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5화 (26/410)

제7장 정하상점(井河相漸) (1)

기형검.

길이가 짧은 만큼 빠른 속도와 다양한 변화를 구사할 수 있고, 짧은 길이는 성형검기의 위력으로 보충한다.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극히 실용적인 이유로 고른 병기.

이 기형검을 받고 나서 단 한 번도 손을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역장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시뻘겋게 부어올라서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다. 기형검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워진 것뿐 아니라 손목이 부러질 뻔했던 충격.

제때에 신공의 호신지력(護身之力)이 발동하지 않았다면 심한 내상을 입고 목옥에 처박혔을 터.

비틀거리는 몸을 안정시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복면 속의 부릅뜬 눈이 손바닥에서 정면을 향했다.

손가락을 곧게 편 맨손. 맨손으로 성형검기를 꺾었다고?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맨손으로 날붙이를 상대하는 무공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날과 정면으로 부딪치진 않는다. 도검의 옆을 때리거나 어느 정도 날을 견딜 수 있는 특수한 기예를 익혀야 충분히 날붙이를 견딜 수 있고, 역장 자신도 가능하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능가하는 힘과 속도를 먼저 갖추어야만 하며,

이것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하는 얘기.

검의 외부에 검기로 형태를 이루게 하는 성형검기는 이미 흔한 날붙이의 범주를 벗어나 그 자체로 보검(寶劍)이나 신검(神劍)이라고 일컬어지는 힘을 지닌다.

힘과 속도 위의 기공(氣功)이란 말이다.

손이 뜨거운 화염을 뿜는다고, 굳은 쇳덩이와 똑같다고 뻐기는 자들이 많지만, 맨손으로 이룬 공부라면 견딜 수가 없어야 정상.

같은 기공이라면 맨손의 공부가 검의 공부를 이길 리 없다.

열양수(熱陽手)나 철사장(鐵沙掌) 따위도 전부 베어본 적이 있는 역장인데.

맨손이 검의 기공을 이기는 경우는 오직 하나다.

해원기는 오른손을 꼿꼿이 세운 채 재빨리 오소민 쪽 상황을 살폈다.

이미 오소민의 내력을 짐작하기에 별반 염려할 필요는 없었지만, 역장을 밀어낸 후 문득 머리를 스치는 직감 때문에.

삼지화정으로 화톳불을 날릴 때부터 잠심침령이 운용되었고, 기수식을 연환해서 검왕수를 이룬 순간 신왕공(神王功)은 일어난다.

비록 삼전태(三全泰)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진 못했어도 혜근(慧根)이 깨어나고 영대(靈臺)가 맑아져, 육식(六識)의 경지가 신령해지니.

기이한 직감은 이유가 있다.

동시안이 제대로 어려 비취빛으로 화한 두 눈, 오소민에게 격퇴당한 네 명과 그들이 든 기형도를 빠짐없이 훑고선.

부드럽게 자세를 바꾸었다.

오른손이 뒤로 빠져 허리춤에 붙고, 왼손이 앞으로 떠오른 자세.

“초식은 단순한데 검은 성형검기의 경지, 게다가 내부는 전진(全眞) 계통의 호신기공. 네 정체가 궁금하군.”

해원기가 왼발을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보기 드문 기형검, 내리치고 찌르는 평범한 초식을 성형검기로 강화한 데다, 검왕수의 기수식을 버틴 건 전진도가(全眞道家)의 화합결(和合訣)로 보인다.

성형검기도 아무나 이르기 어려운 경지지만, 전진도가는 이미 아득한 과거에 사라졌거늘.

찾아올 걸 미리 예상하고 대기했던 복면인들. 팔호니 뭐니 했으니 겁표의 아홉 무리와 분명히 연관된 자들이고.

역장의 복잡한 무공이 중요한 단서임을 직감했기에.

바로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해원기의 혼잣말이 끝나기 전에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오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왼손을 따라서.

역장이 떨리는 손을 급히 양쪽 소매에 넣었다.

내공과 경지가 한 단계 높아야만 맨손으로 성형검기를 꺾을 수 있다.

이 어수룩해 보이는 더벅머리 청년이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고 여겼기에 자신이 직접 나섰지만, 막상 겪어보니 상대도 되지 않을 고수.

의어전성을 엿듣고 자기의 내공 유래까지 단숨에 간파하는 고수에게.

더 대들어봤자 헛수고에 불과하다.

열세에 처했을 때에는 전력(戰力)을 보전한 채 후퇴하는 게 상책. 그게 소대(小隊)를 이끄는 역장의 책임이다.

더구나 더벅머리 청년이 기이한 자세를 취하자마자 주변이 빨려 들어가는 듯하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양쪽 소매에 감추었던 열 개의 독무탄(毒霧彈)을 모조리 내던졌다.

퍼퍼퍼펑.

붉은 연기가 폭발하는 가운데 역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철수!”

오소민을 노리던 네 명의 복면인도 서슴없이 붉은 연기에 묻혀 몸을 날린다.

그 동작이 너무나 기민하고 능숙해서 달려들려던 오소민까지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독? 이 새끼들이.”

욕설보다 급한 건 순식간에 퍼지는 붉은 연기.

오소민이 황망히 손뼉을 치며 뒤로 빠졌다.

짜악, 짜악, 짜아악.

애들 장난 같은 손뼉이 이상하게 맑은 소리를 내는 건 오소민의 두 손이 전부 옥으로 빚은 것처럼 맑기 때문.

퍼지던 붉은 연기가 대번에 힘을 잃고 사그라지지만.

해원기는 다가오는 붉은 연기에 신경도 쓰지 않고 오른손을 빠르게 무찔렀다.

왼손이 그린 둥근 원의 가운데를 곧장 뚫는 오른손.

위이이잉.

웅장한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거대한 기운이 장대하게 뻗어 나간다.

마치 검처럼 보이는 기운. 붉은 연기를 통째로 날리고 정통으로 목옥에 부딪치니.

쾅!

기둥이 꺾이고 지붕이 무너지고.

통나무로 거칠게 지었더라도 집 한 채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막 붉은 연기를 흩어내던 오소민이 펄쩍 뛸 굉음.

“으에에, 놀래라!”

오소민이 기겁해서 쳐다보지만, 해원기는 손을 거두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놓쳤다. 어떻게?”

반말이니 혼잣말.

오소민이 놀란 일격인데도 단 한 명의 복면인도 보이지 않는다. 궁금하긴 오소민 역시 마찬가지, 놀라움보다 그 이유를 알려고 성급하게 앞으로 뛰어나가더니.

“구멍이잖아,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놨어! 뭐야, 이 새끼들.”

부서진 나무들을 발로 내차면서 버럭 화를 낸다.

복면인뿐 아니라, 오소민에게 당했던 총관과 관사, 그리고 행수까지 다 사라져버렸다.

욕을 거듭하는 오소민을 놔둔 채,

해원기가 한쪽 눈썹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단숨에 제압하려고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검왕오형(劍王五形)의 시작인 발검제형(拔劍制衡)을 썼겠는가.

성형검기든 전진의 비결이든, 또 다른 기예나 암기라도 꺾어버릴 셈.

그런데.

역장을 포함한 복면인들은 단 한 차례 부딪쳐보곤 바로 도주해버렸다. 아예 끝까지 싸울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 와중에도 아무도 남기지 않는 치밀함.

“이 땅굴 꽤 긴데. 곧장 북쪽이면, 덕주 성안으로 통하나? 자주 들락거렸는지 잘 다듬어놨네. 두더지 새끼들이.”

그새 땅굴 속에 머리까지 넣어본 오소민이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흑도라도 이런 구역질 나는 것들은 또 첨 봤다. 온갖 허세를 다 부리며 등장하더니 안 되겠다 싶으니까 잽싸게 발라? 간뎅이가 쥐새끼만 한, 두더지가 아니라 두더쥐인가?”

어지간히 기가 막히는지 욕설이 우스개처럼 나오고,

해원기가 눈썹을 문지르던 손을 떼었다.

오소민의 말대로.

흔히 흑도를 비열하다 욕하지만, 그들에게도 의리와 위신이란 게 있다.

무림인인 이상 겉으로 어떻게든 강한 척을 하기 마련. 백도에서는 명예라고, 흑도에선 체면이라 하는데 결국은 명성 때문이다.

명성이란 게 본디 헛되지만, 그 헛된 명성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무림인 아닌가.

일부러 무림을 멀리했던 해원기, 그래도 그 생리가 바뀔 리는 없을 터. 오소민의 투덜거림이 그 점을 일깨웠다.

한두 차례의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고 해서, 검을 떨구었다고 해서 바로 도주한다? 패했어도 어떻게든 체면을 세우려 했을 테고, 아직 네 명의 복면인이 더 있었잖은가.

독무탄을 열 개나 뿌려댔으니 또 다른 암수를 숨겼을 수도 있고,

목옥 안에 숨어서 유인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냥 물러갔고, 네 명의 복면인 중에 단 하나도 멈칫거린 자가 없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으니 체면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걸까.

“오형, 일단 이 자리를 피합시다.”

독기를 머금은 붉은 연기는 거의 사라졌으나, 안덕차행의 무리들이 말을 되찾아 돌아오고 있었다.

굳이 여기에 계속 머물 이유가 없다.

덕주 남문의 허물어진 성벽 아래.

날이 저물어 오가는 이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해원기가 여전히 멀리서 전해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전부 안덕차행의 사람들뿐. 큰 소동이 벌어졌는데 덕주 관아에서 단 한 명도 나가보지 않는군요.”

“흐흥.”

성벽에 기대앉은 오소민이 코 울림으로 대답을 대신해서,

해원기가 시선을 돌렸다.

“차행에 가기 전에 오형은 하오문을 보호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말해주겠습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 방금 싸움을 치른 사람 같지 않고, 오소민은 어쩐지 뿌루퉁한 표정이지만 선선히 말을 받아준다.

“보고도 몰라? 돈 좀 벌었다고 차행이 패루를 세우고, 행수라는 놈이 총관과 관사까지 거느려. 그게 돈만 갖고 되나. 든든한 배경이 생기니까 겁 없이 설치는 거지. 그럼 그 든든한 배경은 뭣 때문에 차행을 돌봐줄까? 뇌물 받아먹으려고?”

까칠한 말투지만, 질문은 아니어서.

“아니지. 다른 이유가 있어. 강호에서 가장 빈천한 하오문, 그 하오문을 앞에다 세워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흑도는 이권을 따르잖아. 상가를 차지해 세를 받고, 객잔과 주루에서 보호비를 뜯고, 기루를 운영해 돈을 벌지. 하오문이 아무리 커졌다고 그 이권이 여기에 비할까.”

하오문 내부에 흑도가 생기는 이상함을 설명한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덤을 파는 인부들, 변소를 치는 자들, 길거리에서 기예를 파는 재인들, 노래를 부르고 꽃을 파는 여자들, 마차를 모는 마부들. 남들이 천하게 여기는 일이라 때로는 그 점을 이용해 생떼를 쓰는 고약한 경우도 있다. 그게 하오문을 천대하는 대부분의 이유인데, 그렇다고 흑도로 몰아붙이기는 어렵다.

오소민이 말한 것처럼 흑도는 이권.

생떼를 써서 번 푼돈에 손을 대는 건 체면 떨어지는 짓이다.

오소민이 굳이 해원기를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십 년 전쯤부터 하오문에 묘한 기류가 돌았어. 당연히 거지가 가장 먼저 알았고, 그 내용이 대단히 불쾌했다더군. 천대받는 이들을 하오문이라고 싸잡아 부르지만, 다들 힘겹게 강호에서 살아가며 서로 의지하던 이들이. 퉷.”

당시의 불쾌함 때문인지 침을 뱉곤,

“자기들끼리 욕을 하고, 싸우고. 그러다가 그 천한 일까지 뺏겨서 쫓겨나더란 말이야. 그러지 않아도 세상이 엉망이라서 가진 걸 뺏기고 굶어 죽는 사람 천지인데. 이게 대체 뭔 일이람. 헌데 그 묘한 기류의 배후가 영 수상쩍어서 도무지 실체를 알 수가 없었어. 그래서…….”

말을 흐리며 괜히 땅바닥을 긁어댄다.

개방도 어쩔 수가 없어서 결국 ‘보호’라는 결정을 내렸던 것.

오소민의 심사가 복잡해 보였으나, 해원기는 비로소 그 결정이 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유불도속(儒佛道俗)의 사가(四家)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개방. 오직 거지만으로 이루어진 방파라서 천하제일대방이라지만 의도적으로 세력을 넓힌 적은 없다. 개방에 속가제자(俗家弟子)가 있을 리 없잖은가. 그런데도 하오문을 보호하려는 건 오직 의기 때문.

하오문 내부의 옳지 못한 흐름을 좌시할 수는 없었으리.

그러나 당세에 손꼽히는 고수들이 포진한 개방이 이 묘한 흐름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그저 ‘보호’에 그쳐야 했다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은 하나지만.

“관(官)……?”

해원기가 한 글자만 꺼내고 바로 입을 닫았다. 말이 되지 않는다.

평민 취급도 하지 않던 천역들을 이득만 챙기는 흑도로 만들려고 뒤를 봐준다?

해원기가 말을 바꾸었다.

“하오문을 앞에 세운 이유가 뭡니까?”

오소민이 계속 땅만 쳐다보며 또 엉뚱한 반문으로 답한다.

“근 십여 년간, 옥사(獄事)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 알아?”

이건 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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