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33화 (34/410)

* 제9장 세가천금(世家千金) (1)

낙양 용문세가.

세간에서 그 역사가 수백 년은 족히 되었다고 말하는 전통의 명문호족.

삼대(三代)와 한진(漢晉), 수당(隋唐)에서 북송(北宋)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왕조가 도읍을 삼은 낙양에 뿌리를 두었기에 일찍부터 관계(官界)와 상계(商界)에 두루 두각을 보였고,

난세에 세상을 피한 기인이사들이 이궐용문(伊闕龍門)에 모이면서 무림에서도 일방을 대표하는 가문이 되었다.

중원에서 가장 독특한 관상무일체(官商武一體)의 세가로 감히 건들 인물이 드물 텐데.

황륙의 말은 유수한 부호들이 전부 동창의 협박을 받았고, 그 협박을 버틴 건 용문세가와 흥륭황가뿐이라는 뜻이다.

황륙이 불편해하는 이유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더는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지 않았다.

다시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내용. 무림세가인 용문세가와 황룡칠절이 있는 흥륭황가만이 대항할 힘을 갖추었을 터.

무인들 간의 비무가 아니다. 폭력에 대항할 무력이다.

해원기는 불쾌했다.

황륙이 동창과 하북팽가를 설명하는 동안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던 감정.

“혹시, 하북팽가가, 앞장을 섰습니까?”

뚝뚝 끊겨 나오는 말.

그리고,

지직, 지지직.

세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좁은 밀실의 벽에 전부 가는 금이 거미줄처럼 퍼져서.

“해형!”

오소민이 급히 목청을 높였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오소민과 황륙, 둘 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으니.

생전 처음 이렇게 무서운 기세를 접했다.

세 사람이 앉은 의자와 둥근 원탁은 멀쩡하고, 심지어 점원이 원탁 위에 올려놓고 간 촛불조차 흔들리지 않건만.

그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노기(怒氣)였다.

황륙이 어쩔 줄 모르다가 다시 엎드리려 해서,

해원기가 겨우 자신을 억제했다.

“그러지 말고. 우선 대답을 듣고 싶소.”

터져 나오던 노기는 눌렀지만, 평소와 다른 말투. 그만큼 그의 화를 돋운 건 무엇일까.

황륙이 엉거주춤한 채로 황망히 입을 열었고,

“죄송합니다. 소주, 결코 소주를 노하게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을 잘못해서…….”

뭐를 잘못했는지 모른 채 서두르던 사과도 이어지지 않는다.

해원기의 심해와 같은 시선이 가만히 답을 기다려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렇게 여길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광산업이야 나라의 대행이라고 전부 거머쥐는 데에 어려움이 없겠지만, 상계에도 엄연히 상도덕이 있습니다. 다른 업종으로 확장하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법, 무작정 머리를 들이밀 수는 없죠. 장사가 돈을 벌기 위함이라도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게 장사니까요.”

어떻게든 해원기의 기분을 눅이기 위해 말이 길어진다.

“흥륭이 전장업에 뛰어들기 전에 산서대전장에게 암염(巖鹽)에 관한 기술과 유통의 일부를 넘겨준 것이 그 일례지요. 그로 인해 흥륭은 산동과 하남의 일부, 그리고 강소 쪽에 전장을 개설할 수 있었으니까요. 천하는 넓습니다. 넘치는 건 나누고 부족한 건 보태는 일, 그게 모든 장사꾼의 도리인데. 으음.”

말라가는 목을 가다듬고,

“그저 이득만을 노리는 건 가장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걸 또 마치 상계의 일인 것처럼 호도할 수 있음은 협박이 공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죠.”

상계 내부에서 몰래 무력으로 이득을 갈취하기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섣불리 하북팽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진 않았으나,

장사꾼의 도리, 상도덕에 어긋난 행동을 취했다는 의미였다.

해원기의 노기를 직접 목격한 후에 한층 조심스러워진 말. 그래도 해야만 하는 말은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상인은 흑도가 아닙니다. 상계와 무림은 엄연히 다른 세상이죠. 과거에 주인이 나서주신 것도 그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직한 음성이지만.

사부를 떠올리자 해원기의 추켜올렸던 눈썹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사부와 흥륭과의 인연. 무림이 흥륭의 재산을 노리고 강도질을 하려던 걸 사부가 구해주었었고, 그로 인해 흥륭의 전대 가주는 마침내 상도(商道)가 무도(武道)와 같이 사람의 삶이란 걸 깨달았다고.

사부에게 들었던 얘기가 또 재현된다면.

해원기가 눈을 감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은 아직 어리다.

남을 돕는 무인이 되겠다고. 고통에 빠진 이들, 곤란에 처한 이들을 구하겠다고.

그저 그것만을 목표로 삼고, 그렇게만 행동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강호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스스로 만족해버렸던 건 아닐까.

무림과 강호를 구분했던 것처럼, 다른 모든 걸 좁은 견해 속에 가두었을지도.

가난한 하오문도, 부유한 흥륭도 결국은 강호에 속하거늘.

빈부와 귀천으로만 세상을 나누어 보지 않았나.

힘을 지녔음은 그 힘을 올바르게 쓸 책임까지 짊어졌음이다.

해원기가 마음을 다스리고 눈을 떴다.

신왕공의 기초가 바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잠심침령 아니던가.

“무림도, 상계도 다 강호입니다. 심지어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도 그 뿌리는 강호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삼강오호(三江五湖)든 강하호박(江河湖泊)이든 같은 물이라도 그 형세와 모양이 다르듯, 사람이 택한 길도 다릅니다.”

강호라는 단어의 유래.

뜬금없는 화두요, 또 해원기가 뜻밖에 꽤 학문을 닦은 티를 내서.

오소민과 황륙이 그저 귀를 기울여야 했다.

“곧은 강(江)이 굽은 하(河)가 되지 않고, 가득 담긴 호수가 좁게 솟구치는 우물이 될 리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이 가야 할 곳에서 길을 찾는 수밖에요. 그 누구도 남을 훼방하고 침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다 바다로 흘러 들어갈 것을 알기에. 물이 그러하듯 사람도 그러해서 근원과 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도(道)지요. 그래서…….”

남에게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한 얘기.

오소민도, 황륙도 보지 않고. 그 시선은 아득한 곳을 향한다.

오소민이 미묘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해원기가 조용히 이어가는 얘기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강호의 오래된, 누구나 아는 일종의 진리랄까. 인생을 물에 견주는 것도 흔한 비유.

그러나 해원기의 음성에는 남다른 울림이 담겼다.

듣는 이가 감명을 받을 만한데,

그보다 오소민은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해원기. 바다, 근원, 바탕이라는 글자가 전부 이름에 들어 있잖아. 누가 지었을까, 역시 사부라는 사람?’

뭔가 또 생각이 날 듯 말 듯 해서, 해원기의 다음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묵계는 지켜져야 합니다. 흥륭뿐 아니라 상계의 일에 제가 어찌 끼어들겠습니까마는, 무인이 가야 할 길을 저버리고 그 힘으로 침해하려 든다면 가만둘 수 없죠. 오형.”

‘묵계’라는 단어가 다시 언급된 걸 모르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 왜?”

“개방이 하오문을 보호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았네. 혹시 하북팽가의 다른 소문, 혹은 하북팽가 외에 주구가 된 자들에 대해서 들은 게 있을까?”

조금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개방의 소식통, 특히 하오문을 담당하는 순행장로의 도움이 절실한데.

오소민보다 황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주, 제남에 가보시겠습니까?”

뜻밖의 제안.

해원기의 의도나 오소민의 정체를 다 아는 황륙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두 사람의 시선이 모이자 황륙이 이마를 천천히 긁었다.

“제남은 산동의 중심. 포정사와 지부 등의 고관들이 대부분 강직한 선비 출신입니다. 지금 소주와 오 장로가 여기 덕주에 머무는 건 그다지 좋지 않죠. 차라리 제남이 금의위나 동창의 눈을 피하기에 이롭고, 표행에 관한 단서도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 그리고.”

맞는 말이다.

병색 짙은 얼굴의 오소민과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인 차림의 해원기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용변장을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 아울러 덕주에서 더 얻을 게 없는 바에야 공표라도 표행이 지나갔을 가장 큰 고을인 제남에서 다른 단서를 찾는 게 낫다.

헌데 황륙이 조금 겸연쩍게 말을 끌다가,

“어차피 알려질 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남에는 본가의 별서(別墅)가 있어서 모든 정보가 모이는데, 그곳에서 막내를 만나시면 어떨까 해서요.”

제남은 산동뿐 아니라 강북의 주요 거점이니 흥륭황가의 정보가 모이는 별서가 있다고 이상할 건 없다.

물론 공개적으로 밝히기 어려울 내용이지만, 마지막에 엉뚱하게 ‘막내’를 만나라니.

“에? 여덟째면 황팔(黃八)?”

오소민이 얼떨떨해서 대뜸 반문하자,

황륙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얼핏 말씀드렸는데. 선친께선 일곱째인 가주까지만 숫자로 이름을 지으셨고, 막내는 전혀 다른 이름입니다. 오 장로님은 들으면 아실.”

그 쓴웃음에 오소민이 더 이상한 표정이 되고, 이어지는 황륙에 말에 그만 버럭 소리를 질러야 했다.

“황정리(黃正利)라는 이름입니다.”

“비천무영(飛天無影) 황정리!”

이 이름엔 해원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편의를 위해서긴 해도 해원기의 직업은 쾌체. 자연히 쾌체나 보표 등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

무림에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쾌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이름.

왜냐하면 비천무영 황정리는 당세에 공인된 천하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황룡칠절의 막내가 비천무영과 동일인일 줄이야.

“천하제일 신법대가(身法大家)가 흥륭황가의 막내였다고…….”

오소민이 멍하니 입속으로 중얼대기만 해서 이번에는 해원기가 오소민을 일깨워야 할 차례.

“오형!”

“아, 황정리는 별호 그대로. 하늘을 날고 그림자도 남기지 않는다는. 경(輕), 쾌(快), 표(飄), 홀(忽), 부(浮)의 경공 오대결(五大訣)을 전부 극경에 이르도록 익힌. 게다가 은신(隱身)과 장신(藏身)에다 진법(陣法)까지 통달한 명실공히 당세의. 어쩐지, 어쩐지!”

어지간히 흥분했는지 와르르 나오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다가 갑자기 스스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상체를 와락 탁자로 당겨 황륙을 빤히 쳐다보며,

“하북팽가라도 감히 흥륭을 건드리지 못한 배경이 이거였군요. 당세 무림의 십대고수, 아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절정의 고수가 떡 버티고 있는데. 잠깐!”

누가 다그쳤나.

혼자서 대들 듯 떠들다가 별안간 히죽거린다.

“흐흥, 이거 좋은 재료인데. 둘째 사형을 놀려먹기에 딱 어울리는. 후히힛.”

괴상망측한 웃음.

말을 꺼낸 황륙이 도리어 무안하고, 해원기의 표정도 평소처럼 풀어졌다.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제정신으로 돌아온 오소민이 설명해줄 터.

덕분에 방 안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져서,

오소민이 짓궂은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해원기를 보았다.

“해형, 강호의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십대고수니 뭐니 떠들긴 해도 진짜배기 열 명을 제대로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어. 진자현 따위에게 장풍무명이라고, 팽조린에게는 구주신도라잖아. 그러나 이 비천무영 황정리, 황 대협은 수준이 다르다고. 사천당가(四川唐家)의 암기십팔관(暗器十八關)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통과했지, 검의 대가인 화산검협 마 대협의 검을 삼십 초나 가벼이 피해서 심지어 어검술조차 닿지 않는다고 전해지지. 게다가, 히힛.”

괴상한 웃음의 이유가 이제 나오나 보다.

“경공으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본 방의 호법장로께서 자존심을 걸고 붙었다가 한 번은 가랑이가 찢어졌고, 또 한 번은 전날 먹은 개고기까지 토하는 망신을 당하셨다고 하더라고. 키킥.”

들어보니 오소민의 둘째 사형인 취개 역시 경공으로 패한 적이 있다는 얘기.

해원기를 깍듯하게 받드는 황륙이 제남행을 권한 건 비천무영 황정리를 만나라는 의미요, 오소민이 해원기를 따라가면 자연스레 황정리와도 알게 될 터. 머리가 재빨리 돌아가 취개를 놀려먹을 궁리를 한 모양이니.

참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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