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용호풍운(龍虎風雲) (3)
해원기가 앉는 대신에 똑바로 일어섰다.
“당신은 누구요?”
단호한 목소리. 좁은 방 안이 돌연 산악에 깔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오소민이 설명해준 ‘정하상점’이 하북 팽가장만 가리키지는 않을 게다.
경계심과 동시에 상대를 압박하는 기세가 일어나는데.
황륙이 모았던 손을 풀지 않고 가슴팍에 대었다. 방 안을 뒤덮는 기세에 짓눌리면서도 얼굴에는 오히려 흐뭇한 표정.
“과연! 직접 뵙지를 못하고 그저 선생에게 들은 얘기뿐이라, 긴 세월을 상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거늘. 과거에 주인께 느꼈던 기세와 비슷하기까지 하시다니! 아, 제가 인사가 서툴러 소주의 오해를 불렀군요. 용서하십시오. 혹시 용조(龍爪)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방어하는 낌새가 전혀 없다.
방어는커녕 해원기가 보이는 기세에 감동까지 하는 판이라.
미심쩍어하던 해원기가 마지막에 나온 이름에 눈을 껌뻑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요, 그의 말 속에 등장한 선생이 누군지도, 왜 자신을 소주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용의 발톱을 이름이라고 한다면.
“칠(七)…….”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참았고,
“네. 제가 여섯째, 그래서 이름도 황륙이랍니다. 아버님이 그냥 차례대로 이름을 지으시는 바람에. 하하하.”
해원기가 일으켰던 무거운 기세가 감쪽같이 사라졌고, 황륙의 즐거운 웃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태어난 순서대로 숫자로 이름이 지어진 창피함을 가리려는 게 아니라,
해원기가 누군지 알아주어서 진심으로 기뻤기에.
해원기 역시 자신이 괜스레 경계했음을 깨닫고는 도로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황륙이 누군지 알게 되면서,
아련한 기억과 함께 다리에 힘이 빠졌으니까.
황룡칠절(黃龍七絶)이라 불렸단다.
흥륭황가를 중원제일부호로 만든 어른이 사부와 기묘한 내기를 했었고, 그 인연으로 자식들에게 무공을 익히도록 했으며, 일곱 명의 아들들은 마침내 사부를 주인으로 모시는 종을 자처했었다고.
일문일파(一門一派)에 치우치지 않은 견실한 바탕에, 동류를 찾기 어려운 기이한 기예를 습득한 일곱 형제. 과거의 난세에 사부를 지성으로 모신 인물들이다.
그래도 본래 무림인이라 하기 어려운 출신. 사부가 강호를 떠나며 그들과의 관계도 끊겨야 옳거늘.
잊지 않고 있었다.
세상이 전부 사부를 잊는데도.
해원기가 기이한 감상에 젖어서 더벅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도(都) 대협이 바로 칠절의 스승이었잖아. 그걸 이제야 기억하다니, 나도 참.’
소금을 백온옥처럼 만드는 기술. 그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 예전에 왜 흥륭을 언급했는지.
황륙이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은 한때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도박사면서 괴협(怪俠)으로 인정받았던 쾌주랑(快注郞) 도신주(都信主).
흥륭황가에 훈도로 고용되어 황룡칠절을 키워낸 인물인데.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누군지 몰랐었다.
자신의 무지가 한심스럽지만.
그전에 해원기가 서둘러 오소민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단번에 오소민의 정체를 밝힌 황륙, 해원기와 해괴한 대화만 나누고 있으니 오소민의 당혹이 의심으로 바뀔 만하잖나.
긴 사연을 다 밝힐 시간은 없어도 쓸데없는 오해는 막아야 한다.
“오형, 이쪽은 내 사부님과 인연이 있는 분. 믿어도 됩니다.”
다시 존댓말이 나왔지만, 그걸 트집 잡는 것도 잊고서.
오소민이 계속 황륙을 노려보았다.
“지역 전장의 관사라고 믿기 어렵군.”
아무리 흥륭이 염상단을 거느린 부호 중의 부호라지만,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알아맞힌단 말인가.
상계제일 부호와 무림제일 개방이라도 결국은 부자와 거지. 부자가 거지에게 그리 관심이 많았나.
아니, 부자와 거지를 떠나서 개방 내에서도 신비로 일컬어지는 순행장로를 만난 적도 없이.
여전히 손을 모으고 선 황륙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소주를 만난 기쁨에 경황이 없어서 말을 삼갈 줄 몰랐습니다. 이해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덕주의 전장을 맡은 관사라는 건 사실이고요. 으흠.”
목을 가다듬는 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흥륭은 본래 염상에서 시작했으니 당연히 운송 쪽과 밀접하고, 그건 이 덕주도 마찬가지. 각지의 차행(車行)은 전부 흥륭과 거래한 친분이 있지요. 개방이 하오문을 보호하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흥륭에는 이미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어느 장로가 주관하는 것까지요. 그러니까.”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을 줄이고 미소를 짓는다.
덕주의 전장을 책임진 황가의 여섯째, 능란한 상인답게 설명이 간결하고 명쾌해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칫. 이 입 싼 인간들이.”
오소민이 입을 삐죽이며 시선을 돌렸다. 하오문을 동원해 사라진 마차를 찾은 건 자신, 유룡생이란 가명을 쓴 것도 자신이니.
어디서 소식이 새어나갔는지 알았지만, 그걸 단숨에 헤아리는 통찰력도 간단하진 않다.
처음부터 당한 셈이라 오소민이 괜히 심통이 나서.
“그런데 이름을 차례대로 지었다니 형제가 많은가 보오?”
슬쩍 시비를 걸자 황륙이 웃는 낯으로 받는다.
“맞습니다. 맏형은 황일(黃鎰), 그다음부터 량(梁), 삼(蔘), 사(柶), 오(梧). 이렇게 여덟이나 됩니다. 제 아래가 바로 가주인 칠(漆)이고, 아, 막내는 좀 다릅니다.”
다른 글자를 썼다고 해도 발음은 일이삼사(一二三四) 그대로.
막내의 이름이 다르든 말든, 부잣집 자손치곤 참 성의 없이 지은 이름이고.
“에, 가주가?”
팔 형제 중의 일곱째가 가주라니, 이것도 희한하다.
남의 집안 사정, 그것도 중원제일 부호 집안이니 특이할 수 있겠지만, 첫째도 막내도 아닌 일곱째라.
“네. 어려서부터 가업을 배운 건 가주뿐이니까요. 나머지는 모두 게을러서, 음, 저도 관사 직을 맡은 건 겨우 오 년밖에 되지 않아서. 부끄럽습니다.”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반문에도 겸허한 대답.
오소민이 말이 막혔다.
아무리 영민해도 젊은이는 갖기 어려운 오십 대 초반의 노련함이다.
“선생에게 소주의 얘기를 들은 지 십오 년, 그간 한 번도 찾지 않던 분이 지금 돈 때문에 오시지는 않았으리라고 예상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북팽가라면. 흠.”
상인답게 자리에 앉은 후에도 탁자 위에 두 손을 모은 황륙이,
해원기의 얘기를 들은 후에 잠시 침음했다.
간단히 하북팽가에 대해 설명하는 걸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서, 할 말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오소민에게 시선을 보냈다.
“오 장로님 덕을 많이 보신 겁니다. 오는 길에 확인을 하셨듯이 요성만이 아니라 이 덕주도 표행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사라진 마차를 찾다가 안덕차행, 그리고 동창, 마지막에 팽조린이라. 컴컴한 흑막이 너울대는 느낌이로군요.”
오소민이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흥륭전장을 찾을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을까.
그냥 무턱대고 현장을 찾았다면 아무 소득도 없었을 터.
오소민이 히죽 웃었다.
“하, 뭘 좀 아는 분이구먼. 그렇지, 그 표현이 딱 맞소. 흑막이 있는 사건이지.”
‘오 장로님’을 칭찬하는 말이니 개방의 순행장로답게 의젓하게 맞장구를 치지만, 영 어울리지 않는다.
황륙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해원기에게 돌렸다.
“소주께 상세한 내막을 알려드리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건 두 가지. 하나는 동창이고, 또 하나는 하북팽가입니다.”
중원제일의 부호, 염상단이라는 특권을 지녔고 그걸 바탕으로 이룬 전장의 재력은 황친국척이라도 급전을 빌릴 정도라니.
황실과 조정의 사정도 훤히 알 만하다.
“나라가 옳은 길로 가려면 군신의 도리가 바르게 서야 가능합니다. 허나 연왕이 조카 건문제를 내쫓고 즉위한 후로 이 도리가 무너졌습니다. 찬역(簒逆)에 동조한 신하들은 거의 없었고, 연왕을 영락제로 만든 이들은 환관인 정화(鄭和)와 승려인 도연(道衍) 등이었으니까요. 영락제는 그래서 태조의 유훈을 어기고 환관을 수족으로 부리는 친정(親政)을 도모한 겁니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심해져서 당세에는 소위 십이태감(十二太監), 이십사아문(二十四衙門)이란 말이 내각육부(內閣六部)나 한림학사(翰林學士)보다 더 유명해졌답니다.”
해원기가 정색하고 귀를 기울였다.
오는 길에 오소민에게 대강 들었고, 또 그다지 알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으나.
동창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한다.
배울 기회를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열두 군데 부서, 십이감(十二監)의 우두머리를 장인태감(掌印太監)이라 하고, 이 십이감 아래 궁내에 필요한 일용과 기물을 각각 담당하는 사사(四司)와 팔국(八局)이 있습니다. 태감은 정사품(正四品), 작은 환관인 감승(監丞)도 정오품(正五品)이니 이 이십사아문이 조정의 정무를 대신해도 될 정도죠. 실제로 십이태감의 으뜸, 모든 환관의 수장인 사례감(司禮監)의 장인태감은 남경수비(南京守備)의 직책을 겸하니까요.”
지금의 경사로 옮기기 전에는 나라의 도읍이었던 남경. 당연히 황제가 가장 믿는 자에게 지키도록 했을 터.
조정의 현실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어서,
오소민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흥, 정사품? 환관 나부랭이가 아니라 정승이구먼, 정승.”
“그러지 않아도 경사에서는 ‘무재상지명, 유재상지실(無宰相之名, 有宰相之實)’이라고 뒷소리가 나온다더군요.”
재상의 이름은 없어도 재상의 실질은 있다. 실제로는 재상과 다를 게 없다는 소리.
어마어마한 권력인데.
황륙이 늘어지는 설명을 빠르게 이어갔다.
“그런데 이 사례감의 장인태감에게만은 또 다른 별칭이 있답니다. 궁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인 별칭이라 흥륭이 그걸 알아낸 것도 몇 년밖에 되지 않았지요.”
그렇게 비밀스러웠다는 뜻. 황륙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동창의 제독태감(提督太監)입니다.”
“허!”
오소민이 탄성을 내고, 해원기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시대마다 관위가 다르긴 해도 제독이라면 군을 통솔하는 직함. 이 별칭만으로도 동창이 어떤 집단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동창을 설명하기 위해 문란해져 가는 조정의 현실을 길게 늘어놓아야 했지만,
정작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
‘좋은 인연을 만나셨군. 이 오 장로는 개방에서 차기방주로 예정한 영재다. 심성도 바르고 개방 고유의 의기도 갖춘 듯하니 소주에게 도움이 될 거야.’
마음 같아서야 당장 해원기를 따라나서고 싶지만, 이제는 무림과 아무 관계도 없는 처지. 그래도 나이 먹은 어른으로서 젊은 주인의 친구가 된 인물을 은근히 살피고 있었다.
세상을 떠난 부친, 현재의 흥륭황가를 이룩한 선대 가주가 자식을 일곱이나 무도에 몰아넣고서야 깨달은 한 가지.
장사는 인사(人事)다.
장사 중의 으뜸은 바로 사람을 사귀는 것이니, 무수한 고난과 위험을 버티려면 사람에게 기대어야 한다.
그래서 황룡칠절이 거의 다 무림을 떠났으면서도, 강호를 살피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다.
소금.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지만 그냥 돈이 되는 게 아니다. 염장(鹽場)에서 소금을 만드는 일꾼, 그걸 정제하고 포장하는 사람, 마차를 부리는 마부와 배를 다루는 선부, 심지어 등짐을 지는 이들과 도중에 비를 피하기 위해 머물 숙소까지.
지금의 흥륭을 이루는 동안 고락을 함께한 이들은 태반이 천대받는 하오문 출신.
개방 이전에 하오문의 일각을 지킨 게 바로 흥륭이요, 이를 통해 얻는 정보야말로 흥륭의 중요한 기반이다. 그래서 개방의 내부에 도는 소문도 알 수 있었고, 젊은 주인이 괜찮은 벗을 얻은 게 마음 든든했다.
“무림은 어느 왕조에서나 눈엣가시였습니다. 정하불상침이라고 떠드는 것 자체가 황실의 비위를 긁는 소리죠. 몽고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한 자존심, 반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제위를 취한 자신감. 대명(大明)의 영락황제께서는 마침내 모든 걸 휘하에 두실 생각이시고, 그 충실한 심복이 바로 동창인 겁니다. 물론 심복에게 금의위라는 수족을 달아주셨지만. 흠.”
황제라서 높임말을 붙인 게 아니라 비꼬는 뜻이 역력한데.
황륙은 잠시 숨을 돌리며 해원기의 표정을 살폈다.
젊은 주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이 아는 걸 전부 털어놓는 데 무슨 주저가 있으랴마는.
혹시라도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담을까 봐 조심스럽다. 자칫 지나치게 격해졌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해원기는 주인의 후계자. 과거에 모셨던 그 주인은 얼마나 무서운 분이셨던가.
더욱 신중하게 입을 연다.
“심복은 내시(內侍), 수족은 근위(近衛). 조정을 휘두르고 강산(江山)을 흔들 수는 있어도 강호(江湖)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환관들에게 수족 외에 주구(走狗)가 필요하다는 교활한 지혜를 전한 자가 있었습니다.”
“음.”
“어? 누가?”
해원기의 낮은 울림과 오소민의 높아진 목소리가 바로 붙어 나왔다.
얘기는 점입가경. 깊숙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