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용호풍운(龍虎風雲) (2)
개방의 장로답다.
오소민은 습득한 정보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도출하는 데에 능숙해서, 해원기와 같이 엿들은 내용 속에서 많은 결론을 추정해냈다.
금의위와 동창, 동창의 구성과 명칭 등.
그러나 갑자기 떠올린 이름은 추정이 아니라 예전에 미리 들었던 소문이었고,
해원기도 고향 근처라 잘 아는 편이었다.
도산초벽 팽가장.
팽이라는 성을 쓰는 집안이 언제 당산 북쪽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대단한 부와 권력을 지녔음은 공공연한 사실. 당산을 중심으로 하는 광맥(鑛脈)의 대부분을 관리하고 나랏일을 수시로 대행해서,
어떤 면에서는 염상(鹽商)에까지 비견되는 집안인데.
이 팽가의 인물들은 모두 가문 고유의 도법(刀法)에 능통하고, 그 도법이 가위 무림일절(武林一絶)로 칭해질 만하단다.
강호의 호사가 중에는 당대의 가주인 구주신도(九州神刀) 팽조린(彭兆麟)을 십대고수(十大高手)의 하나로 꼽는 이도 있을 정도.
“칼을 쓰는 자에겐 마치 깎아지른 절벽을 마주한 것처럼 여겨진다. 흥, 하여간 강호의 허풍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팽가장을 일컫는 수식어에 콧방귀를 뀐 오소민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팽 대야, 천호대인의 외모는 소문에 들었던 구주신도 팽조린과 같다.
동창의 행사에 정말 팽조린이 천호로서 등장한 것이라면.
해원기가 눈썹을 잠깐 문지르다 금의위들이 돌아간 성안 쪽을 보았다.
“오형이 알려준 얘기, 정하상점이 사실인 듯하군. 그렇지만 여전히 겁표와의 관계를 모르겠어. 아무래도 긴 여정이 될 것 같은데.”
팽조린이 동창의 주구가 되어 천호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해도.
그 사실이 대체 이번 사건과 어떻게 연관되는 걸까.
개인의 영달을 탓할 필요는 없다. 무인이 강호를 걷든 관직을 택하든 남이 뭐라 할 일이 아니다.
염상에 비견되는 하북 팽가장의 주인이라면 더욱 그렇지만.
이번의 겁표 사건은 갈수록 더 이상하다.
겁탈당한 마차를 쫓아왔더니 복면한 자들이 기다렸던 것처럼 나왔고,
그들은 금의위면서 또한 동창의 소속으로 보였으며,
마지막에는 엉뚱하게 무림에 이름을 날리는 가문의 주인이 등장했다.
낙향하는 환관의 표행, 아무도 모르게 당한 마차 한 대, 도적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 아홉.
도적을 쫓는다면 공개적으로 관병을 동원하지 않고 왜 동창이?
간단히 풀릴 문제가 아님을 예감하면서,
해원기가 성안 쪽을 가리켰다.
“오형, 잠시 들를 곳이 있네.”
오소민이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해원기가 가리키는 방향에 짧게 혀를 찼다.
“쯧, 도로 들어가자고? 외양을 조금 바꾸긴 했어도,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데. 하오문도 더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들은 대로라면 마부들에 대한 징발령은 취소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에 대한 탐문이 시작되었을 터. 금의위와 관원들이 정식으로 추포(追捕)하려 든다면 영 귀찮은 일로 발전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선 하오문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피해를 입을 수도.
그 정도는 뻔히 짐작할 해원기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오문이 아니라. 반대로 부잣집에 가려고. 노잣돈이 턱없이 부족하거든.”
또 해괴한 소리.
그러나 그 표정이 워낙 기묘해서 오소민이 입을 다물었다.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해원기의 표정.
되돌아온 덕주성, 그것도 중심가다.
관아가 바로 저 앞에 보이고 넓은 길을 따라 양쪽으로 큰 건물들이 늘어선 곳.
막 어둠이 걷히는 새벽녘이라도 이런 번화가로 올 줄이야.
‘부잣집’에 간다더니.
해원기랑 함께 지내면서 어이없는 경우를 몇 차례 겪었기에 망정이지.
오소민이 의구심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자꾸 흘끔거리는 걸,
해원기가 알면서도 묵묵히 한 건물로 향했다.
구운 벽돌과 나무를 써서 단단하게 지은 이 층 누각. 다른 건물과 달리 몇 개 없는 작은 창문은 꼭꼭 잠겼고, 입구도 두꺼운 나무에 철판까지 입힌 문이다.
중심가는 대부분 부귀한 자들을 상대하는 고급 가게로 이어졌기에, 이런 철통같은 구조는 드물다.
오소민이 굳게 닫힌 철판문 위의 편액을 확인하고 코를 찡긋거렸다.
“흥륭전장(興隆錢莊). 부잣집이라더니 아예 돈 창고로 온 거야?”
중원 제일의 부호.
하북, 산동, 강소에 걸친 모든 상권을 쥐고 염상단을 거느리는 황가(黃家).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 상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흥륭황가는 여전히 세인들이 첫손꼽는 부상(富商)이었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진출한 전장업(錢莊業)에서도 든든한 기반을 쌓아서 황친국척까지 급한 융자를 받는다나.
이른바 ‘돈 창고’라는 속칭이 붙을 정도로 중원 각지의 주요한 지역에는 흥륭의 전장이 없는 곳이 없다.
하지만 부유한 자들일수록 강호와는 거리를 두기 마련. 대문파의 주인이라도 거래를 트기 어렵고, 어쭙잖은 낭인 따위는 전장 문을 넘지도 못한다던데.
해원기는 대체 뭘 믿고 이런 곳을 부잣집이라며 찾아온 걸까.
노잣돈을 빌리려고?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이 들려는데.
해원기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문을 두드렸다.
둥둥둥.
문짝에 덧붙인 철판이 의외로 무겁게 울린다.
새벽 댓바람에 온 손님이 반가울 리 없고, 더구나 그 손님이 어느 집 하인배와 다름없는 차림이면 문전박대가 당연한 순서.
헌데 해원기가 허리의 요대자에서 뭔가를 꺼내 보이자 안색까지 변한 점원은 갑자기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허리가 부러지라 꺾는 극진한 인사부터, 들고 나온 등롱은 내던지고 값비싼 초로 불을 밝히더니, 접수대의 한 부분을 손바닥에서 불이 나도록 두들기고는, 대뜸 깊숙한 안쪽으로 안내한다.
접수대 뒤가 이렇게 복잡한 복도였나.
오소민이 연신 좌우를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좌우뿐 아니라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간다는 걸 여간해선 알아채기 어려우니.
‘내부에 숨겨진 기관(機關)과 함정이 설치된 곳이군.’
과연 흥륭전장. 못된 마음으로 허튼짓을 하려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하겠다.
자연스레 경각심을 일으키는 오소민과 대조적으로 해원기는 억지로 끌려온 듯한 걸음.
점원이 방문을 열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이미 연락을 올렸으니 신물(信物)을 확인하는 대로 관사(管事)께서 직접 맞으실 겁니다.”
제대로 얼굴로 들지 못하는 점원. 해원기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폐를 끼쳐 미안하오.”
새벽부터 난리를 치게 만든 사죄지만, 미안해할수록 점원의 허리는 더 납작해질 뿐.
“무슨 말씀을. 물러가옵니다.”
방 안의 탁자에 초를 놓고 꾸벅, 두 사람이 앉는 걸 확인하고 꾸벅, 문을 닫고 나가기 전에 꾸벅.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문이 닫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방문이 닫히자마자 오소민이 혀를 날름 내밀었다.
“뭐야. 황제가 와도 이보단 덜하겠네. 중원 제일의 부호라더니 손님 접대는 제대로 교육받았어. 해형은 본래 거래가 있었구먼.”
신물과 점원의 태도. 해원기가 흥륭전장과 이전에 거래를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영 불편한 기색의 해원기가 더벅머리를 긁었다.
“에, 나도 처음 온 걸세. 거래라고 하기도 그렇고, 내가 한 것도 아니어서. 험,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자리를 고쳐 앉는 모습에,
오소민이 다시 흥미를 느꼈다.
고지식하면서 당당한 성격이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곤란해할 때도 있구나. 그러면서 왜 오자고 했을꼬.
흥륭전장과의 관계가 궁금하고, 또 전령전을 꺼냈던 저 허리띠 속도 까뒤집고 싶다.
‘갈수록 더 흥미진진. 도대체 몇 겹을 더 까야 해형의 진짜 알맹이가 나올까.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게 더 약이 올라서.’
친구끼리 그냥 물어볼 수도 있다. 해원기도 이미 뭐든지 대답하겠다고 했고.
그래도 오기가 나서 어떻게든 자신이 알아낼 작정.
오소민의 호기심은 거의 호승심으로 변했지만.
해원기는 지금 한참 난감한 심정이라 오소민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흥륭황가의 신물.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점원에게 전해줄 때 굳이 오소민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만큼.
왜냐하면 요대자 안에 있던 소금을 내공으로 동그랗게 뭉쳐 구슬처럼 만든 것이니까. 대추알보다 작은 크기. 내공으로 뭉쳤기에 하얗게 윤이 나는 것 외에는 그냥 소금과 다를 게 없다.
이걸 가르쳐준 사람은 크게 만들면 귀한 백온옥(白溫玉)과 똑같아 보여서 그걸로 도박 밑천을 했었다고 농담을 했고,
언제든지 돈이 필요하면 흥륭을 찾으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어렸을 때여서 사부와 숙부에게 들은 과거의 얘기가 정말 재미있었고, 소금을 백온옥처럼 만드는 방법도 신기했다.
그래서 기억하고 있을 뿐.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돈과 상관없는 삶. 필요한 돈은 벌면 되고,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삶을 살기에.
사부가 남겨준 재물도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데 왜 남에게 손을 벌리나.
돈이 필요해서 흥륭전장을 찾은 게 아니다.
금의위를 지휘한 천호대인이 구주신도 팽조린이라면, 염상에 비견되는 하북 팽가장의 장주라면.
염상을 배경으로 둔 흥륭전장이 정확한 정보를 알지 않을까.
문득 든 생각에 가까운 이곳을 찾았고, 신물을 이용해 믿을 만한 얘기나 들어보려는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이렇게 극진한 접대라니. 불길한 예감.
그리고 관사라는 이 전장의 책임자가 들어오면서 그 예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오소민은 입을 딱 벌리고, 해원기는 앉았던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어찌해야 할지.
정말 당황했다.
“삼가 소주(少主)의 존안을 뵈옵니다.”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확인도 하지 않고서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사람.
반백의 머리칼을 고정한 작은 옥관(玉冠)과 바닥을 덮는 넉넉한 금삼(錦衫). 결코 작지 않은 체구를 바짝 접어 지극한 예를 표한다.
오소민의 말처럼 황제가 와도 이보단 덜할 게다.
절을 했다고 피가 몰렸을까. 관사라는 초로의 인물은 상기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에게 이런 복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형제들에게 자랑하면 다들 부러워하겠죠. 하하.”
입을 딱 벌린 오소민은 있는지도 모르는 듯,
아직 제대로 자리에 앉지 못한 해원기의 얼굴만 쳐다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 네.”
초로의 인물이 해원기의 어정쩡한 대답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런. 제가 실태를 보였군요. 저는 이 덕주 전장을 책임진 황륙(黃陸)이라고 합니다. 이쪽 분은?”
이제야 오소민을 의식했다. 그런데,
“여기는 내 친구인 오…….”
“유룡생이라고 합니다.”
오소민이 해원기의 말을 끊고 가명을 대자, 그 병색이 짙은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던 황륙이 손을 모으며 묘한 미소를 띠었다.
“아하, 개방의 순행장로가 오셨다더니. 신비의 유룡개가 우리 소주의 친구분이셨군요.”
“에?”
오소민의 입이 또 벌어지며 해괴한 소리가 나올 수밖에.
‘신비’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단번에 신분을 밝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