 절묘한 한 수였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젊은이 간에 감정이 상하는 싸움으로 번질 터.
선배답게 나름 적절한 때에 중재에 나선 건데.
오소민이 비로소 히죽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유치한 꼴을 보여드렸군요. 뭐, 저 같은 거지가 상계의 내밀한 사정을 알아봤자 뭐에 쓰겠습니까. 사실 개방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음, 여기 제 친구가 쫓는 도적놈들이 있는데 혹시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까 해서요.”
“음?”
“도적놈?”
뜻밖의 말에 황정리도, 오보혜도 어리둥절해서 절로 시선이 해원기를 향했다.
“자, 해형.”
오소민이 흐뭇하게 부르지만, 해원기는 얼른 입을 열지 않는다.
묵묵히 오소민과 오보혜, 그리고 황정리까지 차례로 보내는 깊은 시선.
굳게 잠긴 입매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