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덕주배계(德州扒鷄) (3)
다른 방파의 기밀을 듣는 건 실례.
잠시 주방으로 피해주었던 해원기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오소민이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열심히 먹고 마시던 배계와 술그릇은 놔둔 채.
“좋지 않은 소식입니까?”
“음. 뭐 못할 얘기도 아니니까. 해형, 앉지.”
딱히 숨길 부분이 없어서 해원기가 앉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말과 마차는 찾았어. 덕주에서 가장 큰 차행(車行)인 안덕차행(安德車行) 소속으로 바뀌어 있다더군. 그런데 문제가 있어.”
차행은 말과 마차를 빌려주는 업종. 교통의 요지, 상업의 발달 덕에 큰 차행은 쉬 부를 쌓았고, 많은 인원 덕에 지역에서는 꽤 힘을 쓴다.
해원기가 묵묵히 듣자.
“아까 얼핏 얘기했는데. 차역(車役)도 원래는 하오문에 속하지만 이런 큰 차행은 흑도로 변하는 경우가 생겼어. 돈푼 좀 만지고 떨거지들이 많아지니까 이것도 권력이란 거지. 쳇. 그래서 우리 쪽이 찾기는 했지만. 쯧.”
오소민이 혀를 차며 말문을 닫았다.
하오문에도 흑백의 구분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어딘들 다를까.
해원기가 오소민이 말하는 문제가 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렵군요.”
“그나마 같은 업종이라고 가르쳐준 거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누구랑 거래했는지, 지금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몰라. 그래서…….”
이걸로 끝낼 리가 있나.
말을 끌면서 씩 웃은 오소민, 팔짱을 풀고 뜯다 만 닭 다리를 들어 올렸다.
“직접 가서 물어보기로 했어. 동의하지?”
“물론입니다. 안덕차행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누구한테 물어보려고?
오소민은 아무렇지 않게 닭 다리에서 살점을 쭉 훑어냈다.
“해형은 우리 방주 사형이 왜 하오문을 보호하려는 결심을 했는지 모르지. 이번에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야.”
뭔가 신비한 척. 그러면서 날름 고기를 입에 넣었다.
개방이 십 년 전에 하오문과 손을 잡은 건 아직 강호의 비밀. 그 이유까지 알 수 있다니.
그러나 그 사실보다.
해원기는 오소민의 술그릇을 먼저 채워야 했다.
전령전을 핑계로 했지만 처음에 오소민이 동행을 자청한 건 해원기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
허나 지금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선다.
짧은 시간 서로 맺어진 신뢰만이 아니라,
옳은 일에는 어떤 곤란도 마다하지 않기에.
서문에서 남문으로. 오래된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오소민이 불룩한 배를 문질렀다.
“배계 한 마리에 술 한 근. 둘이서 나눠 먹었는데 왜 이렇게 배불러. 닭이 아니라 오린가?”
여전히 입을 쉬지 않는 통에 해원기가 할 수 없이 말을 받아줬다.
“그 한 마리를 거의 다 먹었잖습니까. 날개 하나 남겨준 게 고마울 따름. 오형은 체구도 크지 않으면서 잘도 들어갑디다. 고패춘 반 근도 적은 양이 아닌데.”
“흥, 덩치 크다고 먹성도 좋나? 원래 거지는 좋은 음식 있을 때 왕창 먹어놔야 하는 거야. 그리고 술은 해형이 더 많이 마셨잖아. 취하지도 않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사부와 숙부에게 배웠거든요, 술은 함부로 마시는 게 아니라고.”
“숙부?”
오소민이 궁금한 얼굴을 보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사이. 해원기의 정체를 밝혀보겠다고 머리를 쓰기만 했지 진짜 신세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형은 가족이 어떻게 되나?”
어디 출신이고 어느 집안인지부터 묻는 게 보통사람들이 사귀는 시작.
“고아입니다. 사부가 거두어주셨지요.”
“에? 그럼 숙부는…….”
“사부님의 하나뿐인 의제(義弟)가 되십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분.”
사부가 아들처럼 대했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오소민이 배를 문지르던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나도 고아인데. 뛰어난 사람들은 비슷하구먼. 아, 나는 지켜주는 숙부는 없고.”
물어봤자 별로 알 게 없다.
강호에서 무인으로 사는 이. 보통사람들과 같을까.
그런데.
“내가 어디의 누구인지가 뭐 중요할까요. 오형이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오형은 의기 넘치는 사람, 나는 오형을 믿습니다.”
대답만 해주던 해원기가 불쑥 건네는 말에.
오소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거참. 낯부끄럽게스리. 나도, 음, 해형은, 음. 믿지… 에이!”
더듬더듬. 어색한 표현은 영 어울리지 않아서, 기름 범벅이 된 소매로 해원기의 어깨를 툭 친다.
“해형은 재미있는 친구야.”
해원기가 할 소리를 거꾸로 자신이 하고선 얼른 앞서 나가는 오소민의 행동에,
해원기가 빙긋 웃었다.
어둠이 내리고 여기저기 불을 밝히는 시각, 남문 밖으로 또 하나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둘이서 이제부터 안덕차행을 방문할 셈이다.
개방의 방주, 협심개가 십 년 전에 왜 하오문을 보호하기로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하나의 성벽. 그건 수십 대의 마차와 목책으로 만든 거대한 마구간, 그리고 족히 백여 대는 될 듯한 수레들이 둘러쳐 이룬 형상이었고,
정면에는 삼 장 가까운 높이의 문루까지 세워져서 작은 성이라고 불러도 될 만했다.
오소민이 문루를 손가락질하며 코웃음을 쳤다.
“흐흥, 저걸 보라고. 웬만한 장보(莊堡)에도 저렇게 큰 문루는 안 세워, 저건 거의 마을 입구에나 세우는 패루(牌樓) 같잖아. 덕주 남문 밖에 떡하니 저런 걸 세운 심산은 뻔하지. 어째서 썩어빠진 놈들은 이렇게 위세를 보이고 싶어 할까?”
“문루나 패루 모두 함부로 세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관아에서 감히 건들지 못한다는 거겠죠.”
“뇌물을 잔뜩 먹였을 테니까. 야아, 이 엉터리 성문을 지키는 졸병들이 저기 있네.”
문루 아래, 화톳불 주위로 십여 명이 보인다.
모두가 앞뒤가 다른 천으로 된 마부 복장, 손에는 기다란 몽둥이들을 들었고 허리에는 짧은 채찍. 이제 막 불을 피우기 시작해서 단박에 눈에 뜨이고.
이들을 발견한 오소민이 반가움을 표하며 성큼성큼 다가간다.
“뭐야?”
“누구…….”
“이 시간에 누가?”
안덕차행도 위탁을 받는 장소는 따로 성안에 두었기에, 이 시간에 직접 이곳을 찾을 이는 없지만.
워낙 출중한 외모를 지닌 귀공자라 입구를 지키는 자들이 다 어정쩡해졌다.
“안녕들 해? 행수(行首)는 안에 있지?”
더구나 대뜸 반말로 우두머리를 찾으니.
서로 눈치를 보다가 그중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저, 뉘신지. 행수 어른과 미리 약속을 하셨나요? 그럼 관사(管事)가 미리 일러주는데?”
준수한 귀공자가 서슴없이 대하는 바람에 살짝 주눅이 들었고.
오소민은 더욱 환해진 얼굴을 해원기에게 돌렸다.
“다들 있는 모양이야. 우스꽝스러운 문루도 눈에 거슬리고, 말똥 냄새 가득한 곳에 발을 들이기도 싫고. 모두 나오라고 할까?”
답을 듣고자 묻는 게 아니다.
그 자리에서 쿵, 하고 발을 굴러 훌쩍 뛰어오르더니 한 손을 풍차 돌리듯 휘둘렀다.
옥처럼 맑아진 손에 어린 쇠처럼 굳은 기운.
쾅.
엄청난 폭음이 울리고,
높다랗게 세워진 문루가 두 쪽이 나면서 양쪽의 기둥까지 넘어갔다.
“우에엑.”
“뭐, 뭐 하는!”
“적이다! 도적이야!”
정문을 지키던 마부들은 기겁할 노릇. 비명을 올리고, 소리를 지르고. 나뒹굴고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몽둥이에다 채찍을 들고. 말을 모는 마차에서 며칠을 보내는 게 생활이니 근력과 오기가 남 못지않겠지만. 다들 강호를 돌아본 이들, 새처럼 날아올라 거창한 문루를 박살 내는 사람은 멀찍이 피하는 게 상수. 무림인이다.
폭음과 비명. 정문의 소란이 시작되기 무섭게 안덕차행의 곳곳에 연달아 등이 밝혀지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이 돌연한 광경에 해원기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안덕차행을 직접 방문한다더니 이 무슨 폭거인가. 사람을 불러낸다면서 대뜸 대문부터 부수면.
그러나 오소민의 거친 행동보다 차행 안에서 날카롭게 나오는 외침에 해원기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떤 친구가 길(道)을 헷갈렸나!”
내공을 품고 화살처럼 귀에 꽂히는 소리, 그리고 흑도에서 자기 구역을 알리려고 흔히 쓰는 말투.
차행의 마부가 아니다.
아직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진 않았지만, 수십 개의 등과 횃불이 거의 동시에 올라와서 차행 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아무리 크다 해도 일개 차행으로 여기기 어려운 대응.
몰려나온 인원이 거의 백은 될 듯하지만, 마차로 이루어진 성벽 안의 넓은 공터로는 한 명도 내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세 사람. 똑같이 평범한 청삼을 걸쳤지만, 가운데의 키가 큰 인물만이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유건(儒巾)을 얹었다.
얇은 눈매, 뾰족한 코와 턱, 세 가닥으로 뻗친 수염까지 송곳에다 옷을 입혀놓은 것 같은 인물.
얇은 눈매에서 차가운 빛이 정문 쪽을 향하고 작은 입에서 또 날카로운 음성이 나왔다.
“안덕차행이 누구 집 마당인지는 알고 문을 두드렸을까, 아니면 노란 솜털이 가슴팍에 아직 남아 호구(虎口)인 줄도 몰랐을까? 앞에는 무슨 글자를 쓰고 뒤에는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 썩 아뢰보아라!”
어지간히 귀를 찌르는 듣기 싫은 목소리요, 이 또한 흑도의 인물들이 자주 쓰는 흑화(黑話)다.
서로 아는 처지로 시비를 걸려는 거냐, 아니면 뭣도 모르면서 달려든 거냐? 별호와 이름을 우선 대라는 뜻.
부서진 문루 조각을 떡하니 밟고 선 오소민이 피식 웃었다.
“후훗, 이렇게 촌스런 흑화는 또 오랜만이네. 해형, 알아듣겠어?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고리고리짝 흑화를 쓰는 걸까?”
남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조롱부터 시작한다.
오소민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고리고리짝’이라니. 흑화에 못잖은 속된 표현이라 해원기가 속으로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청삼을 걸친 셋 모두 무공을 익혔고, 가운데 유건을 얹은 자는 꽤 실력이 있어 보인다.
해원기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오소민이 눈을 찡긋하곤,
“야! 본 공자 앞에서 감히 주둥이를 놀리는 게 누구냐? 네놈부터 조상팔대 족보를 아뢰보아라!”
고스란히 상대 말투를 흉내 내는 낭랑한 음성. 그리 크지 않은데도 공터를 비추는 불빛 전부가 흔들리고 청삼인 세 명의 옷자락이 펄럭거리자.
유건을 쓴 송곳의 얇은 눈매가 예리하게 빛났다.
오소민이 일부러 드러낸 기세.
저속한 언행을 보이는 준수한 귀공자가 쉽지 않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예리하게 빛나는 눈매가 다시 한번 오소민을 훑고,
“목적이 있어 왔군. 공가(公家)는 아니고, 황하문으로 보이지도 않고. 흠, 설마 요즘 희한한 소문으로 들리던 낙척문사(落拓文士)일까? 뭐가 됐든 일단은 그 실력을 알아봐야겠지. 총관과 관사가 시험해보게.”
한결 낮아진 목소리. 여전히 귀에 거슬린 목소리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우의 청삼인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내가 안덕차행의 총관…….”
좌측의 청삼인부터 주먹을 움켜쥐고 입을 여는데.
“놀고 있네!”
오소민이 밟고 있던 문루 조각을 두 발로 차며 벼락같이 덮쳐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상대의 내력을 더듬어보고, 기세를 겨루고, 실제로 손을 섞는. 그런 정상적인 비무?
이따위 한심한 작자들과 그럴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퍼퍽.
날아드는 문루 조각을 주먹질로 박살 낼 실력들이지만, 곧장 눈앞에 다가드는 두 손은 생각지도 못했을 터. 총관의 눈앞에는 종잡을 수 없이 현란한 손 그림자가 가득하고, 관사의 가슴팍엔 쇳덩어리 같은 일장이 꽂혔다.
우득, 펑.
“으악!”
비명이라도 지른 이는 양쪽 어깨가 한꺼번에 부러져나간 총관. 관사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굴러가서 뻗어버렸다.
오소민이 손바닥을 털며 환하게 웃었다.
“하하, 총관과 관사를 부렸으니. 네가 차행의 행수가 틀림없구나. 간단하네.”
유건을 쓴 송곳 청삼인, 안덕차행 행수의 뾰족한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