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박대정심(博大精深) (4)
확실히 오소민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양곡현에서 묘지촌을 설명할 때도 그랬지만, 덕주가 현재 어떤 관아에 속해있는지 정확히 알고 지리에도 밝다.
강호의 인물은 대부분 관(官)에 어두운 편.
우물물과 강물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정하불상침(井河不相侵)의 오래된 관례가 이미 흐려진 지 오래요, 무인 중에 조정과 결탁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자가 차츰 늘어나고, 조정 역시 이들을 주구로 삼아 강호에 간섭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무림은 세속의 권력을 경시하는 경향이 짙어서 왕법(王法)과 관제(官制)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소민은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사는 거지임에도.
젊은 나이, 저속한 언사와 제멋대로의 행동에도 과연 개방의 순행장로답다고 할까.
해원기가 길 가운데 서서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요성 안을 잠깐 돌아본다던 오소민이 멀리서 빠르게 다가왔다.
그 경공도 매우 뛰어나서 한 시진이 넘도록 달렸는데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훌륭한 무공. 그런데 왜 천박함을 자처할까?’
강유를 겸한 손속과 지구력을 갖춘 경공은 모두 견실한 근기(根基)를 바탕으로 한다. 내공만 깊은 게 아니라 그 내공을 단단하게 쌓아 올릴 심성을 갖추어야 견실한 근기를 갖추는 법. 그런 공부를 익힌 이가 수양이 낮을 리가 없으니 오소민의 언행은 모두 뭔가를 감추기 위한 방편일 터.
“해형, 이거 이상한데.”
오소민이 해원기의 바로 앞에 멈추며 잘생긴 얼굴을 찡그렸다.
양곡현에서 덕주까지 세 시진이라고 했으니 이제 절반쯤 온 셈, 점심을 거르고 직행한다더니 굳이 자신만 요성을 들렀다 와서는 찜찜한 기색이고.
“여기 요성도 작은 고을은 아니야. 덕주에서 사고가 생겼다면 소문 정도는 금방 전해지지. 헌데 사고는커녕.”
말을 이어가며 쳐다보는 시선에 의혹이 충만하다.
“환관의 낙향이란 소식도 몰라. 제남부가 영접을 했다면 이쪽의 관병도 어느 정도는 징발되어야 맞거든. 해형이 잘못 아는 거 아냐?”
제남부는 승선포정사사가 설치된 산동의 중심, 그 제남부가 연도(沿道)의 관병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 덕주와 가까운 요성은 당연히 먼저 징발되어야 정상이고.
관병이 징발되면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짧은 시간에 요성 안을 훑고 온 오소민이 해원기에게 의혹을 보이는 건, 그만큼 그가 관아의 관행을 잘 알고 있기 때문.
해원기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정말입니까?”
왕 포쾌로부터 얻은 정보와는 전혀 다르지만, 오소민이 엉뚱한 소리를 할 까닭이 없다.
일부러 해원기의 동행을 자처하고 나섰는데.
오소민의 눈이 대뜸 도끼로 변했다.
“뭐야. 기껏 신비의 순행장로가 그 신비를 포기하면서까지 알아온 거라고.”
남은 툭하면 의심하는 주제에 자신을 의심하는 건 참지 않는 성격.
해원기가 얼른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오형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음.”
손가락 하나가 스르르 올라가 눈썹을 미는 모습에 성질을 내려던 오소민이 묘한 느낌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아주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 가물거리는 기억 때문인데.
해원기의 눈은 더욱 깊이 가라앉는다.
“혹시 오형이 어디서 이 정보를 구했는지, 또 어느 선까지 닿을 수 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잠깐 멍했던 오소민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개방의 정보망은 당연히 거지로 구성된다. 이게 강호의 정설.
그도 그럴 것이 거지란 언제 어느 곳에나 있고, 바로 곁에 두고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서 다양한 소문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 개방의 순행장로가 가져온 정보의 원천과 그 범위를 밝혀라?
요거 상당히 위험한 요청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소민이 화를 내기보다 잘생긴 얼굴을 얼른 풀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흐응. 해형은 참 곤란한 사람이구먼.”
아무 때나 욕설을 섞던 말도 은근하게 변했다.
“개방 소식통의 깊은 내막과 장로급 이상이 접하는 수준을 알고 싶다면 방주의 허가가 있어야 하지. 아무리 전령전을 가져왔다고 해도 말이야. 흐흥.”
코에서 웃음이 자꾸 새어 나오는 걸 해원기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해원기 자신이 무리한 요청인 걸 알고 있었지만, 오소민은 뭔가 못된 장난이라도 생각난 양.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서. 호법장로의 보증이나 장로급 인사 둘 이상이 동의가 있으면 임시로 방주의 허가로 인정할 수가 있거든. 아무리 거지들끼리 모인 데라도 역사와 전통의 거대방파, 외부에 함부로 밝힐 수 없는 비밀은 있는 법이라고. 그래서…….”
두 눈을 빛내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어째.
“해형이 가져온 전령전.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 좀 설명해주고. 에, 그것만 갖고는 부족하려나? 그럼 본 공자, 신비의 순행장로에게 지금 덕주로 가는 이 일에 관해 모조리 다 털어놓는 건 어떨까?”
흥정에 익숙한 장사꾼 같다.
신중하게 눈썹을 문지르던 해원기의 손가락이 툭 떨어지고,
오소민을 보는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아하, 이런 속셈이었구나.
“물론 외부인이 함부로 개방의 기밀을 알아서는 안 되죠. 그렇지만 단지 오형이 요성에서 누구에게 정보를 얻었는지를 알고자 한 건데. 흠, 두 가지 요구는 과하지 않습니까?”
“엥? 뭔 소리래. ‘단지’라니? 단지는 무슨 꿀단지야 술단지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거늘, 입도 멀쩡한 친구가. 이 쓰…그리고 전령전으로 먼저 요청한 게 두 가지잖아. 공평하구먼. 공평해.”
“그렇군요. 이건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더 들었다간 또 욕이 나올 것 같다.
해원기가 깨끗하게 승복하고 오소민의 반짝이는 눈을 똑바로 보았다.
심연(深淵). 평소의 깊은 호수와 같은 해원기의 두 눈이 마치 심해(深海)와 같이 변했다.
밤하늘에 뜬 별처럼 빛나는 오소민의 두 눈.
성광(星光)이 고스란히 바다 위에 비치니, 불평을 늘어놓던 오소민의 입도 닫혔고.
해원기가 차분히 말을 건넨다.
“첫 번째, 전령전에 관해선 확실히 녹림에서 전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녹림장관은 아닙니다. 당세의 녹림장관이 생기기 이전, 대부분의 녹림이 그저 하찮은 산적 떼에 불과했던 시절에. 귀방의 호법장로가 내준 것이죠.”
해원기의 심해와 같은 눈에 기가 죽긴 했어도 오소민이 가만히 듣기만 하겠나.
“왜 줬대?”
“모르죠. 그거야 귀방의 호법장로께…….”
“아니, 아니. 녹림이 왜 해형에게 줬냐고?”
“그게…….”
“왜? 왜?”
오소민의 얼굴이 부딪칠 듯 다가왔다.
양곡현에서부터 여기까지 동행하면서 해원기가 말을 끄는 걸 보지 못했기에 더욱 다그치는 재미가 있다.
별을 비추던 심해도 흔들리고, 해원기가 멋쩍게 대답했다.
“귀여워졌다고. 기특하다고 줬습니다.”
“쿨럭.”
오소민이 급하게 사레가 걸려 고개를 돌렸다가.
“푸하하하하, 켁, 켁.”
폭소에 기침에.
해원기가 난감해서 눈만 껌뻑거렸다. 길바닥에서 이게 뭔 일이람.
“와. 이거 정말. 거짓은 아닌 듯한데 믿기도 어렵고. 해형이 귀엽고 기특하다라. 큭.”
겨우 멈춘 웃음이 또 터질 뻔했다.
개방의 호법장로인 취개가 예전에 녹림에게, 또 녹림에서 해원기에게 전해진 전령전의 사연. 그 사연이 결코 평범치 않은데도.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는다.
오소민이 웃느라 훤해진 얼굴로 얼른 말을 바꾸었다.
“해형은 녹림이 아니라고 했지만, 녹림과는 깊은 인연이 있나 보네. 그리고 황하문의 문주랑도 통하는 사이…….”
“두 번째로 가죠. 덕주에서 벌어진 겁표는 모두 아홉 무리. 그중의 하나가 산서로 도주하다 우연히 저와 마주쳐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장풍무명 진자현이었고요.”
괜히 얘기가 길어질까 싶어 해원기가 빠르게 화제를 바꾸자.
오소민도 비로소 웃음을 거두었다.
“장풍무명 진자현? 새북 장풍보의 보주라고 알려진?”
“네. 그와 그의 아우, 추풍객 조정이라더군요. 그리고 관아의 포쾌가 그들과 밀통한 사이였는데, 대강의 사정은 그 포쾌에게 들었습니다.”
“음. 조정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 장풍보의 보주가 덕주까지 와서 강도질을 했다? 이것도 물음표가 붙는군.”
“물음표?”
간략하게 설명을 더 하려던 해원기의 반문에.
오소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해형은 재미있는 사람이야. 강호를 상당히 겪은 것 같은데, 의외로 무림은 잘 모르거든.”
동행한 시간이 얼마나 되었다고. 서로 제대로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없거늘.
세심하게 관찰했다는 뜻. 해원기를 상당히 이해한다.
“어떻게 알았냐고? 장풍무명이란 이름은 알면서 그에 관한 무림의 소문에는 어둡기 때문이지. 장풍보의 실체 말이야.”
해원기가 얼굴빛을 고쳤다.
오소민이 자신을 궁금해하는 것 정도야 진즉 알아챘지만, 굳이 신경을 쓸 일은 아니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불긍기공(不矜其功), 불벌기덕(不伐其德).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말고, 자신이 베푼 덕을 자랑하지 마라.
사부에게 배운 후로 잊은 적이 없었지만,
‘장풍보의 실체’라는 무림의 소문은 처음 듣는 얘기.
이렇게 무지했었나.
내세우지 않고, 자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럴 필요 없다고 스스로 오만했던 것일지도.
오소민은 계속 말을 이어간다.
“새북은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으로 상당히 외진 곳. 섬서의 북쪽에서 장성까지를 제패한 장풍보라고 하지만 죄다 풍문에 의한 거지. 막대한 부? 뭐로 쌓았는데? 몽고의 잔당과 마적? 누구누군데? 그러다가 십여 년 전에 화산(華山)과 종남(終南)이 중건하면서부터는 장풍보의 인물이 보인 적이 거의 없다고. 일단 뿌리를 몰라. 장풍무명 진자현이 어떤 무공을 쓰는지 아는 이가 없는 데다가, 장풍보에 장풍무명 진자현 말고 또 누가 있는지. 막대한 부를 쌓은 새북의 패자라면서 보주 혼자야? 이상하지.”
“음.”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의심. 그래서 둘째 사형이 한번 더듬어봤던 모양이야, 화산검협(華山劍俠) 마(馬) 대협과 함께. 누군지 알아?”
해원기가 무겁게 머리를 저었다.
“중건한 화산파의 장문인이며 당세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의 대가(大家). 흥, 진자현은 알면서 어째 마 대협의 이름은 못 들었을꼬?”
오소민이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장성 부근의 빈궁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장풍보의 소문은 들을 수 있어도, 무림에는 관심을 둔 적이 없었으니까.
묵묵히 듣기만 하니까 오소민도 놀리는 재미가 없다.
“하여간 특별히 꼬투리 잡을 만한 게 없는데 뭔 근거로 조사를 했겠어? 그래도 수상하긴 했었나 봐. 장풍무명 진자현은 그저 이름만 보주, 장풍보에는 다른 배경이 있는 것 같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물음표가 붙는다고 한 거야.”
설명이 끝났다.
개방의 호법장로인 취개와 화산파의 장문인 화산검협이 얻은 결론.
오소민은 개방의 순행장로답게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사안에 접근하고 있었고.
그게 해원기를 참괴하게 만들었다.
“그럼 진자현, 이 자식이 지가 혼자 저질렀느냐, 아니면 장풍보가 한 짓거리…어이, 해형, 왜 그래? 갑자기 우중충해져서.”
입이 풀려서 본래 말투까지 돌아오던 오소민이 눈을 치떴다.
열심히 떠드는 데 시무룩해서 딴청을 피우다니.
‘우중충’한 해원기의 입가에 쓴웃음이 매달렸다.
“미안합니다. 오형에게 중요한 걸 배우다 보니까 문득 사부님 생각이 나서요.”
“사부님? 오, 어떤 분이실까? 나처럼 쾌활하고 자유분방하셨나? 하핫.”
활짝 웃는 오소민의 기대와는 달리.
“저를 아들처럼 대해주셨죠. 그런데 저는 참 못난 자식이란 걸 다시 실감했습니다.”
눈이 다시 심해가 된다.
아련한 기억.
자신의 뜻. 사람과 어울려 사람을 돕는 무인이 되겠다는 의지.
그걸 이루어주려고 전력을 다하셨지.
무도를 걷는 이로서 지향할 좌우명도 함께 의논해주셨다.
사부님의 바람.
넓고 크게 알고, 아는 것은 세밀하고 깊게 익히라.
박대정심(博大精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