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4화 (25/410)

제6장 덕주배계(德州扒鷄) (4)

안덕차행의 총관과 관사.

대단하진 않지만 그래도 각각 웬만한 표사 서넛은 너끈히 상대할 실력이고, 특히 외공(外功)을 오래 닦아서 맷집 하나는 알아주는데.

어떻게 당했는지 알기도 전에 발밑에 누워버려서,

행수가 자기도 모르게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자신도 총관과 관사를 이길 수는 있지만, 동시에 상대하려면 적어도 오십 초는 싸워야 한다.

멀쩡하게 생긴 귀공자가 자신이 범할 수 없는 고수란 걸 직감하자, 본능적으로 오른손이 품에 들어갔다.

“어, 가만있어. 암기 같은 거 꺼냈다간 팔이 잘릴 거고, 신호를 보내려면 누구한테 보낼 건지 먼저 아뢰어야지.”

그냥 보고만 있겠나.

오소민이 성큼 다가오며 머리를 흔들었고.

“헉.”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수가 전신이 경직되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아직 열 걸음은 떨어져 있는데 마치 목이 졸리도록 멱살을 잡힌 것 같으니.

범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쳐다보지도 못할 고수. 외모와 다르게 노련하고 치밀하기까지 하다.

“그, 그게 아니…….”

덜덜 떠는 통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에 얹었던 유건이 떨어지자, 오소민이 키득거렸다.

“아니긴 뭐가 아냐. 우선 차행의 졸개들 들여보내고 나서. 응?”

그러나 이번에는 오소민이 말을 맺지 못했다.

파파파팍.

켜질 때보다 더 빠르게 꺼지는 등. 수십 개의 등과 횃불들이 약속이라고 한 것처럼 한꺼번에 사라져서 차행이 삽시간에 어둠에 덮였다.

차라리 등이 없었다면 밤눈에 의지했겠지만, 일단 밝았다가 꺼지자 아무리 공력이 출중해도 순간적으로 주위가 캄캄해질 수밖에.

오소민이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자마자,

그를 둘러싸고 여덟 개의 불꽃이 폭죽처럼 터졌다.

퍽.

오소민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 여덟 개의 불꽃. 한 소리로 동시에 터져서 흩어지고.

“오형, 괜찮습니까?”

바닥에 떨어진 여덟 개의 암침(暗針)을 발견하기 전에 해원기의 목소리가 먼저 전해졌다.

부서진 문루가 있던 곳. 문루를 지키던 십여 명이 막 피우던 화톳불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고 바로 그 곁에 오른손을 곧게 뻗은 해원기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오소민 쪽으로 화톳불을 날려 보낸 세 개의 손가락. 삼지화정이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

“젠장.”

오소민이 욕을 하며 바닥에 떨어진 암침 하나를 걷어찼다.

손가락만 한 길이에 바늘처럼 가늘고 온통 새까만 게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아무리 시야가 가려졌다고 해도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자신의 근처까지 날아들었으며, 그게 방위조차 다른 여덟 개. 전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급변한 상황.

그래도 화가 불끈 치솟았다.

잘난 척 앞에 나선 자신이 거꾸로 해원기의 도움을 받은 게 자존심을 긁어서.

“이 새끼들이. 미리 숨어있었다고? 빨랑 기어 나와아아!”

목청이 뒤집힐 정도로 빽 소리를 지르면서 두 손을 크게 떨쳤다.

옥빛이 어둠 속에 선명하게 빛나며 귀를 찢는 쇳소리.

찌르르릉.

마차와 목책을 엮은 마구간이 무너지고 수레들이 제멋대로 뒤집힌다.

퍼퍼펑. 히히힝.

폭음 속에 놀란 말 울음이 섞여서 엉망진창. 차행에 속한 마부들까지 와르르 뛰쳐나가지만.

성질부린 오소민도, 삼지화정을 뻗은 자세의 해원기도.

꼼짝하지 않고 정면 위를 노려보았다.

행수가 총관과 관사를 거느리고 걸어 나온 곳. 안덕차행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지은 건물이라고 할 목옥(木屋) 위에.

어느새 다섯이나 되는 인영이 일어섰다.

차행의 가장 큰 재산은 뭐니 뭐니 해도 말.

말들이 사방으로 미친 듯이 달려 나가니, 차행의 모든 인원이 소리를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무너진 마구간, 엎어진 마차와 나뒹구는 수레. 어두워진 시각에 대소동이 벌어졌지만.

목옥의 지붕에 선 다섯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 가운데에서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 주위의 소음 속에 파묻혔어도 해원기와 오소민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이곳으로 오는 건 팔호(八號)라고 생각했는데. 허나 그의 평소 기질로 봐선 이런 무식함이 어울리지 않아. 흠.”

누가 말을 했는지.

“그건 모를 일. 다른 놈들을 꼬드겼을 수 있다.”

“지금 알 필요가 있나? 꿇려놓고 천천히 심문해도 되잖아.”

똑같이 낮아도 조금씩 다른 목소리에, 역시 누가 입을 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섯이 모두 새까만 흑의 경장으로 전신을 감쌌고 머리에도 검은 복면을 뒤집어써서 누가 누군지 분간이 가지 않으니.

오직 복면 위에 뚫린 두 개의 눈구멍에서 냉전(冷箭) 같은 눈빛이 아래를 훑었다.

오소민이 총관과 관사를 단숨에 물리치고 행수를 제압하려는 순간에, 등과 횃불이 일시에 꺼지며 암침이 날아들었다. 방위가 다른 여덟 개의 암침.

해원기가 적시에 막아내고 오소민이 쌍장으로 성질을 부려서 차행은 대소동.

암침이 날아온 방향이 다 다르니 한 명이 던진 게 아닐 텐데, 언제 목옥의 지붕으로 이동했는지 알아채질 못했다.

그리고서 오소민과 해원기를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다섯.

차행의 행수를 덜덜 떨게 한 기세 정도는 아예 무시하는 대화를 나눈다.

오소민의 웅혼한 장력, 해원기의 신묘한 손가락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건가.

“그만 떠들고…….”

“이 새끼들이…….”

복면인의 목소리와 오소민의 욕설이 뒤섞이다가,

침착한 해원기의 음성에 전부 입을 다물었다.

“정체를 모르겠군. 오형, 역장(役長)이란 호칭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화톳불 근처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어느새 오소민의 바로 곁에 이르렀다.

목옥 지붕 위에서 열 개의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는 중에.

환상처럼.

복면 속의 눈동자가 전부 크게 흔들리고 여유를 부리던 대화가 뚝 끊겼다.

화톳불에서 오소민이 선 공터의 중앙까지는 오륙 장 거리, 처음에 오소민이 총관과 관사를 덮친 경공도 눈이 어릿할 정도로 빨랐다.

이른바 눈 깜빡할 사이. 그럼 눈을 깜빡하지 않으면 볼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번에는.

다섯 복면인이 이미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언제 움직였는지 보질 못했다.

아무리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오직 화톳불 하나만 밝았다 해도.

오소민이 하마터면 암침에 당할 뻔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거꾸로 뒤집혔다. 물론 해원기는 암침 같은 걸 날릴 리 없지만.

복면을 해도 당혹한 기색이 여실히 전해져서, 욕을 내뱉으려던 오소민의 입이 흐뭇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하핫, 역시 해형이 있으니 든든하구먼. 어, 역장? 글쎄. 그런 식의 호칭은 영 생소하네. 어디서 들었기에?”

방금 전에 자존심이 상한 건 벌써 까먹고 기분이 좋아졌지만.

단주(壇主)니 타주(舵主)니, 영주(令主)니 향주(香主)니. 강호상에 별별 직함이 있긴 해도 역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

왜 불쑥 묻는 걸까.

해원기가 다섯 손가락을 쭉 펴서 복면인들에게 하나씩 맞추었다.

엄지, 검지, 약지를 차례로 까딱이며,

“처음, 두 번째, 세 번째 말을 한 자들이고.”

무명지가 먼저, 중지가 마지막에 움직였다.

“그동안 부장(副長)과 역장이 뭔가 의논하더군요. 일종의 의어전성(蟻語傳聲)이라 호칭만 겨우 들었습니다.”

모깃소리만큼 작게 말을 전하는 기예. 물속처럼 고요한 곳에서 입에다 귀를 바짝 갖다 대어야 들릴까 말까 한다는 공부가 의어전성이다.

그걸 이 대소동의 와중에서 들었다고?

누가 들으면 헛소리에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당사자들은 기가 막힐 노릇.

해원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공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오소민이 기민하게 머리를 굴렸다.

“역장이면 역의 우두머리라는 뜻. 역, 역이라. 관부에서 상용하는 호칭이지만, 아역(衙役)의 대가리는 두역(頭役)이라고 부를걸. 포쾌 대장도 포두(捕頭)잖아.”

이럴 때에는 속된 말투가 훨씬 알아듣기 쉽다.

관아에서 말단으로 부려지는 자들에게 역(役) 자가 붙고 그 우두머리는 두(頭) 자를 쓰는 게 통례. 역장은 이상한 호칭이다.

그런데 오소민이 여기까지 말을 이어가자,

역장이라고 불렸다는 가운데의 복면인이 복면이 흔들릴 정도로 큰 호통을 쳤다.

“잡아랏!”

호통과 함께 넷이 오소민에게, 역장이라는 복면인이 직접 해원기를 덮쳤다.

암침이 또 기척도 없이 쏟아지고, 뽑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새까만 날붙이가 공간을 찢어발긴다.

맹렬하고 지독한 습격인데도 파공성 하나 들리지 않는다.

네 명이 작심하고 던진 암침은 이미 수십 개. 오소민의 전신 요혈뿐 아니라 피할 공간까지 미리 꽂혀가고, 허리춤에서 뽑은 새까만 칼이 상하좌우를 전부 베어 들었다.

보통 칼보다 폭은 한 치나 좁고 길이도 더 짧은 기형도(奇形刀) 네 자루다. 암침을 피하거나 쳐내려고 하다간 기형도에 사지가 잘려나갈 터.

그러나 오소민의 입꼬리가 휘어지며 비웃음이 새어 나왔고.

“힛.”

불룩해진 저고리 소매, 두 손은 꽃을 꺾듯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잘 보이지도 않는 암침들이 회오리바람을 만난 낙엽처럼 소매에 감겨들고,

찌르릉.

쇳소리를 부챗살처럼 퍼뜨리는 두 손이 곧장 네 자루의 기형도를 마주 후려쳤다.

맨손으로 칼을. 두 손으로 네 자루를.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챙챙, 따당.

자신들이 던진 암침 무더기에 막힌 칼은 파편을 뒤집어쓰고, 맨손에 직접 부딪힌 칼은 옥판을 때린 것 같은 맑은 소리를 울린다.

“허엇!”

“윽.”

암침에 당한 둘이 헛바람을 토하며 떨쳐내느라 바쁘지만, 실제로 충격을 더 받은 건 옥판을 때린 듯한 나머지 둘. 칼을 타고 전해지는 힘줄기에 진저리를 치며 물러서자.

덮쳐오던 넷을 한 수에 밀어낸 오소민이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쓰벌, 이 지저분한 도기(刀氣)는 뭐야? 다 풀어지잖아.”

수십 개의 암침을 먼저 소녀염화로 제어한 후, 철선(鐵扇)의 기예로 뒤집었고 옥판(玉板)의 맨손으로 칼을 때렸다.

그 중심에는 미리 깔아둔 사실보허(瀉實補虛)의 내공, 네 자루의 칼에 맺힌 독한 기운이 더 강해져 돌아가야 하는데.

어째 신통치 않다.

복면인 넷이 펼치는 도기의 내력을 모르겠다.

역장이라는 자, 복면인의 우두머리 역시 기형의 병기를 쓴다.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기세 그대로 해원기의 정수리를 쪼개려는 건 바로 검. 허나 길이가 겨우 두 자를 조금 넘는 짧은 검이다.

그런데도.

쉬이잉.

다른 복면인들과 달리 매서운 검풍을 이끌고, 검극에는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한 자 가까운 기운이 뿜어 나와서.

검이 이르기도 전에 두 쪽이 날 것 같다.

해원기의 깊은 눈에 슬쩍 푸른빛이 맺히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지만, 상대의 검기(劍氣)를 본 순간에 흥미가 일었다.

검극에서 한 자 가까이 뿜어지는 기운. 형태를 갖춘 성형검기(成形劍氣)를 몇 년 만에 접하는지.

네 개의 손가락, 사지태백이 정면으로 역장의 검과 마주쳤다.

쩡!

사지태백은 오행(五行) 중의 금(金). 가장 단단하고 가장 예리하다.

쇳덩이를 망치로 때린 듯.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역장의 기형검이 홱 뒤집히더니 홀연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역장은 이미 성형검기의 일격으로 끝날 상대가 아니라고 짐작했었다.

수도와 같은 맨손으로 막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준비한 다음 수로 바꾸었다.

슈슈슈.

본래 짧은 기형검이 돌연 다섯 자루로 변해 해원기의 목, 어깨, 가슴과 배를 찌른다. 무서운 속도에 성형검기가 화살처럼 꽂히는데.

“호오.”

해원기가 짧게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폈다. 아무리 빨라도 손가락 하나가 나머지 넷에 붙는 속도에 비하랴.

그 짧은 순간, 성형검기 다섯 줄기가 얼핏 얼어붙는 듯 보인 건 착각일 터. 돌연 전신이 밧줄에 얽힌 것처럼 둔해지는 감각에, 깜짝 놀란 역장의 두 눈이 하얗게 변했다.

화염이 섬광으로 폭발해 눈이 멀 것 같다.

펑!

“크윽.”

역장이 기형검을 내던지고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손목에 감은 천을 풀지 않아 십대검상(十大劍相)을 꺼낼 순 없어도.

일지광한, 이지무성, 삼지화정에 이은 사지태백. 검왕수를 이루는 기수식(起手式)의 연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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