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9화 (30/410)

제8장 용호풍운(龍虎風雲) (1)

관병 둘이 떠나고도 한참이나 화톳불만 보던 우람한 체구의 인물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부장이 서툴렀어. 이 덕주가 어떤 곳인지 먼저 인지했어야지. 금의위가 설치면 지부대인이 셋이나 알게 되잖아. 귀찮아지거든. 급하게 미자조를 불러서라고 해도, 흠, 이건 나중에 역장과 나눌 얘기로구먼.”

같이 온 기민해 보이는 중년인, 부장의 얼굴이 핼쑥해지고.

먼저 와있던 금의위 셋은 아예 머리도 들지 못한다.

화르륵.

장작을 더 넣지 않았건만, 잦아들어야 할 불기운이 되레 더 세져서.

부장이 급히 허리를 굽혔다.

“팽(彭) 대야, 아니, 천호대인(千戶大人). 전부가 제 불찰입니다. 부디 용서를.”

방금 전까지 여유 만만하던 금의위 셋도 마찬가지.

“부디 용서를!”

전부 허리를 꺾으며 사죄하자,

천호대인이라 불린 우람한 인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흐뭇한 미소, 남들에게 받들어지는 맛을 즐기는 미소다.

천호면 정오품(正五品)의 고위 관직이니, 이렇게 금의위 넷만을 거느리는 건 어울리지 않고.

부장이 처음에는 그냥 어르신이라는 일반적인 칭호로 부르다 바꾸었다.

어떤 천호기에.

팽 천호가 느긋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허,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기껏해야 임시로 이름만 받은 행천호(行千戶)에 불과한데. 자, 다들 몸을 펴시오.”

의젓하게 겸손을 보이고,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위맹한 기도가 다시 피어오르며,

“부장의 설명만으로는 의혹이 들지만. 용호방과 풍운책(風雲冊)을 전부 살필 필요는 있겠소. 아마 미자조의 역장도 그런 이유로 영반(領班)에게 보고하러 갔을 터. 사안이 조금 복잡해질 우려에 급히 나를 내려 보낸 것이니, 당분간은 내 지시에 따르시오.”

문책을 면한 게 어딘가.

“넵!”

부장을 포함한 금의위 넷이 군소리 없이 대답하자, 팽 천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주에 내린 징발령은 전부 취소. 금의위가 이곳에 온 적은 없는 걸로. 자자조(子字組)부터 오자조(午字組)까지는 기존의 임무를 지속하고, 미자조는 나와 덕주에서 대기한다.”

말투가 명령조로 바뀌고.

“봉명(奉命)!”

다들 엄숙하게 명을 받들었지만, 그래도 부장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 그럼 어젯밤에 나타난 의심스런 자들은…….”

팽 천호가 얼굴도 돌리지 않고 걸음을 떼었다.

“용호방과 풍운책의 조사 결과를 봐야겠지만. 그전에 따로 알아봐야겠지. 그건 본관에게 따로 복안이 있네.”

겸손한 말투는 버리고 ‘본관’이라는 당당한 자칭. 부장이 감히 더 물어볼 수 없다.

팽 천호가 떠나자 금세 사그라지는 화톳불을 놔두고, 금의위들도 빠르게 북문을 떠났다.

성문을 열어둔 채.

화톳불이 작은 불꽃으로 꺼져가고.

오소민이 후다닥 일어났다.

“어, 흠. 다들, 에, 갔구먼.”

꽤 어색하게 말을 뱉는 얼굴이 이상하지만 어둠과 역용약 덕분에 티가 나진 않는다.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해원기도 천천히 일어나 천색을 살폈다.

“성문이 열리는 시각은 묘시(卯時), 그냥 열어놔도 괜찮다는 건가?”

해원기의 신중한 음성에 진정이 된 듯.

오소민이 당혹스런 기색을 지우고 화톳불과 성안 쪽을 쳐다보며 뭔가를 생각하다가,

“금의위와는 달리 성문을 지켜봐야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걸 아는 자야. 흠, 어디선가 들어본 생김새… 아 참, 해형은 팽 천호라는 자의 출현을 어찌 알았어?”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성벽 위에서 아래쪽을 주시하면서도 주변 경계는 잊지 않는 법.

그게 고수의 기본이니까.

더구나 금의위가 셋뿐이라 더욱 주의를 기울였는데.

팽 천호라는 자는 기척을 알아채기도 전에 나타났었다. 해원기가 황급히 자신을 끌어당겨 성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발견되었을 것. 아슬아슬했다.

해원기의 무공이 대단한 건 알아도 그 역시 상당히 당황했던 듯, 거의 오소민을 얼싸안은 상태로 지금까지 숨을 죽였으니.

해원기가 머리와 옷에 붙은 검불을 털었다.

“둔형류(遁形類)의 신법을 극성으로 익힌 자, 저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못했습니다?”

또 존댓말 트집.

“아, 기척이 아니라 미리 알려준 친구가 있어서.”

얼른 말투를 바꿨지만, 이 또한 기상천외한 말이어서.

오소민이 병색이 짙은 얼굴을 씰룩거렸다.

둔형류란 형적(形跡)을 숨기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상승의 신법. 비록 극성에 다다르면 지척에 이르러도 알아채기 어렵다지만, 워낙 난해해서 높은 경지에 이른 고수라도 익힌 자가 드문 비결이다.

고지식한 주제에 무공에 관해서만은 거의 모르는 게 없는 듯한 해원기라.

이해할 만한 설명이지만. 친구?

제대로 사람을 사귀어본 적도 없는 작자에게? 어디에 있는데?

“누구……?”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자연스레 반문이 나오자.

해원기가 방금 올려다보았던 하늘을 손가락질했다. 멋쩍게.

“때맞춰 돌아와선 잘난 척하느라. 아직 어두워서 안 보일 텐데.”

오소민이 어리둥절한 채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젖혔다.

잘난 척한다고? 캄캄한 하늘에서?

누구, 아니, 뭘 찾아야 하는지 몰라서,

눈에 잔뜩 힘을 주다가 표정이 이상해졌다.

점. 점 하나.

그나마 해원기의 말을 믿고 공력을 높였기에 겨우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 점이 조금씩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냥 빛을 잃은 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득한 높이에 떠 있는,

“저건, 새?”

사람일 수가 없고, 별도 아니라면.

오소민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찡그린 미간을 해원기에게 돌렸다.

때맞춰 돌아와 잘난 척하며, 둔형류의 신법을 익힌 자를 미리 알려준 게,

새 한 마리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성질을 내려다가.

해원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새라고 부르면 싫어해요. 아, 먼저 인사부터. 동강(東江)!”

다시 존댓말 쓰는 걸 따질 틈도 없었다.

휘이이잉.

“으읏.”

엄청난 돌풍과 압력, 흙먼지가 일고 돌이 날려서 절로 옴츠리게 되는데.

간신히 눈을 떠 정면을 보던 오소민이 입을 딱 벌렸다.

해원기의 더벅머리 위. 그 더벅머리를 발톱으로 움켜쥔 거대한 형상.

어느새 아득한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그건 오소민이 생전 처음 보는 대응(大鷹)이었다.

짙푸른 바다색의 깃털을 갑옷처럼 전신에 둘렀고, 불똥을 튀기는 두 개의 눈 위에 눈썹처럼 하얀 선이 그어졌다.

배는 구름을 머금은 듯 희지만, 두 개의 발은 금강(金剛)으로 만든 창 같다.

가슴을 내밀고 목을 세운 몸길이가 이 척이 넘으니 날개를 펴면 어마어마한 크기일 터.

해원기의 머리를 횃대 삼아 꼿꼿하게 서서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오연한 기질이 가득한,

영금(靈禽).

오소민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응(神鷹)…….”

누구라도 이 영금을 보면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으리.

세상에 이런 날짐승이 있다니.

그리고 그 소리를 알아들은 것처럼 대응이 강철 같은 부리를 가볍게 움직여. 얼핏 웃음이란 착각이 든다.

해원기가 눈을 치뜨며 툴툴거렸다.

“인마, 내 머리에 앉지 말라고 했잖아. 갈수록 버릇이 없어져. 내 친구, 오형이다. 똑바로 인사 안 해?”

혼잣말이 아니면서 반말투. 오소민이 살짝 놀랐다.

자신이 트집 잡던 해원기의 고지식한 말투가 아닌 데다가, 대응을 사람처럼 대한다.

삐잇.

더구나 이 대응이 묘한 울음과 함께 머리를 홱 돌린 건 분명히 비웃는 모습.

“에, 오형, 이 녀석은 동강이라는 이름이, 야. 원래는 보라응(甫羅鷹)이라는 맹금이었는데. 기연을 만나서 좀 달라졌지, 건방진 성격으로. 아얏, 이 녀석잇!”

동강을 소개하느라 반말이 더 능숙해졌나. 그러다가 해원기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촤아아.

일 장이 넘는 날개를 펼치면서 해원기의 머리를 슬쩍 때리는 건,

남 앞에서 자기 험담하지 말라는 뜻.

“풋!”

오소민이 불쑥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기막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어떻게 생긴 영금인지, 무슨 능력이 있는 신응인지.

그걸 따지기 전에.

해원기에게도 친구가 하나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아닐지라도.

동강이라는 신응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점으로 화한 후에도 한참 올려다보던 오소민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신기하네. 그럼 지금까지 계속 따라오고 있었던 거야?”

눈이 반짝거리는 오소민과 달리 해원기는 시큰둥한 표정.

“아니. 저 녀석 제멋대로라. 아주 먼 곳에 갔다 온다고 한참 보이질 않더니만. 공교롭게도 딱 그 순간에 돌아와서는.”

동강의 발톱에 헝클어진 머리칼에 더 신경이 쓰이는 듯. 그러나 오소민은 궁금한 게 정말 많은지.

“언제부터 키웠어? 무슨 기연을 만났기에? 말이 통하는, 혹시 영교(靈交)인가? 정말 부럽구먼, 나도 하나 있었으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입이 쉬질 않아서 해원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지금 그게 문제입니, 문제인가. 아까 엿들은 얘기부터 하세.”

여전히 말투가 섞이지만, 화제를 되찾았고.

오소민을 억지로 현실로 끌고 왔다.

“팽 천호라는 자가 비록 임시직이라도 꽤 높은 지위 같았네. 용호방과 풍운책이라는 건 무슨 명단으로 들리지 않던가?”

“잠깐. 생각 좀.”

집중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오소민이 손가락을 꼽으며 중얼거렸다.

“금의위가 나서지 않도록 한다. 공개할 일이 아니란 것이지. 그런데 미자조라고, 또 금의위들의 호칭에 따르면 역장이 바로 당두. 게다가 자자조부터 오자조라고 했으니 십이지(十二支)로 조성했고, 그 위에 영반을 둔, 아무래도 이게 동창의 조직인가 본데.”

멋진 눈썹을 움직이며 말이 더 빨라진다.

“금의위는 행천호를 두지 않는 게 관례. 처음에 팽 대야라 불렀으니 금의위가 아니라 동창에서 준 관직일걸. 우리 둘의 신분 때문에 용호방과 풍운책을 거론했으니 무림인에 대한 명단으로 여길 수 있지. 게다가 관부 인원들과는 달리 다른 방법으로 조사하겠다고, 에?”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속도에 맞춰 떠들다가,

이상한 소리와 함께 눈을 치떴다.

“해형, 하북 출신이랬지. 팽가장(彭家莊)이라고 몰라?”

퍼뜩 머리를 스치는 기억에 높아진 음성. 귀담아듣고 있던 해원기가 반사적으로 답을 내곤,

“도산초벽(刀山峭壁).”

역시 묘한 표정이 되었다.

무림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던 해원기라도. 자주 들어 귀에 들러붙은 이름.

하북 당산(唐山) 북쪽에 십 년 전쯤에 세워진 독특한 가문(家門)이었으니.

그 아래의 연산(燕山)이 바로 해원기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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