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덕주배계(德州扒鷄) (2)
“거창한 행렬이 지나간 건 확실해. 언덕배기 아래쪽에 마차가 머물렀던 흔적도 있고. 그런데 아무것도 없어.”
“말도, 마차도. 심지어 핏자국까지. 하지만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맞아. 과하지. 이쪽이 계속 가물긴 했어도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마른 풀에 절로 불이 붙을 리 없고.”
“겁표가 어두워질 때였으니 불을 피우지도 않았을 터. 그런데도 풀이 탄 자국이 있으니.”
“그럼 답은 하나지 뭐.”
관도에서 벗어나 비스듬히 언덕을 내려오던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한 약을 써서.”
“흔적이 될 만한 걸 다 지웠다. 치밀한 놈들이야.”
두 사람이 발견한 건 단지 바닥에 어지러운 발자국과 말발굽, 그리고 바퀴 자국뿐. 그러나 언덕배기 아래쪽에서 불에 그슬린 것 같은 마른 풀을 놓치지 않았다.
오소민이 잠깐 뭔가를 생각하다가 표정을 바꾸었다.
“현장은 봤고. 슬슬 배가 고프구먼. 가깝다며. 얼마나 걸려?”
해원기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가깝습니다. 서문역참(西門驛站)의 바로 옆이거든요.”
“소계랑 뭐가 다른데? 오향에 탈골은 알겠지만 배계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배(扒)라는 글자는 빼거나 뽑는다는 뜻. 나쁜 의미로도 자주 쓰여서 소매치기를 배수(扒手)라고도 한다.
기루에서 요리를 빼돌리던 오소민으로서도 처음 듣는 요리 이름.
“본래 소계에서 나온 겁니다. 가 씨 성의 주인이 오랫동안 운영하던 가소계(賈燒鷄)라는 점포에서, 어느 날 주인이 잠깐 외출을 갔다 오면서 불 줄이는 걸 잊는 통에 소계가 과하게 익었더랍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더욱 맛있고 먹기 편한 소계가 탄생했고, 연구를 거듭해서 마침내 오향탈골배계가 되었다죠.”
“우연의 결과였군. 재밌네, 해형은 어떻게 알았어?”
“역참 옆이잖습니까. 제 직업을 잊었습니까?”
“흥.”
또 코웃음. 역참 옆에는 작은 일거리라도 걸릴까 하고 어정대는 쾌체들이 많은 법. 그래도 해원기가 장거리 쾌체라는 건 믿을 수 없다.
새로운 요리를 접한다는 즐거움에 욕설을 참고,
“해형은 왜 자신을 감추는 거야? 이름을 날리고도 남을 실력이면서.”
곧장 궁금한 걸 묻자,
이번에는 해원기가 피식 웃었다.
“오형이 물으니까 이상합니다. 오형이야말로 신비의 순행장로면서. 집집마다 읽기 어려운 불경 한 권씩은 있는 법이지요.”
밝히기 어려운 각자의 사정이란 속담.
“흐흥, 글쎄.”
오소민이 어물쩍 답하는 걸로 입을 닫았다.
그 역시 화제를 계속 진행하는 건 불편하기에.
두 사람 모두 몸이 가벼워 굳이 경공을 쓰지 않고도 벌써 서문역참이 보이기 시작한다.
“호오. 이건 좋구먼.”
오소민이 감탄과 함께 손가락을 쪽 빨았다.
해원기가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든 말든, 주방까지 따라 들어가든 말든.
오직 관심은 큰 접시에 담겨 나온 닭 한 마리. 짙은 황금색에 양념 국물이 윤기를 흘리고, 피어오르는 김을 따라 구수한 향기가 코를 간질이니.
기다릴 오소민이 아니다. 당장 손으로 찢기 시작했는데, 들었던 대로 따뜻한 살점이 손쉽게 뼈와 분리되고, 향기는 더욱 짙어진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만으로도 기막힌 맛, 손에 잡히는 대로 닭고기를 입에다 욱여넣을 수밖에.
“허어!”
해원기가 돌아와 탄성을 울렸건만 머리도 들지 않는다.
순식간에 거의 절반이나 사라진 닭고기.
“진밀세, 진미. 쩝쩝. 어쩌면 이렇게 야들야들, 쩝. 간도 딱 맞아. 쩝쩝.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아예 머리를 접시에 담글 기세로 고기를 씹으며 웅얼대니.
며칠 굶은 거지 같은 귀공자의 모습에 황당하지만.
해원기는 버릇대로 꼬박꼬박 대답해준다.
“당분을 입혀 볶은 다음에 잘 식히고, 센 불로 기름에 칠성(七成) 정도 튀깁니다. 그 다음에 간장과 생강 등을 넣어서 처음엔 센 불로 끓이고 나중에 약한 불로 고아내죠. 꽤 시간이 걸리는 요리라. 음, 그렇게 맛있습니까?”
“끅.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끄윽.”
급하게 먹어댔으니 감탄사를 의문사로 알아들었다고 투정하는 중에 트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오소민이 그제야 머리를 들고 급한 손짓을 했다.
“안 되겠어. 그냥 먹기 아까워서. 술, 술, 고패춘(古貝春) 독한 거 있음 하나 내오라고 해. 어, 같이 한잔하세.”
얻어먹는 주제에 술까지 찾는 배짱. 입 주위가 온통 기름투성이라 해원기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하, 옳습니다. 배계는 독한 술과 딱 맞는 안주지요.”
해원기가 점소이라도 된 듯, 크게 웃어젖히곤 직접 술을 가지러 가자.
오소민이 고급의 저고리 소매를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쓱쓱 닦았다.
“어차피 외상으로 먹는 거라면 매상이나 잔뜩 올려주는 게 좋잖아.”
둥그런 술 단지를 들고 다가오던 해원기가 고소를 지었다.
“다 들었을 줄 알았습니다. 얼마 전에 지출이 좀 생겨서 주머니가 가벼워졌죠. 여기 주인에게 요리를 배운 사이라서 빈손으로 한턱내려면 이곳밖에 없었거든요.”
주르륵.
밥이나 면을 담는 공기에다 술을 따른다.
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것 같던 오소민, 기경(機警)한 그가 해원기가 왜 주방 안에 들어갔는지 신경을 쓰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나절의 동행이지만 서로를 아는 데에는 충분하다.
공기 가득 따른 술,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까지 두 벌 나누어 오소민에게 놓아주고서야 해원기가 자리에 앉았다.
“들어오기 전에 지저분하다고 욕하던 그 사람. 역참에 말먹이를 대는 노역(勞役)일 텐데, 그 사람도 하오문입니까?”
“눈치도 빠르네. 우선 목부터 축이자고.”
피장파장. 오소민 역시 놀라지 않고 선뜻 술그릇을 들었다.
틱.
질박한 공기끼리 맞부딪치는 둔한 소리.
“믿어줘서.”
“고맙다고? 알아.”
해원기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기에.
오소민이 대뜸 말을 자르고선 그대로 쭉 들이켜니, 해원기도 빙긋 웃는 입으로 술그릇을 기울였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던가. 여기까지 오면서 신뢰가 생긴 사람은 해원기 혼자만이 아니다.
“크으으. 고패춘은 산동 술답지 않게 부드러우면서도 독하단 말이야. 진진유미(津津有味)한 이 배계와는 참 잘 어울려.”
배계는 단맛과 짠맛을 중심으로 쌉싸름한 뒷맛에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이 어우러진 훌륭한 풍미. 오소민이 문자까지 써서 극찬하자, 해원기도 술그릇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패는 면화(棉花)의 옛말이죠. 혼자서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해형은 생긴 거와 달리 박식하군. 고패가 면화라는 건 처음 알았어. 뭐, 술이란 혼자 마실 게 아니니까. 그럼.”
오소민이 술그릇을 놓고 얼굴을 고쳤다.
욕설과 장난기를 거두면 늠름한 미남자. 두 눈이 샛별처럼 빛난다.
“아까 독한 약을 쓴 흔적을 봤지. 죽은 사람들이야 어떻게 처리했다고 해도 말과 마차는 그렇게 간단히 없애기 어려워. 찾기 어렵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말을 죽여 고기로 팔고, 마차는 부순다? 엄청 번거로운 일. 그렇다면.”
일부러 말을 끊는 건 굳이 다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다. ‘바부탱이’가 뻔히 알아들을 테니까.
“과연. 말과 마차를 고스란히 둔갑시키는 게 빠르군요.”
공교롭게 배계를 역참 옆 가게에서 먹게 되었을 뿐. 오소민은 진즉 거기까지 추측한 거다.
“덕주는 도로가 사통팔달, 운하까지 있어서 번화한 곳. 토박이 못잖게 외지인들의 왕래가 많아. 네 곳의 역참과 부둣가 쪽은 항상 마차가 돌아다니니까 슬쩍 끼워 넣으면 끝이지. 그래도 전문가라면 다른 점을 구분할 수 있을 거야.”
“말을 관리하는 노역이나 오래 마차를 몰아본 마부.”
“응. 저녁때가 되면 끼니를 때우려고 일을 쉬니까 꼼꼼히 살필 테고. 우리는 결과가 올 때까지 술이나 마시는 거지.”
얘기를 마친 오소민이 다시 술잔을 드는 걸 보면서.
해원기가 새삼 개방의 정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다.
과거에 몇 차례나 큰 피해를 입어 하마터면 와해될 뻔했고, 그래서 고유의 소식통도 힘을 잃었다고 알려졌지만.
그냥 세월만 보내지 않았다. 하오문을 품는 결단은 십 년 동안 개방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해원기가 전령전을 사용한 건 참으로 탁월한 결정인 셈.
오소민이 멈칫 술그릇을 입에서 떼었다.
“가만. 그럼 해형은 이 훌륭한 요리를 배워서 술도 없이 혼자서 만들어 먹었다는 얘긴데. 친구도 없나?”
별빛 같던 눈동자가 한심함으로 바뀌어서.
해원기가 생각을 멈추고 자신의 술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친구라.”
하오문에 부탁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는 시간을 보내야 하니, 오소민이 화제를 새로 찾은 것이고, 이왕이면 해원기를 놀려댈 심산.
그 화제가 하필 ‘친구’다.
해원기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수(雨水)가 지났을까. 얼마 남지 않았네.”
뜬금없는 혼잣말. 해원기가 반말을 하는 경우가 혼잣말이란 걸 아는 오소민이 미간을 모았다. 혼자서 요리나 배우고 술과 더불어 먹을 생각도 못 했다면서 친구라는 얘기에 혼잣말이라.
비밀투성이인 이 친구에게 또 무슨 사연이 있을까.
“요맘때지. 우수가 지나면 약속이 있나?”
말을 받아주자 해원기가 술그릇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약속. 약속이겠군요. 경칩(驚蟄)과 춘분(春分) 사이엔 꼭 만나는, 음, 친구라고 해도 될, 그런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표현이 영 어색하다.
약속이면 약속, 친구면 친구지. 어정쩡한 소리만 해서.
오소민이 거꾸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경칩과 춘분 사이에 만나? 그럼 사람이 아니라 겨울잠 자는 동물인감? 신상과 관계된 얘기면 그렇게 꼭 얼렁뚱땅 넘어가야 하나? 이런 쓰.”
욕을 억지로 참는 티가 팍팍 나서 해원기가 계면쩍은 표정이 되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저도 잊고 있다가. 일 년에 한 번밖에 만나지 않으니까요. 오형을 알게 된 것보다 더 기묘한 인연이라.”
“엥? 나보다 더 기묘하다고? 누군데?”
묘하게 경쟁심이 드나 보다. 다그쳐 묻는 말에 해원기가 히죽 웃으며 술그릇부터 기울였다.
“어이, 어이.”
뻔히 일부러 그러는 걸 알면서도 조바심을 내는 오소민.
화끈한 술기운을 느끼면서 해원기가 즐거워졌다.
오소민 덕에 생각난 인연. 친구라고 해도 될지 의심스러운 친구.
그 친구가 앞에 앉은 오소민과는 정반대라는 걸 떠올리면서.
오 년 전. 봄이 시작될 때에 태산(泰山)에서 마주쳤다.
황신 대비를 황하문에 알리는 김에 태산에도 들른 것. 구경보다는 예전에 사부에게 들은 계곡의 상황을 살피려는 게 목적이었다. 장독(瘴毒)이 생기기 쉬운 특이한 지형이라 몇 년 만에 다시 확인하려고.
그런데 그 몇 년 사이에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몇 길이나 쌓였던 부엽토(腐葉土)가 말끔히 사라졌고 계곡에는 맑은 개울이 흐르는 변화. 이 변화는 음습했던 동굴을 다듬어 거처로 삼은 한 사내에 의해서였고.
얼굴을 다 가린 머리칼과 덥수룩한 수염 탓에 처음엔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사는 야인(野人)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넝마와 다름없는 낡은 가죽 한 장으로 몸을 가렸고, 당최 말을 하지 않아서.
해원기가 열심히 말을 걸어도 그저 고갯짓과 음, 하는 짧은 소리뿐. 해원기의 출현에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자기 할 일만 한다.
그 할 일이 또 묘했다. 돌을 깎고 다듬어 모양을 만드는 일.
정방형, 장방형, 둥근 것, 모난 것. 각양각색의 형태에 크기도 가지가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것에서부터 탁자보다 더 큰 것도 있었다. 더구나 개중에는 갖가지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것까지 보이니.
석공(石工)이 도를 닦나? 하고 여길 정도.
나중에 가서야 태산에 오기 전엔 동해 바닷가의 노산(嶗山)에서 같은 일을 했다는 걸 알았다.
“당최 말을 하지 않았다면서. 그걸 어떻게 알았대?”
오소민이 열심히 먹고 마시며 얘기를 듣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기보다 더 기묘한 인연이라는 해원기의 친구. 그 설명에 어폐가 있다.
“아, 나중에는 말을 하더군요. 그런데 그것도 지극히 간단해서. 하루에 열 마디도 안 할걸요. 그렇게 과묵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별종이네. 그래, 석공이야, 수도하는 괴짜야?”
“그게.”
해원기가 하려던 말을 접었고, 오소민도 다시 입가를 닦았다.
발소리 하나가 점포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챙이 넓은 납작한 모자, 앞뒤가 다른 천으로 만든 겉옷, 어깨는 펑퍼짐하고 팔목은 좁은 소매. 전형적인 마부의 차림새를 한 중년 남자. 기다렸던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