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세가천금(世家千金) (2)
황륙이 웃는 듯 우는 듯 얼굴을 구기며 손을 벌렸다.
“이래서 말씀드리기가 좀. 강호의 소문은 많이 과장된 겁니다. 막내가 성격이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어찌 선배를 함부로 대했겠습니까. 아, 막내는 선친의 늦둥이라 다른 형제와는 나이 차가 있고, 선친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생겨서 이득은 올바르게 써야 한다고 정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죠. 이거 참.”
괜히 이름의 유래까지 밝히는 건 꽤 난감해서다.
공정한 비무라고 해도 패자에겐 굴욕일 수 있는데, 오히려 즐거워하는 개방의 순행장로 앞에서 어찌해야 좋을지.
히죽거리는 오소민 때문에 머리를 흔들면서도 가느다란 전음이 해원기에게 전해진다.
[비룡(飛龍)입니다. 소주.]
해원기 역시 알고 있어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황룡칠절은 전부 용신(龍身)의 일부분을 별호로 삼았었다. 용수(龍鬚), 용각(龍角), 용린(龍鱗) 같이. 황륙이 용조라 불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칠절의 일곱 번째만은 따로 비룡이라 불렸고, 그만큼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고 들었다.
“오 장로님,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막내는 형제들과는 다른 길, 무도를 택했고 그 자신의 의지로 집안을 돕는 겁니다. 속되게 말하면 집을 나간 셈이라, 용문세가와 저희 흥륭은 전혀 다른 상황이랍니다.”
오소민에게 말하지만 해원기에게 들려주려는 의도.
오소민이 웃음을 지우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에서야 황 대협이 흥륭 출신인 걸 알았잖소. 무림에서 소문도 나지 않았었고. 황 대협이 언제 든든한 배경으로 비천무영이란 별호를 얻었나요? 뭐, 그래도 집안 걱정은 틈틈이 했었나 봅니다. 어험.”
집 나간 자식. 황륙이 그렇게 말했어도 흥륭이 부도덕한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아니겠나.
황룡칠절을 모르는 오소민으로서는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고.
해원기가 원래의 화제로 되돌아갔다.
“황 대협이 지금 제남에 있습니까?”
덕주를 떠나는 건 옳다. 그러나 굳이 황정리를 만나라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터.
“네. 말씀드린 대로 무도를 택한 후론 집에 자주 들르지 않지만 매년 두 번, 춘분(春分)과 추분(秋分) 때에는 잠시 별서에 머뭅니다. 음, 흥륭의 기반인 염상단의 오랜 전통이랄까요. 그러면서 꽤 다양한 얘기를 해주곤 합니다. 아시다시피 어지간히 쏘다니는 생활이라.”
비천무영. 천하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강호를 좁다고 돌아다니면 자연히 남들보다 많은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겨울을 절강에서 보내고 올라왔다더군요.”
제남행을 권한 진짜 이유다.
오소민도 히죽거리던 걸 멈추고 해원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공교롭게도 표행의 목적지에서 정반대로 거슬러 올라온 격, 비로소 황륙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금의위니 동창이니. 하북팽가의 얘기까지 나오긴 했으나, 본래 찾으려는 건 겁표한 도적들.
해원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고맙습니다.”
황륙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별 말씀을 다. 소주, 얼추 결정이 된 듯하니 아직 이르지만 아침 요기를 하시지요.”
“그런 폐까지는.”
“마침 조금 있다가 제남으로 출발하는 전장의 마차가 있습니다. 통행공문을 받은 밀폐된 마차지요. 수월하게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짝.
오소민이 소리 나게 손뼉을 치며 반겼다.
“그거 좋은데. 밥 먹고 튼튼한 마차 안에서 한잠 자면 되잖아.”
해원기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황륙의 마음 씀씀이는 참으로 치밀해서 어떻게든 편의를 봐주려고 애쓰니.
그저 눈으로만 감사를 전해야 했다.
이른 아침을 먹인 이유가 있다.
덕주에서 제남까지는 빠른 마차로도 세 시진 남짓 걸리는 먼 거리. 전장의 밀폐된, 속칭 상차(箱車)라고 부르는 마차는 무게도 많이 나가고 기마무사들의 호위까지 붙기 때문에 시간이 훨씬 더 걸리지만.
꽤 속도를 올려서 점심때가 되기 전에 제남 외곽에 접어들 수 있었다.
“아함.”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오소민.
“다 왔나? 여긴 어디야?”
먼저 내린 해원기가 길 왼쪽을 가리켰다.
“평원현(平原縣) 남쪽이라네. 저쪽에 보이는 농장이 흥륭의 별서. 마차는 제남 성내로 가야 하니 우리는 여기서부터 걸어가지.”
미리 황륙의 언질을 받았는지 마차와 기마무사들은 두 사람을 내려놓고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해서.
마차에 높다랗게 꽂힌 흥륭의 깃발이 펄럭인다.
“그러고 보니 상차가 텅텅 비었던데. 아무래도 황 관사가 일정에도 없는 마차를 내준 거겠지?”
“오형의 눈치는 알아줘야 돼. 그래서 작정하고 자버렸구먼.”
“흐흥.”
황륙이 내준 아침을 몇 그릇이나 비우고 오는 내내 잠들었던 오소민이 코로 웃었다.
배불리 먹었겠다, 잠도 잘 잤겠다. 가벼운 몸으로 앞장서 걸으려는데.
몇 발 내딛기도 전에 걸음이 딱 멈추었다.
점.
얼핏 공중에 점 하나가 찍힌 듯 보여서.
얼마 전에 해원기가 부리는 동강이란 신응을 본 기억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그 순간.
팟.
“헛!”
오소민이 헛바람을 토하며 펄쩍 물러났다.
눈앞에 불쑥 출현한 한 사람.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구쳤는지. 그야말로 귀신처럼 나타났다.
갸름한 얼굴, 가늘게 찢어진 눈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쯤일까. 길게 기른 머리를 하나로 묶었고, 전신에는 보기 드문 무늬의 화의(華衣)를 갖추어 입었다.
화의란 질 좋은 비단으로 지은 옷, 또는 화려한 꽃무늬가 수 놓인 옷을 말하는데.
이 중년인이 걸친 것은 마치 학창의(鶴氅衣) 같은 무늬가 가득 덮인 장포. 짧게 다듬은 수염과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깜짝 놀란 오소민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중년인을 바라보던 해원기. 예상했던 것처럼 두 손을 모았다.
“해원기입니다.”
중년인 역시 나타날 때부터 두 사람을 훑어보곤, 정중하게 포권의 예를 취한다.
“흥륭의 깃발을 보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황정리입니다.”
얼떨떨해서 쳐다보는 오소민을 본체만체.
마치 약속보다 먼저 와서 기다린 것처럼 해원기와 인사를 나누는 중년인은.
바로 천하에서 가장 빠른 자, 비천무영 황정리였다.
커다란 헛간과 창고까지 붙은 한적한 농촌의 장원. 이곳이 흥륭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별서였고, 탁 터진 사방에서 오가는 농사꾼들도 전부 흥륭의 일원.
널찍한 정당(正堂)에는 흔한 글씨 한 점 걸려 있지 않고 작은 협탁을 덧댄 낡은 의자들만 삼면으로 놓였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동쪽에 차례로 자리를 잡자 황정리가 북쪽의 의자에 앉으며 화의 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여섯째 형이 대지급으로 보낸 전갈을 한 시진 전에 받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적었더군요. 그런데 두 분의 마차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서, 음.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음성.
비록 정중한 말투를 쓰지만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같은 형제라면서 황륙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소민은 황정리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계속해서 신기한 물건이라도 감상하듯 쳐다보더니.
“기묘한 느낌이군요. 이 장원 주위 수십 장이 다 뭐에 덮인 것 같은. 하, 곤란하시다니 어떤 점이?”
평소와 다름없이 거침없이 말을 받는다.
황정리를 따라 별서라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이미 감지한 기운. 장원의 건물뿐 아니라 사방의 평지에까지 은밀하게 펼쳐져서 여간해선 느끼기 어렵다.
일종의 진세(陣勢)일 터.
게다가 처음에 인사를 나누고 나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장원까지 안내하더니, 이젠 곤란하다고 하니.
덕주의 전장과는 판이한 냉랭한 대접이라 조금 불쾌해졌다.
해원기는 오소민에게 대화를 맡긴 채로 평범한 얼굴 그대로. 이름을 밝힌 후론 입을 열지 않는다.
황정리의 눈이 비로소 오소민을 향했다.
“개방의 순행장로시라고. 우리는 서로 배분을 따질 수 없으니 그냥 편하게 말하겠소. 이 별서는 흥륭의 기밀한 장소라 외부인은 출입이 제한되어있는데. 갑자기 여섯째 형이 대지급의 전서(傳書)를 쓰는 통에 조금 소란이 생겼다오. 그러지 않아도 바쁜 판에.”
곤란의 원인은 소란.
기밀 정보가 모이는 곳이니 독특한 연락 방법이나 암호가 있겠으나. 그것보다 황륙의 전서가 어떤 소란을 일으켰는지.
그래서 이렇게 반기지 않는 건가.
“춘분 때 모인다는 염상단의 모임 준비입니까. 이거 때를 잘못 맞췄군요. 그저 몇 가지 얘기만 듣고 바로 떠나도록 하죠.”
귀찮아한다면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
오소민의 심드렁한 대꾸가 오히려 황정리의 입가를 움직이게 했나.
“흐흠, 개방 내부에서도 신비로 가려진 순행장로라. 오해하지 마시오. 여섯째 형이 어지간히 떠든 모양이오만, 염상단의 모임 때문에 소란을 떨 정도는 아니지. 공교롭게도 이 별서가 거절하지 못할 귀한 손님이 겹쳤기 때문인데.”
의미를 알기 어려운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잠깐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어차피 비슷한 얘기를 해야 할 듯해서 이왕이면 한 자리로 모았습니다.”
다시 냉막한 음성이 해원기를 향했다.
“상관없습니다.”
해원기의 대답에 바로 일어서는 황정리. 정당 옆의 작은 문을 통해 나가자.
오소민은 비로소 이 비천무영 황 대협이 자신에게만 말을 낮추었음을 깨달았다.
배분을 따지지 않으면 보편적으로 나이의 많고 적음이 말투를 정하기 마련. 덕주의 황륙은 소주라고 부르는 특별한 인연을 드러냈지만, 황정리는 그저 말만 높였을 뿐이다.
드러내지 않은 거부감.
오소민의 흥미로운 시선이 슬쩍 해원기의 평범한 옆얼굴을 스쳤다.
‘요건 또 무슨 관계일까? 이 바부탱이는 갈수록 더 재미있어진다니까.’
황정리에게 둘째 사형과 겨룬 내막을 자세히 묻는다는 건 벌써 까먹었다.
작은 문이 다시 열리고.
황정리가 먼저, 그리고 뒤를 따라 들어오는 또 한 사람.
스르륵.
긴 치맛자락이 바닥을 쓸고, 높다랗게 틀어 올린 머리칼에 꽂힌 십여 개의 장식이 화려하게 흔들린다. 백의백상(白衣白裳), 눈처럼 하얀 바탕. 웃옷에는 금실로 산을 수놓고, 치마에는 은실로 바다를 새겼으며, 솜을 누빈 붉은 천으로 동여맨 목덜미, 그 아래의 앙증맞은 조끼는 여우 털로 만든 귀한 물건.
한눈에 알아볼 부귀한 집안의 아가씨 차림인데.
눈은 작아서 깜빡일 때마다 사라지고, 코는 마늘쪽처럼 오뚝하며, 통통한 두 볼 사이에 낀 입술은 가만히 있어도 오물거리는 것 같다. 게다가 달덩이처럼 똥그란 얼굴 양쪽으로는 삐쭉한 귀가 커다란 귀고리를 달랑거려서.
“흡.”
오소민이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귀여운 고양이, 아니 새끼 돼지다.
세상에 이렇게 화려한 귀염둥이가 있다니.
달랑달랑.
머리에 꽂은 수식과 귀걸이가 현란하게 흔들리며 소녀의 시선이 정당 안을 훑었다.
역용으로 병색 짙은 얼굴이 된 오소민, 낡은 천으로 더벅머리를 대충 묶은 허술한 차림새의 해원기.
황정리가 다시 가운데에 서며 한 손을 펼쳤다.
“낙양 용문세가의 천금인 오 소저라네. 이쪽은 흥륭과 인연을 맺은 손님 두 분.”
오보혜라고 소개받은 소녀가 우아하게 두 손을 모아 허리춤에 붙였다. 살짝 무릎을 굽히는 깜찍한 인사.
“오보혜(吳寶慧)라고 합니다.”
뜻밖의 신분이지만, 소녀가 먼저 예를 올리는데 가만 앉아 있을 수 있나.
해원기와 오소민이 분분히 두 주먹을 마주 잡았다.
“해원기입니다.”
“아, 나는 오소민이라고. 허, 이궐의 지낭(智囊)이라는 대소저(大小姐)는 여간해서 문밖에 나오지 않는다던데.”
오소민은 역시 이 소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듯. 그런데 인사를 하다가 머리를 갸웃거리는 건 ‘대소저’라기엔 너무 귀여운 용모라서.
오보혜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과찬이시네요. 감히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에 비하겠습니까만.”
소매 속에서 나온 손도 아기처럼 조그맣고 통통한데. 웃느라 사라진 눈이 해원기를 예리하게 살피는 걸 감추어준다.
무엇보다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걸까.
황정리가 그저 손님이라고 했는데도 보자마자 오소민의 정체를 파악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