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6화 (27/410)

제7장 정하상점(井河相漸) (2)

왕조가 바뀌고 정변이 일어나고. 세속의 권력이 어떻게 변한들 백성의 삶이 나아진 적이 있던가.

남송(南宋)이 무너지고 몽고가 원(元)을 세웠다. 그 원을 무너뜨리고 다시 명(明)이 섰어도,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강호는 그대로다.

해원기로서는 더욱이 왕조나 왕권에 관심이 없었지만, 근 십 년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얘기는 자연히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영락제(永樂帝)가 연경(燕京)으로 경사를 옮기고 나서 그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인 갖가지 조치.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거슬리거나 의심스러운 자들을 참혹하게 숙청했으니.

대규모의 옥사가 끊이질 않았다.

황실의 친척, 원로대신, 육부의 상서와 도독부의 장군들, 이천석(二千石)의 현관(顯官)에 심지어 저명한 학자와 그 문생(門生)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원통하게 목숨을 잃었다.

대역죄로 몰린 자가 대부분이니 당연히 집안이 적몰(籍沒)되어 중원 각지에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비참한 일이지만.

옥사가 몇 번 일어났는지 누가 세어보며, 이게 하오문의 배경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그런데 해원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오소민은 또 이상한 질문을 더한다.

“삼법사(三法司)가 뭔지는 알지?”

이것 또한 일반 강호에선 듣기 어려운 단어.

해원기가 가만히 쳐다보자 오소민이 일어나 옷을 털며 몸을 돌렸다.

“하루 종일 달렸고, 재수 없는 것들이랑 손도 섞었어. 오밤중에 길바닥에 있고 싶지는 않구먼. 어디 좀 쉴 만한 데를 찾아서. 흠, 짧은 얘기가 아니거든.”

계속 해원기는 본체만체. 말을 끝내자마자 훌쩍 성벽을 넘는 바람에,

해원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를 따랐다.

싸움을 끝내고서 오소민이 여러 가지 복잡한 심사인 건 알겠는데, 음성에 어쩐지 서글픔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다시 덕주 성안.

부둣가 근처의 허름한 오두막에 작은 지등(紙燈) 하나가 걸렸다.

오소민이 바닥에 어지럽게 깔린 더러운 마포(麻布)를 긁어모아 털썩 주저앉았다.

“꽤 푹신한데. 이거 다 버려진 돛일 거야. 해형도 이렇게 잠자리를 만들라고.”

더러운 마포, 부러진 삿대, 뭉텅이로 쌓인 그물.

쓸모없게 된 것들을 보관하는 창고 같은데 오소민은 제집처럼 찾아왔고, 구석에서 멀쩡한 지등 하나를 찾아내더니 손톱으로 기묘한 주름을 잡고 나서야 밖에다 걸었다.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일 터.

해원기가 묵묵히 따르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역장이라는 복면인들을 찾을 셈입니까?”

안덕차행의 목옥 바닥에서 남문 안쪽까지 파놓은 땅굴. 다섯 명의 복면인들은 그 땅굴로 도주했을 것이다.

조금 전과는 달리 평소의 표정을 회복한 오소민이 피식 웃었다.

“훗, 아냐. 이 밤중에 어디서 그 새끼들을 찾겠어? 더구나 여긴 개방의 분타도 없어. 저 지등은 그냥 내가 여기 있다는 표시, 하오문 사람 중에 혹 연락할 게 있으면 알아보라는 거지. 쉬면서 이야기나…… 젠장!”

불쑥 욕을 내뱉으며 두 손을 펴보더니.

“닭날개가 없어졌네. 아까 싸울 때 떨어졌나.”

안타까운 음성에 해원기의 굳었던 얼굴도 풀렸다. 먹을 것을 챙겨두는 데에는 도가 튼 친구, 한바탕 힘을 쓰고 났으니.

“나는 술 생각이 나는군요.”

해원기는 맛있는 덕주배계보다는 고패춘이 그리웠다.

“흥, 은근 술꾼이야. 뭐 좀 기다려 보자고. 그래도 명색이 개방장로인데 모른 척하진 않겠지.”

설마 지등을 걸면서 그런 기대까지 했을까.

해원기가 맞은편에 정좌하면서 살짝 웃었다.

“하하, 덕주처럼 크고 번화한 곳에 분타가 없는 건 의욉니다.”

“구걸이 어렵거든. 수륙(水陸)의 운송 덕에 사람과 돈이 다 많으니까, 치안이랍시고 끼어드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냐. 오기 전에 말했잖아, 덕주는 경사 하간부, 하북 동창부, 산동 제남부에 다 소속된다고. 으스대는 나리들이 파리 떼처럼 많아서 거지는 보이는 족족 잡아들여.”

일리 있다. 경사나 남직례(南直隷) 같은 대도시는 오히려 거지에게 불안한 환경.

오소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포쾌 따위의 말단 아역이 아니라 제형안찰사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에 소속된 나리들까지 거지를 잡아 족치려고 나서는걸. 웃기는 수작이지. 뭐, 이건 아래쪽 얘기고. 아까 하던 위쪽 얘기를 마저 해볼까.”

“삼법사는 압니다. 형부(刑部), 도찰원(都察院), 대리시(大理寺)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죠.”

“장거리 쾌체 주제에 별 걸 다 아네. 아니지, 장거리 쾌체라 들은 게 많아서라고 둘러대겠구나.”

오소민이 해원기를 슬쩍 흘겨보고,

“하여간 이 셋이 전부 사람 때려잡는 곳이니까 가장 무서운 권력을 지녔다고 여겨야 맞는데. 흠, 아까 말한 숱한 옥사 중에는 형부의 고관과 대리시경(大理寺卿)에 도어사(都御史)나 감찰어사(監察御史)들도 많이 걸려들었단 말씀. 간단히 말해서 사람 때려잡던 것들이 거꾸로 당했다, 이거지. 자, 누가 이 무서운 양반들을 때려잡았을까?”

율법에 맞는지 따지고, 잘못을 살펴 탄핵하고, 시비를 가려 판결하는 삼법사. 죄를 묻고 벌을 주는 곳이니 가장 무섭다는 표현이 딱 맞다.

오소민이 왜 엉뚱하게 옥사와 삼법사를 물었는지, 해원기가 차츰 이해가 갔다.

원말(元末), 각지의 반란을 통해 천하를 차지한 태조.

그는 병적으로 권력에 집착했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제도와 수단을 동원했었다.

형벌의 정령(政令)을 관장하는 형부나 사안을 심의하고 판결하는 대리시는 놔두고, 도찰원만 해도 때로는 즉결의 권한을 가질 정도.

조정뿐 아니라 십삼도(十三道)와 남직례에 전부 감찰의 부서를 두어 어사의 수가 백사십 명이나 된다나.

승선포정사와 제형안찰사라도 이 감찰어사에게는 벌벌 기어야 할 지경.

그런데 이들을 옥사에 엮어 넣은 이들이라면?

해원기가 문득 어렸을 적에 들었던 한 가지 이름을 떠올렸다.

“금의위(錦衣衛).”

“어?”

오소민이 막 하려던 답.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을 딱 갖다 붙이고 이렇게 오랫동안 살펴보면 아무리 남자끼리라도 민망하다.

오소민이 정색하고 거의 반각 가까이 쳐다보는 통에 해원기가 결국 시선을 슬쩍 돌렸다.

“어흠, 내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겨우 꺼낸 말에도 오소민이 여전히 해원기의 시선을 따라 머리를 움직이다가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거 진짜 속 터지네. 알 듯 말 듯, 해형, 당신 대체…… 아냐!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기어이 정체를 밝힐 거니깐!”

해원기에게 직접 신분을 묻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네. 가만히 있습니다.”

이 멀뚱한 반응이 더 신경질 나지만, 오소민은 성질을 꾹꾹 눌렀다.

“그래. 금의위야 금의위. 친군지휘사사를 개편해 황제 직속으로 설치한 무력 집단. 이들은 황제의 명이면 황친이고 대신이고 다 잡아 죽일 수 있지. 그런데…….”

붉어진 얼굴에서 두 눈이 더욱 반짝이고.

말을 끌면서 해원기의 눈치를 살피는 건 또 먼저 답이 나올까봐.

해원기가 집중해서 듣는 자세라 비로소 맘이 놓였다.

“금의위는 본래 무부(武夫)라고. 주인이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기나 하지, 뭘 안다고 옥사를 일으켜? 우두머리인 지휘사(指揮使) 하나만 삼품(三品)이고 나머진 다 그 아래인데 어디 감히 고관대작에 비겨? 그런데도 용케 황친국척, 누대정승(累代政丞)과 영렬장문(英烈將門)에 저명한 학자들까지 조정을 비방하기만 하면 기막히게 알아내서. 흐흥, 이건 개가 아니라 여우가 할 짓이잖아.”

금의위를 개에 비유한 게 그리 과하진 않지만,

개가 아니라 여우라.

해원기가 전혀 모를 얘기에 눈을 껌뻑거리자, 오소민의 얼굴에 비로소 여유가 되돌아왔다.

성질을 꾹 참은 보람이 있다.

“호, 장거리 쾌체께서 개는 알아도 여우 이름은 모르시나? 에헴.”

놀리는 말투와 헛기침으로 뜸을 들이고,

천천히 한 글자씩 여우의 이름을 읊는다.

“동(東), 집(緝), 사(事), 창(廠).”

해원기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처음 듣는 이름. 그러나 그다지 좋은 느낌이 들진 않는다.

오소민이 옥사와 삼법사를 거론한 이유가 바로 금의위와 이 동집사창이란 이름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화제의 핵심은 여전히 안덕차행의 배후다. 해원기가 관(官)이라고 단정하지 못했으나, 그건 견문이 부족해서일지도.

무림.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세계.

어느 왕조에서도 겉으론 무시하면서 암암리에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

세속의 권력이 모른 척하듯, 무림 역시 세속의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단지 그 터전이 강호이기에 그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며.

의(義)를 지키고 협(俠)을 행하면 백도요, 의를 지키되 이(利)를 취하면 흑도라고 구분할 뿐.

송(宋)이 남천(南遷)하여 천하가 난세로 접어든 백여 년간, 극히 불안해진 세상에서 권력으로부터 강호의 삶을 지키려고 흑백을 가리지 않고 애를 썼었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원대에는 무림이 세속의 변화에 관여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무림은 여전히 관(官)에 무관심한데.

반면에 역대 왕조에게 있어서 무림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천하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이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을 달가워할 리 없다.

특히 원의 멸망을 통해서 무림의 힘이 어떻다는 게 실증된 판이니.

자연히 무림에서도 관의 간섭을 항상 경계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본래 지녔던 무관심의 성격이 크게 변하지는 않아서.

실로 당세 권력의 구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무림인은 거의 없을 터.

해원기가 금의위라는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극히 드문 일이라,

동집사창이 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동집사창이요? 어떤…….”

어디 소속인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이름만으로는 아랫것들이 모여 자질구레한 일이나 처리하는 하찮은 곳 같은데.

그런 곳을 오소민이 굳이 강조해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뜻 질문할 말머리를 찾지 못하는 게 오소민을 더욱 흐뭇하게 했나.

“흠, 해형도 역시 처음 들어보는 모양이군. 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당세 무림에서 동집사창이란 명칭을 들어본 자는 얼마 되지 않을걸. 금의위를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과거에 강호에 잠시 등장했을 때에는 친군지휘사사였으니까. 그걸 개편해서 다시 설치한지도 겨우 십 몇 년. 동집사창이 어느 구석에 붙은 허접한 창고인지 알 리가 없다고.”

위로하는 말투로 뻐긴다.

해원기보다 하나라도 뛰어난 게 있다는 점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해형에게 겁표 얘기를 듣자마자 생각이 나더군. 환관의 낙향 표행이잖아. 동집사창은 바로 환관이 대가리에 금의위를 손발로 둔 이리 떼거든.”

설명이 확 비약해서. 개에서 여우, 여우에서 이리 떼가 되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오소민이 엉뚱하게 ‘옥사’를 물었던 까닭을 알았다.

“무수한 옥사. 개중에는 관에 있으면서도 협기가 있거나, 강호와 인연을 맺은 이도 적지 않았어. 무장 출신이면 당연히 제자나 수하들을 거느렸을 테고. 그런데도 모조리 숙청당했지. 대처할 준비, 도주할 기회, 맞설 무력. 어느 것 하나도 갖출 수 없었으니까. 왕법(王法)? 흥, 법이 무슨 소용 있나. 삼법사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처결할 권한을 지녔는데.”

“에, 또, 벽에도 귀가 있고 마루 밑에도 눈이 있다고 하잖아. 여우들은 출신이 환관이라 그런지 남의 내밀한 속을 알아내는 데 민감하고, 그 본성을 옥사를 일으키는 데에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더라니까. 황제를 등에 업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 힘이란 게 그렇잖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 고자새끼들이 점차 욕심이 커졌지. 여기에 아주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해원기가 모르는 걸 가르쳐 주는 기쁨에 묻지 않아도 줄줄 얘기를 늘어놓던 오소민.

잠시 말을 끌며 입술을 깨물었다.

해원기가 보이는 답답한 말투나 고지식한 행동은 그저 겉모습일 뿐. 보기와는 다른 영민한 머리를 지녔다는 건 진즉 알아챘다.

굳이 상세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아도, 해원기는 이미 자신이 무슨 의도로 얘기하는지 간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

일어선 눈썹, 주름 잡힌 미간, 그리고 심유하기 이를 데 없는 두 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서 오소민이 시선을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쩝. 웃기지도 않는 마음을 먹었나 봐. 무소불위의 힘에 취해서는 못된 것들끼리 한통속이 되더니, 흥! 창위상의(廠衛相依)랍시고 동집사창과 금의위를 묶어 가지고서는 저희들 내부에선 대내무림(大內武林)이라 부른다나. 어쭙잖은 이름을 갖다 붙였지만, 거기에 시커먼 속이 다 드러나잖아.”

시커먼 속.

해원기가 미간을 풀면서 비로소 말을 받는다.

“강호무림에 상대(相對)한 명칭이군요.”

‘창위상의’는 동집사창과 금의위가 서로 의지한다는 뜻. 이 강력한 무력집단이 대내무림을 자칭했다면, 그건 바로 강호무림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잘도 알아듣네. 쳇!”

과연 전부 이해했구나. 오소민이 싱겁게 혀를 차자,

해원기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래된 묵계를 깰 셈일까요?”

착 가라앉은 음성. 그만큼 무거운 의미가 담겼기에.

한참 입을 놀려 지치려던 오소민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묵계’.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만 또 그걸 일부러 입에 담진 않는다. 글자 그대로 말이 아니라 뜻으로 맺은 약속, 그런 약속이 구속력이 있을 거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이젠 없다.

오소민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하불상침(井河不相侵)을 말하는 거야? 그거야말로 고리고리고리짝 옛날이야기라서. 후후.”

어쩐지 허망하고 씁쓸한 웃음이 말끝에 달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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