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8화 (29/410)

제7장 정하상점(井河相漸) (4)

오소민이 또 한 모금. 해원기가 반대로 닭고기를 손으로 찢었다.

“육 년. 아니, 십 년쯤. 사람들을 만나긴 했어도 항상 혼자였습니다. 어울리질 못했죠. 무림과 얽히기 싫다는 핑계로.”

해원기가 입을 열자, 오소민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무림과 얽히기 싫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욕심이 목숨보다 귀하니까요. 뭐, 변명이죠. 사실은 겁을 낸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왜?”

“무고한 이들이 휘말려 죽었습니다. 그 죄를 묻고 벌을 주려고 마음먹었고. 만약에 금방 원흉을 찾았다면 일을 끝내고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을지도.”

“얼씨구, 그게 마음대로 되나. 혹시 이런 말 들어봤어? 사람이 어찌 강호를 떠날 수 있으랴, 강호가 바로 사람이거늘.”

“네. 인재강호(人在江湖), 신불유기(身不由己). 사람이 강호에 있으니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다. 같은 말이군요.”

“그래. 들어보니 해형은 강호와 무림이 다른 줄 알았구먼.”

“바보니까요.”

“맞아. 바부탱이.”

대놓고 놀려댄 오소민이 키득거리기 시작하자,

해원기 역시 피식거리며 술병을 들었다.

꿀꺽꿀꺽, 우적우적.

해원기가 술병을 기울이고, 오소민은 닭고기를 씹어대고.

취기가 오르고, 배가 부르면.

퀴퀴한 냄새가 밴 오두막에서 쓰러져 자겠지.

그걸로 족하다. 벗이니까.

잠깐 눈을 붙였을까.

부욱, 부욱.

해원기가 눈을 뜨니 옆에서 오소민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백삼 끝단을 접어 올려 단삼처럼 꾸미고, 노란 안감이 밖으로 오도록 겉저고리를 뒤집어 입었다. 그리고는 낡은 돛을 찢어 요대와 장화 위를 가리더니 아예 두건처럼 이마에 질끈 묶어서.

준수한 용모만 아니면 부잣집 하인처럼 보인다.

“일어났구먼. 해형도 변장을 좀 하지. 특히 그 가슴팍의 엄심갑 같은 쇳조각.”

해원기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머리를 긁었다.

이렇게 방심한 채 잠이 들다니.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오소민이 그런 해원기를 보고 히죽 웃었다.

“어제 그랬잖아. 안덕차행에서 내뺀 두더지 다섯 마리, 금의위나 동창일 수 있다고. 그런 놈들이라면 제꺽 용모파기(容貌疤記)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어. 귀찮지.”

변장하는 이유.

“그리고 새벽에 관아에서 마부들을 전부 징발한댔어. ‘모여라.’하고 주둥이만 놀리진 않을 테니까 어떤 놈들이 나오는지 보자고. 아, 지금 인시(寅時) 무렵이야.”

평소의 걸진 말투에 해원기가 벌떡 일어났다.

벗은 벌써 다음 계획을 세웠는데 자신은 속 편히 잠에 빠졌다니.

“이런. 미안합…….”

“안 돼! 앞으로 존대하면 친구 취소야!”

오소민이 부리나케 말을 자르며 눈을 부릅뜨는 바람에.

해원기가 머리를 긁던 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쳤다.

“알, 았, 네.”

다짐하듯 또박또박 대답해서 오소민이 기어이 흘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변장을 해본 적은 없으나 오소민이 하던 것처럼.

해원기가 가죽조끼를 벗어 판과를 싼 후에 돛을 길게 찢어 허리에 묶고, 이마도 질끈 동여맸다.

요령은 특징을 지우는 것. 복면인들의 밤눈이 밝다 해도 짧은 싸움 중에 완전히 기억하기 어려웠을 터.

오소민이 해원기의 재빠른 동작을 감상하듯 보곤 소매에서 조그만 합 하나를 꺼냈다.

인주합처럼 보이고, 뚜껑을 열자 안에도 인주처럼 진득한 고약.

“눈썰미가 있네. 마지막으로 이 잘생긴 얼굴을 가려야지.”

손에 찍어 얼굴에 슥슥 바르자 금방 누렇게 병색을 띠어 얼핏 준수한 용모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게 역용약(易容藥)이란 거군요.”

“요?”

“아, 역용약을 처음 봐서. 신기하군.”

말버릇이 금방 바뀌나.

해원기가 괜히 마른 입맛을 다셨다. 앞으로도 오소민에게 적잖이 핀잔을 당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반면에 꼬투리 잡을 게 생긴 오소민은 기분이 좋아져서.

“비범한 해형은 생김새가 평범해서 굳이 바를 필요가 없어. 대강 이 정도면 되겠지. 가자고.”

활기차게 오두막을 나섰다.

해가 뜰 때까지 한 시진 남짓.

“남문은 어차피 안덕차행이 맡을 거고, 동문은 동영(東營)의 수군에 통하는 길이라 도지휘사사가 직접 관리해. 마부들을 징발한 이유가 어제 일 때문이라면 징발령이 내리자마자 덕주를 떠나려는 자를 찾을 거야. 그러면 문은 둘, 서문과 북문이지.”

“서문을 거쳐 북문으로 가는 게.”

“가는 게?”

“좋, 겠, 군.”

“그렇지.”

습관이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만.

해원기가 서문을 향해 움직이며 다시 입을 열었고.

“오형, 하오문 사람들은 미리 피신했을까? 괜히 휘말리면.”

오소민이 누런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명령할 권한은 없어. 그들을 보호하는 게 약속이니까.”

“어떻게든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겠군요.”

“요?”

“아, 이런. 쯧.”

해원기가 혀를 차곤 발끝에 힘을 주자, 누가 뒤에서 민 것처럼 확 앞으로 밀려 나갔다. 단숨에 십 장이나 벌어지는데 미풍조차 일지 않는 기이한 경공.

오소민이 입을 삐죽거리며 자신도 허리를 틀어 속도를 높였다.

“여차하면 토끼시겠다. 흥.”

놀리는 중에도 외호처럼 용이 헤엄치듯 간격을 좁혀간다.

아직 거리에 인적이 드물긴 해도 그만큼 서두르기 때문이고, 또 두 사람 모두 보통사람들의 눈을 피할 재주를 지녔다.

삼 각 만에 서문에 도착해서 수십의 관병들이 불을 피우는 걸 보고 바로 북향. 지형을 따라 높아진 성벽 덕에 경공을 시전하기 용이해서 일 각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횃불에 비친 그림자의 특이한 행색에 두 사람이 자연스레 기척을 숨겼다.

머리에 쓴 건 포건(包巾) 같지만 뒤가 높아서 사각 기둥을 세운 듯, 상의는 밭고 어깨는 좁은데 소매는 넓다. 상의에 이어진 하의는 주름을 많이 잡고 네 쪽으로 갈라져 가볍게 나부끼며, 발에는 목이 긴 장화를 신었다.

성벽 위에서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해원기가 처음 보는 복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짙은 황색 바탕에 뿔이 하나뿐인 용머리 무늬가 그려진 옷, 허리엔 고급스러운 패도(佩刀)를 단 세 명은 가죽장갑까지 꼈다.

관병 둘이 불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옹송그리는 광경이 세 명의 신분이 상당히 높다는 걸 의미하는데.

오소민 역시 셋을 확인하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본래 은사품(恩賜品)인 비어복(飛魚服)이란 거지만, 같잖게도 금의위는 전부 저 복장이라지.]

금의위. 추정대로라면 어젯밤의 복면인들 중 셋이리라.

해원기가 새삼스럽게 오소민을 쳐다보고,

오소민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왜? 내가 전음입밀(傳音入密)을 하는 게 놀라우신가?]

내공으로 말소리를 감추어 전달하는 공부. 복면인들이 사용한 의어전성보다 몇 배나 뛰어난 기예다.

그러나 해원기가 쳐다본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오소민의 무공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짐작하지만, 출신 내력은 전혀 모르는데.

관에 대해서 대단히 상세하게 안다.

아무리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 해도.

금의위의 복장이 본래 은사품인 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영락제를 연적이라고 불렀었지. 건문제의 충신인 방효유(方孝孺)가 영락제에게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고 비방해서 십족(十族)이 주살된 후로는 함부로 입에 올리기 두려운 말이거늘.’

그러고 보니 옥사를 언급할 때에 은근히 느껴졌던 서글픔.

사연이 있을 듯하다.

여유만만하게 불을 쬐는 셋.

“부장이 순시를 돈다며? 당두(檔頭)는 뭘 하는데.”

“보고하러 갔겠지. 누군지도 모르는 것들에게 된통 당한 셈이잖아.”

중키의 삼십 대 둘이 얘기를 나누자 조금 더 나이 들어 뵈는 사내가 인상을 썼다.

“말을 조심해라. 우리 미자조(未字組)가 지금까지 멀쩡한 건 다 당두 덕이고. 지금은 번역(番役)이 아니라 금의위 교위(校尉) 신분이야.”

딱딱한 말투지만, 나머지 둘은 그다지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다.

“교위면 어떻고 참모면 어때. 어차피 미관말직, 품계 따위 우리에겐 의미가 없잖아.”

“장 교위, 그걸 따지는 것보다는 어젯밤 일이 더 중요해. 일이 꼬였는데 금의위 복장으로 관병까지 동원했어. 부장이 설치는 통에 당두뿐 아니라 우리까지 문책당할 수 있다고.”

나이든 사내가 ‘문책’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흥!”

냉소를 치며 딴청을 피우든 말든.

중키의 삼십 대 둘은 사이가 좋은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문책까지 가겠어? 우리 당두는 연줄이 좋은 편이니까. 음, 부장도 미리 언질을 받고 하는 일일 거야.”

“하긴. 차행을 찾아온 그 두 놈이 지금까지 덕주 성안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안덕차행에 찾아오게 된 실마리를 찾는 게 먼저. 그러면…….”

“그러면 그 두 놈의 내력도 밝힐 수 있어. 도대체 어떤 놈들이고, 또 누가 뒤에서 사주했는지까지 모조리. 으득.”

이를 갈며 눈을 빛내자 나이든 사내가 다시 끼어들었다.

“당두가 예측한 팔호는 아니겠지. 일단 그 두 놈의 실력이 어울리지 않아. 게다가 용모파기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아주 젊은 놈들이 이상한 무공을 썼지. 용호방(龍虎榜)에 실리지도 않은 주제에.”

“특히 당두가 상대했던 거지 같은 놈. 의어전성을 엿듣고 당두의 검을 날렸다고.”

“그놈도 그놈이지만 우리를 농락했던 기생오라비도 만만치 않았어. 독무탄을 손뼉으로 물리치다니.”

어젯밤에 상대한 인물로 화제가 넘어가자,

셋이 머리를 맞대고 불쾌했던 기억을 서로 나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성벽 위에 은신해서 청력을 한껏 돋웠던 오소민이 히죽 웃으며 해원기를 가리켰다.

[거지 같은 놈.]

당두가 상대한 해원기를 금의위들이 거지라고 여긴 게, 개방 소속인 오소민에게는 재미있었나.

허나 해원기도 똑같이 손가락을 들어 오소민을 겨누었다.

[기생오라비라는데.]

고스란히 되돌리는 해원기의 반격(?)에 오소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키득거렸다.

병색이 짙은 하인배로 꾸민 탓에 영 어울리진 않지만.

해원기의 전음이 다시 전해졌다.

[묘한 소리를 하는군. 용호방은 또 무엇일까?]

해원기와 오소민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확실하다. 기껏해야 둘의 용모만을 확인한 정도.

오소민이 추측한 것처럼 마부들을 징집한 건 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한 후속조치인데.

금의위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다른 정보를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오소민 역시 정색한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용호방은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자들을 성적순으로 적어 게시하는 방문.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금의위들이 지금 불쑥 과거급제자들을 거론할 리 없다.

[인원도 얼마 되지 않으니 아예 다 잡아버릴까?]

오소민의 대담한 제안.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당당한 금의위 교위 셋과 관병 둘을 무력으로 제압한다?

영 내키지 않는 해원기가 잠깐 뜸을 들였는데.

문득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 다짜고짜 오소민의 어깨를 잡아채서는 그대로 몸을 뒤집으니.

대단히 급하고 빠른 움직임에 오소민이 영문도 모른 채 해원기와 한 덩어리가 되어 성벽 밖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둘이 사라지고 조금 지나자 성벽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금의위 복장을 한 기민해 보이는 중년인과 우람한 체구의 인물.

단정히 빗어 넘긴 희끗한 머리 위엔 높다란 표건(飄巾)을 올렸고, 풍성한 수염 탓에 더 위맹해 보이는 얼굴. 전신에는 눈처럼 흰 백의와 양털로 만든 마괘자를 걸쳐 아주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우람한 체구의 인물이 걸음을 멈춘 곳을 잠깐 내려다보자.

기민해 보이는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그 안색을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누군가 있었던 기척이, 흠, 아니다.”

우람한 체구의 인물이 그대로 금의위 셋이 불을 쬐는 쪽으로 뛰어내려서, 중년인 역시 뒤를 따라야 했다.

이 두 사람의 출현이 너무나 빨라서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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