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정하상점(井河相漸) (3)
옛날이라는 의미의 ‘고리짝’을 중복해서 더 오래되었다고 강조하는 게 오소민의 말버릇 중 하나.
그걸 세 번이나 거듭했으니 아주 옛날이야기다.
우물물과 강물, 관과 무림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히 아는 이가 없는 ‘정하불상침’의 묵계. 아니, 묵계라기보다 이제는 그저 아득한 전설로 치부하기 일쑤.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이삼십 년 전 일도 잊는 세상인데. 이백 년도 더 된 얘기라고. 해형, 요즘에 묵계라는 소릴 했다간 바로 웃음거리가 될걸? 관이 무림을 범하기 전에, 무림이 도리어 관에 스스로 몸을 파는 거지 같은 세태라. 쳇, 내가 거지 같다고 하면 욕이 안 되잖아.”
워낙 옛날의 전설이라 농담도 맥아리가 없나.
쓸어 올리던 머리칼을 도로 헝클이며,
“당세는 오히려 정하상점(井河相漸)이라고 하는 게 맞아. 관은 관대로 무림인을 잘 꼬드겨 휘하에 거두려 하고, 무림인 중에는 또 부귀영화에 홀려서 관에 투신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니까. 우물물과 강물이 자연히 섞이게 되지. 에, 얘기가 너무 멀리 빠졌구먼. 결국 이런 세태 속에 제일 먼저 넘어가는 건 천대받았던 약자들, 하오문이 관의 주구로 전락해 새로운 흑도로 등장하게 된 거야. 안덕차행처럼.”
긴 얘기의 시작은 안덕차행이었다.
무림과 관계가 없다 여겨지는 여러 사실을 거치고서 다시 하오문의 흑도인 안덕차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해원기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굳은 얼굴, 심해와 같은 눈빛.
오소민이 처음 보는 침중한 표정이라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떠든 내용 중에 뭔가 걸리는 게 있나?
동집사창을 얘기할 때부터 계속 뭔가를 생각하더니.
바깥에 건 지등 하나, 컴컴한 오두막 안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해원기가 말문을 열었다.
“오형, 동집사창과 금의위에 대해 더 알 수 있겠습니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중한 말투지만 음성이 매우 낮아서,
오소민이 조금 찔끔한 느낌이 들었다.
“어, 그러지. 금의위야 해형도 좀 아는 듯하니. 전신인 친군지휘사사부터 태조 홍무제(洪武帝)가 원말 각지에서 긁어모은 무공, 소위 황궁무공(皇宮武功)을 기초로 양성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제대로 체계를 잡았다고 봐야 할 거야. 원말이 워낙 혼란했으니까 유불도속 사가의 공부가 전부 다 섞였지만, 잡박하면서도 실용을 추구하면 뜻밖의 성취를 이루는 법이지. 특히 연적(燕賊), 아, 영락제가 중건하면서 그 실력을 더 강화했다는 소문이고. 그밖에는 다 비밀, 구성과 체계는 윗대가리를 빼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지.”
황제 직속의 비밀감찰조직이니 당연하다.
“동창, 음, 동집사창을 줄여서 동창이라 부른다더군. 동창은 설립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궁외(宮外)에 둔 금의위와 달리 처음부터 궁내(宮內)에 자리해서인지 알려진 게 더 없어. 우두머리가 환관이요,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니 사례감(司禮監)의 장인태감에 견줄 인물이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정식 명칭조차 모호하지. 창위상의라고 금의위 소속들을 수족으로 부리는 걸 보면 어쩌면 금의위보다 상급일지도. 또 환관이 내시(內侍)라는 오랜 전통에서 생겼으니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기특한 공부가 있을 수도. 쩝. 이 정도일까.”
비밀. 비밀 중의 비밀.
금의위나 동창이나 그 명칭을 아는 것조차 쉽지 않은 조직이다.
천하제일의 소식통을 갖추었다는 개방 내부에서 신비한 순행장로라 불리는 오소민이라도 여기까지가 한계.
실상 오소민이 아는 것만 해도 엄청난 내용이다.
정좌한 채 듣고 있던 해원기가 이번에는 바로 말을 받았다.
“영락제는 연왕(燕王)이었을 때 수십 년간 몽고의 잔당과 싸우며 실력을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또 정난지역(靖難之役)으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낼 때 환관이나 요승(妖僧)의 도움이 컸다고 하고요. 오형의 동창에 대한 추측은 틀림없을 겁니다. 백성의 삶이 고달픈 것은 전부 위정자의 잘못, 환관의 발호는 언제나 난세의 단초입니다. 그게 직접 강호, 또 무림을 향한다면!”
중간에 말을 멈추는 경우가 거의 없는 해원기.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음성이 단호하게 끊어지고, 눈에는 번쩍 섬광이 스쳐서.
오소민이 퍼뜩 허리를 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무서운 기세, 그러나 해원기는 입을 꾹 다물고 뒷말을 하지 않는다.
소위 대내무림이라고 떠드는 것들이 강호무림을 향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오형의 직감이 옳습니다. 이번 사건의 시작은 상보감 장인태감의 낙향, 환관들이 득세해서 내궁십이태감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자 중의 한 명입니다. 오형과 더불어 조사하면서 그 상황이 기묘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표행을 덮친 아홉 무리의 도적뿐 아니라, 겁표를 당한 화주(貨主)도 의심스럽습니다. 안덕차행에 나타난 다섯 명의 복면인이…….”
“어, 잠깐, 잠깐.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왜 이쪽으로 빠지는 건데?”
오소민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다가앉았다.
한참 자신의 설명을 듣다 갑자기 무서운 기세를 내비치더니 화제를 홱 바꾼 해원기.
왠지 속은 듯한 느낌이라 잔뜩 인상을 썼고,
해원기는 그런 표정에도 어깨를 으쓱 올릴 뿐.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까요. 우선 직접 부딪친 것부터 차근차근 확인해볼 셈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오형의 도움이 필요하고. 아까의 복면인들, 그중 우두머리는 역장이라 불렸죠. 아무래도 그자들이 바로 금의위, 혹은 동창일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건 그럴. 가만!”
오소민이 묻는 대로 대답하려다 급히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반짝이는 눈이 대뜸 도끼로 변해서,
“뭐야? 얼렁뚱땅 사람을 넘기려 하네. 이 친구, 질이 나쁘잖아.”
해원기를 마구 찍어댄다.
해원기도 자신이 실태를 보였음을 아는지라 더벅머리를 슬쩍 긁는데.
성질이 난 오소민과 계면쩍어진 해원기가 얼른 자세를 바꾸어 오두막의 낡은 문짝을 향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
“장로님, 계십니까?”
조그맣게 전해지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두 사람의 어색해지려던 분위기도 풀어져 버렸다.
무공을 지니지 않은 사람, 오소민을 장로라고 부르며 찾는 이라면 지등을 보고 온 사람이다.
해야 할 말만 하고 조그만 보퉁이 하나를 놔두고 떠난 사람.
초로의 나이에 희끗한 머리에는 수건 한 장 두르지 못했다. 낡아빠진 갈의(葛衣)는 더럽기 그지없고 온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 떠난 후에도 오두막 안이 퀴퀴하지만.
해원기는 오소민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배계 가게에 왔던 그 마부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성내의 마부들을 전부 소집하다니.”
방금 전해 들은 소식. 차행에 속하든 말든 마차를 모는 자라면 전부 징발한다고.
그건 내일 새벽이면 성안에 내려질 관아의 지시. 역참의 노역으로 일한 덕에 미리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까와 다른 이가 오소민을 찾아왔다.
오소민이 잠깐 인상을 쓰다가 콧김을 세게 내뿜었다.
“킁! 괜찮을 거야. 찜찜한 느낌이 들면 밤중에라도 성을 떠날 작정이겠지. 그러니까 마부 대신에 노역이 온 거잖아. 에고, 말똥 냄새.”
오두막의 퀴퀴한 냄새에 더 신경을 쓰면서 놔두고 간 보퉁이를 풀다가,
“엣? 이건. 하핫.”
놀라고, 웃음을 터뜨리고.
그도 그럴 것이 보퉁이 안에는 바로 덕주배계 한 마리와 고패춘 한 병.
마침 오두막에서 음식과 술을 떠올렸었는데.
참으로 공교로워서 해원기도 얼굴을 활짝 펼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사정, 심각한 주제.
그 어떤 것도 앞에 놓인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보다 귀하지 않다.
삶이 본디 그렇다.
닭은 오소민, 술은 해원기.
술잔이 있을 리 없어 해원기가 그냥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들이마신 후에.
열심히 닭을 찢어대는 오소민에게 말을 건넸다.
“오형이 물어보면 뭐든지 답하겠습니다.”
평소의 차분한 음성.
오소민의 손이 문득 멈추고 별처럼 빛나는 시선이 해원기의 얼굴에 꽂혔다.
더벅머리에 어리숙한 표정, 오소민의 준수함에 비하면 평범하기만 한 용모. 자세히 살펴봐야 그나마 깊은 두 눈이 좀 특이하다는 걸 알 정도.
그 평범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어려서, 오소민이 닭기름이 묻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건 또 뭘까? 해형은 생긴 것과는 달리 화법이 비범해서, 본 공자를 어지간히 당황하게 한단 말이야. 젠장.”
난감한 듯, 짜증이 난 듯.
닭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이마가 해원기 앞으로 쑥 다가왔다.
“뭐든지 답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뭘 믿고 그런 소릴 하지? 해형과 나는 서로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되었어. 그리고 해형의 정체 정도야 얼마든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엷은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고.
해원기가 노려보는 오소민에게 눈을 맞추었다.
“정체든 내력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숙부에게 들은 말을 흉내 내자면, 흠, 앉았다고 성을 바꾸고, 일어섰다고 이름을 고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 이름은 해원기. 그거면 족하고.”
술병을 내밀며 말을 잇는다.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오형을 믿기에. 오형이 단지 제 정체를 밝히려고 동행한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진심으로 벗이 되고 싶습니다.”
“…….”
말이 막힌 오소민의 눈만 동그랗게 커졌다.
술병이 손가락에 닿았지만 바로 받지 않고서 해원기의 말만 듣더니, 번들거리는 이마가 천천히 내려간다.
고민에 빠진 것처럼 푹 숙인 머리, 그러나 그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리며.
“크크크큭. 이거 정말 웃기잖아. 하하핫!”
마침내 오두막이 울리도록 폭소를 터뜨렸다.
미친 것처럼.
웃음이 뚝 그치도록 미동도 없이 지켜보는 해원기.
오소민이 상반신을 뒤로 젖혀 똑바로 앉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굳은 얼굴.
“해원기! 이름이면 족하다고? 흥.”
코웃음이 얼음처럼 차갑다.
“벗이라는 달콤한 핑계로 꾈 셈인가? 본 공자가 두고두고 써먹을 만한 가치가 있나 본데. 그렇다고 사람을 너무 쉽게 여기지 않는 게 좋아.”
날카롭게 솟은 눈썹 밑, 별처럼 빛나던 눈은 찌르는 듯하고.
전신에선 얼핏 살기까지 풍기는데.
해원기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오형이 개방의 순행장로라서가 아닙니다. 단 하루지만 오형과 함께 있으면서 내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혼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자만했습니다. 부족한 건 소식통뿐이라고요. 그래서 개방의 전령전을 사용했던 겁니다. 하지만.”
미소 대신에 살짝 이지러지는 입술.
쓰디쓴 자조가 낮아진 음성에 실렸다.
“어리석었지요. 오형이 동행해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더구나 오형은 무지한 제 건방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단지 사건의 일부분을 들었을 뿐인데도 서슴없이 나서주었고, 개방 내부의 일도 거리낌 없이 알려주었고요. 옳은 일에 서슴없음은 의, 거리낌 없이 도움은 협이라고 배웠습니다. 배우고도 행하지 못하는 자가 능히 행하는 이를 만났으니 어찌…….”
“그만!”
오소민이 빽 소리를 질러서,
차츰 열을 띠려던 해원기의 말이 끊어졌다.
솟구친 눈썹, 찌르는 시선은 그대로지만. 은근히 풍기던 살기는 사라졌고.
한참을 말없이 보는 바람에 해원기 역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마주해야 해서, 둘이 졸지에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오소민의 눈썹이 축 처지며 긴 한숨이 새어 나오고,
“후우우, 갈수록 더 궁금해지고, 아예 흥미진진하다고. 해형의 내력이.”
다시 ‘해형’이라 부르더니, 해원기가 말을 받으려 하자 급히 손을 흔들었다.
“됐어, 됐어. 물어보면 가르쳐준다고 했지. 그래도 안 물어볼래. 이것도 내 재미니까. 조금씩 단서를 찾아서 마침내 알아내는 재미. 쩝.”
다시 배계를 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해형은 그 정도로 어려운 문제거든. 강호에는 꽤 익숙해 보이면서 무림은 잘 모르지. 전령전을 지녔고 황하문의 문주랑도 아는 사이면서 장거리 쾌체라지. 금의위는 알면서 동창은 모른다지. 이 덕주배계란 걸 추천하면서 덕주 길은 처음이라지. 게다가 무공은 대체 어느 경지…….”
하나하나 꼽아가다가 손을 쭉 내밀어,
“무엇보다 사람 사귀는 게 아주 젬병이야. 어째 남들과 어울려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말투만 고지식한 게 아니라.”
움찔하는 해원기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벌컥.
들이붓듯 한 모금.
오소민이 입가로 번지는 술 방울을 소매로 쓱 닦으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덕주배계 가게에서 고패춘을 나눠마셨을 때부터 이미 친구였잖아.”
정말 화가 났었다.
이 바보 같은 친구는 어째 답답한 소리를 질리지도 않고 해댈까.
이번엔 해원기의 시선이 배계로 떨어졌다.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오소민의 말대로.
지난 세월, 다른 사람과 어울려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멍청한 짓을 해버렸다.
진심을 어찌 말로 하려 했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