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용호풍운(龍虎風雲) (4)
해원기의 눈은 이미 심해와 같았고, 심각해진 얼굴은 스스로 느낄 만큼 굳어졌다.
황륙은 과연 오소민보다 더 상세하고 내밀한 사정을 알고 있지만, 얘기를 들을수록 머릿속에 계속 한 단어가 휘돈다.
‘대내무림.’
궁정(宮庭)을 지칭하는 대내(大內), 강호무림을 겨누었다고 해도 기껏 황궁 안을 의미하는 대내에다 무림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까. 무림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오소민 앞에서 실태를 보였던 적이 있어서, 지금 황륙 앞에서는 묵묵히 마음을 다스리지만.
그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드는 운명적인 예감.
황장촌 스물네 명의 무고한 죽음은 해원기를 무림으로 이끌기 위한 동기였을 뿐이다.
오래된 묵계를 깨지 말지어다.
무림을 건드리고 강호를 어지럽히지 말지어다.
“죽은 도연의 뒤를 이어 경수사(慶壽寺)의 주지를 맡은 묘능(妙能)이라는 중입니다. 허나 도연과는 달리 겉으로 나선 적이 없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황실과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하더군요. 도연의 제자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드린 십이태감과 이십사아문의 형세를 조성한 자가 바로 이 묘능이라고 저희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수사는 영락제 이후로 황사(皇寺)로 봉해진 절.
처음 듣는 이름이다.
전혀 모를 인물. 도연의 뒤를 이었으니 또한 세속에 간섭하려는 승려일까.
오소민이 머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놈은 또 뭐지? 아, 그러고 보니 황 관사도 요 중대가리에 관해서는 잘 모르나 봅니다.”
추정이란 표현을 썼다는 걸 들먹이자,
황륙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만, 그건 조금 다른 얘기라. 하여간 동창은 금의위란 수족을 얻고서도 다른 쪽으론 강호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경사와 남직례, 그리고 심삽도의 관아를 총동원해서 무림 인사를 조사했죠. 몇 년에 걸친 조사, 그 결과로 두 가지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혹시, 용호방과 풍운책?”
오소민이 빠른 입을 놀리자 이번에는 황륙도 조금 놀란 듯.
“오, 과연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그 이름을 아실 줄이야.”
“아, 뭐. 그 정도야… 에헴, 그런데 그 이름도 얼마 전에 들었을 뿐이라. 그게 대체 뭡니까?”
조금 멋쩍었나. 오소민이 냉큼 잘난 척을 거두고 묻는다.
황륙이 잠시 오소민을 보다가 모았던 손을 풀었다.
오른손을 오소민에게 펴며,
“용호방은 당금 무림의 현황이랄 수 있습니다. 중원의 형세, 각파의 분포, 고수의 이름과 그 특징까지 담겨 있어서. 이에 근거해 포섭할 자들을 고른다더군요.”
왼손은 해원기 쪽.
“풍운책은 일종의 사서(史書)에 가까울 겁니다. 과거부터 당세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얘기, 오래된 전설이나 기인이사의 행적 등을 모아놓았다니까요.”
오소민이 자신과 해원기에게 각각 향한 황륙의 손을 보다가 픽 웃었다.
“하핫, 당세의 무림인은 눈앞의 먹이니까 과거급제를 시키는 것처럼 용호방이라 하고, 과거의 전설과 기인이사는 바람처럼 사라진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풍운책? 잘도 갖다 붙였구먼.”
용호풍운.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붙이는 건 확실히 무림을 겨냥했기 때문일 터.
절로 비웃음이 나오지만. 중간에 앉았기에 황륙이 그냥 양손을 펼친 게 아니라는 걸.
오소민은 눈치채지 못했다.
당세의 고수와 전설의 기인.
황륙은 오소민과 해원기의 배경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누가 용호고, 누가 풍운인지.
황륙이 펼쳤던 두 손을 다시 모았다.
“무림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하지만, 굳이 용호방과 풍운책으로 나누어 정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금의위만으로는 손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죠. 금의위의 본분은 황제를 보위하고 의장을 책임지며 비밀리에 내부를 사찰하는 것. 차출해 동창의 수족을 삼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해원기가 그저 듣고만 있어서 대화상대는 거의 오소민이 되었다.
“그래도 워낙 인원이 많은 부서인데. 천호(千戶)만 열네 명이던가.”
“순행장로다우시군요. 맞습니다. 금의위는 지휘사(指揮使)에서 진무사(鎭撫使)에 이르는 고급 관원 아래에 십사천호소(十四千戶所)를 두지요. 각각의 천호는 열 명의 백호(百戶)를 포함해 대략 천백 명의 수하를 통솔하고, 그 외에도 총기(總旗)나 교위(校尉), 역사(力士)들도 부지기수. 허나 그 절반을 동창이 끌어 써도.”
“하긴. 칠팔천은 숫자일 뿐. 개중에 무림에 쓰일 만한 자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앞에서 뛸 사냥개가 필요합니다.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사냥개는 많을수록 좋고요.”
“좋은 먹이에 화려한 치장까지 더해주고 말이죠.”
“네. 그럴듯한 관직과 풍부한 이익입니다.”
“행천호의 벼슬, 광산의 이권. 그렇군요.”
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어서.
화제는 이제 동창에서 하북팽가로 넘어갔다.
사정을 아는 사람끼리 얘기하니 조정의 주구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금방 이해되지만.
황륙이 까놓고 ‘사냥개’에 비하는 건 그만큼 반감을 가졌다는 뜻.
해원기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팽가장의 배경이랄까, 바탕이 무엇입니까?”
오소민과 경쾌하게 말을 주고받던 황륙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고.
그 표정을 감추듯 시선을 탁자 위로 떨어뜨렸다.
“당산(唐山)을 중심으로 광산이 개발된 건 수십 년 전, 아시다시피 금이든 은이든 철이든 광산은 전부 나라가 직접 관리합니다. 개인으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규모의 일이니까요.”
광맥을 찾는 어려움뿐만이 아니다. 광맥을 찾았다 해도 단순히 산을 부수는 데에만 얼마의 투자가 필요할까.
화약은 아무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요, 인력과 물자도 무수하게 필요하다.
그렇게 광산을 열어서 얻는 이득, 그건 너무나 거대해서 세상의 판도를 바꿀 정도. 금은보화의 가치는 차치하고, 쇠는 바로 병기와 직결되니 어느 권력자가 이를 놔두려 하겠나.
당연히 모든 광산은 나라가 소유하도록 되어 있다.
“팽가가 하북의 토박이인 건 맞습니다만, 팽가장이 당산 북쪽에 세워진 건 십여 년 전입니다. 무가(武家)를 표방했으나 무관(武館)을 경영한 적도, 이전에 이름을 날린 고수도 없이. 말 그대로 불쑥 출현했죠.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도법(刀法)의 명문으로 ‘도산초벽’이니, 가주인 팽조린이 도법의 절세고수로 ‘구주신도’니 하는 소문이 퍼졌답니다. 뭐, 강호에서 흔히 들리는 과장된 소문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게 하북만이 아니라 중원 전체, 심지어 요동(遼東) 넘어 관외(關外)까지 퍼졌다는 게. 흠.”
오소민이 해원기를 보며 말을 보탰다.
“특별한 일화나 믿을 만한 근거도 별로 없었지. 누구와 싸워 이겼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뭐 이런 얘기가 있어야 하잖아? 무공도 그냥 팽가도법(彭家刀法)이래. 그러면서 도산초벽과 구주신도라니. 근데 또 웃기는 게 이런 소문을 확인해본 사람도 없다더군. 무림의 도객(刀客)들은 다 죽었나.”
“백병지수(百兵之帥).”
해원기가 또 오래된 단어 하나를 꺼내며 눈썹을 모았다.
도는 가장 보편적인 병기. 검을 쓰는 이들이 많아지긴 했어도 기문(奇門)을 제외하면 도야말로 가장 널리 사용된다.
크기와 형태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익히기 쉬우며 효용이 높은 도.
그래서 모든 병기의 대장이라고 백병지수라 불린다.
오죽하면 강호에서 무력에 의거해 살아가는 자들을 통칭해 ‘칼 밥을 먹는다.’라고 할까.
허나 황륙이 짧게 혀를 찼다.
“쯧, 담도(膽刀)를 말씀하시지만…….”
이 또한 옛날 단어.
뒤는 오소민이 잇는다.
“칼은 여전히 많지만 담력(膽力)을 지닌 이는 거의 없지.”
무림의 격언에 다음과 같이 일컬었다.
곤(棍)은 백병지조(百兵之祖)요, 도는 백병지수며,
창(槍)은 백병지절(百兵之絶), 극(戟)은 백병지괴(百兵之魁),
검이야말로 백병지왕(百兵之王)이로다.
모든 병기의 조상인 몽둥이는 초지(初志)를 갖기 어렵고, 모든 병기의 대장인 칼은 무엇보다 담력이 있어야 하며,
모든 병기를 끊는 창은 스스로를 지키기(守己) 어렵고, 모든 병기의 으뜸인 극은 패기(覇氣)를 지녀야만 하니.
곤의 뜻, 칼의 담력, 창의 지킴, 극의 패기가 전부 담긴 병기의 왕은 바로 검이구나.
무릇 하루면 몽둥이를 휘두르고, 한 달이면 칼을 쓰며, 일 년이면 창을 뻗고, 십 년이면 극을 돌리지만. 평생을 닦아도 검의 뜻은 알기 어려우리.
하지만 병기가 다르다고 경지까지 다르랴. 배우기 쉽다고 다다르기 쉬운 게 아니요, 배우기 어렵다고 오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고로 세상에 곤조(棍祖), 도수(刀帥), 창절(槍絶), 극괴(戟魁)가,
다 검왕(劍王)처럼 드물도다.
본디 병기를 익히는 데에는 무엇보다 부단한 수련이 필요함을 강조한 격언이지, 병기의 고하를 나누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의지, 담력, 독심, 패기, 그리고 깨달음. 어떤 병기를 익힌들 똑같이 거쳐야 할 과정이다.
‘정하불상침’보다 더 오래된 얘기일 것이나.
당세 무림에선 이미 잊혀 입에 올리는 이가 거의 없다.
다만 도검을 손에 들고 하염없이 강호를 떠돌며 무도(武道)를 걷는 낭객(浪客)이기에,
그냥 검객이니 도객이니 불릴 뿐.
황륙이 입가에 고소를 매달고 해원기를 바라보았다.
“소주, 무림이 생기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참된 재주와 실력보다는 헛된 명성이나 과장이 더 먹히는 경우가 많지요. 한 자루 병기에 목숨을 걸고 강호를 걷는 진정한 무인들은 이제 거의… 음, 하물며 하북팽가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과시했음에야. 하북의 태반은 이미 팽가의 지반(地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원기가 당세 무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걸 고려해서 완곡하게 설명을 더했지만.
동창에 대해 얘기할 때보다는 조금 껄끄러운 듯.
오소민이 제대로 된 도객이 없다고 한 말보다,
해원기는 황륙이 불편해하는 느낌을 먼저 받아서, 깊이 가라앉은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팽가장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도산초벽이든 구주신도든.
흥륭황가의 여섯째에겐 다른 부분이 더 민감한 문제일 터.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어디서 얻었기에 단 십 년 만에 하북의 태반을 집어삼켰을까.
그제야 오소민도 처음으로 머뭇거리는 황륙의 기색을 알아차렸고.
‘그러고 보니 비록 해형의 사부와 인연이 있었다 해도 상계의 인물인데. 동창이니 팽가장을 너무 잘 알잖아.’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황륙이 마른 입맛을 몇 번 다시다가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거 참. 꽤 조심했는데, 소주의 눈을 속이질 못했군요. 그렇지만 그저 좀스런 장사치들 사이의 일이라 굳이 아실 필요는…….”
“저를 소주라고 부르신다면 다 말해주십시오.”
움찔.
해원기의 차분함을 넘어 무거워진 저음.
과거에 주인을 만났을 때를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황륙이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마음속에 여전히 걱정이 남아 있지만, 숨길 수가 없다.
짧은 한숨으로 괜한 웃음을 지웠다.
“후, 예로부터 환관이 득세하면 조정이 문란해지고, 마침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더군요. 그걸 직접 겪게 된 게 요즘의 흥륭입니다. 물론 환관 중에도 충성심이 깊고 바른 인물이 없지는 않으나,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남들보다 쉬 부패하는 게 상례. 금의위든 동창이든 일단 권력에 취하자 결국 사리사욕이 끼어들었던 겁니다.”
오소민이 나오려는 코웃음을 억지로 참고 끼어들었다.
“배공주사(背公走私). 저속한 욕망이란 거지.”
본래는 공을 등지고 사를 좇는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공을 등에 업고 사욕을 취한다는 의미.
황륙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는 표현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그저 비밀사찰 조직, 다음으론 강호에 대항하는 무력집단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무림을 조사하고 이해하면서 지배할 욕망이 커지고 이에 따라 그 조직도 더욱 비대해질 필요가 있었겠죠. 그러려면 기존에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권력과 금력이 요구됩니다. 황실과 조정으로는 메꿀 수 없는.”
영민하게 대화를 이해하던 오소민도 여기서는 말이 막혔고,
도리어 해원기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돈을, 재산을 빼앗겼습니까?”
단순한 질문.
그러나 황륙은 단순하게 답할 수가 없었다.
“산서의 산서대전장(山西大錢莊), 휘주(徽州)의 명차상단(茗茶商團), 낙양의 용문세가(龍門世家), 양호(兩湖)의 장강선단(長江船團), 절강(浙江) 아래의 상행(商行)들. 오랜 세월 이어온 상계의 지주들이 첫 목표가 되는 게 당연하겠죠. 금의위가 상계를 지지하는 이들을 먼저 역도로 제거하고 동창이 뒤이어 생존을 위협하는데 누가 감히 거스르겠습니까. 장안(長安)의 상계와 장강선단의 주인이 수년 전에 이미 바뀐 걸 세상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겁을 주려는 본보기였기에 상계의 지주들에게만 몰래 알려주었거든요. 협박과 회유, 강압과 토색… 그러나 가장 무서운 건 바로 무력. 돈이, 재산이 목숨보다 중요할 리 없죠.”
어떻게든 평담한 어조로 객관적인 사실만 밝히려 애를 썼지만.
해원기는 아까와 달리 바로 말을 받았다.
“흥륭은 어떻습니까?”
“아, 그나마 잘 버티고 있는 편입니다. 용문세가와 저희 흥륭은 그간 닦은 기반이 탄탄하니까요.”
환한 얼굴로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 표정이 해원기를 안심시키려 일부러 지은 것임을 오소민조차 알 수 있었다.
하북팽가. 광산의 이권을 마음대로 하고 무림의 명문으로 떠오른 이 집안의 배경은 참으로 심상치 않았다.
절령제삼(節令第三) 경칩(驚蟄)
바야흐로 봄기운이 따뜻해져 춘뢰시명(春雷始鳴)의 때이니, 경칩은 봄의 우레가 처음으로 울려서 땅속에 잠자던 무수한 생명이 깜짝 놀라 깨어난다는 말이다.
달은 묘월(卯月)에 접어들어 그 괘(卦)가 바로 뇌천대장(雷天大壯)이라.
대(大)는 양(陽)이요, 장(壯)은 왕(旺)을 뜻하여 양기가 왕성해지고, 묘(卯)는 만물이 지하에서부터 굳은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형상으로 생기가 크게 일어나서.
한해의 농사가 이로부터 시작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