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박대정심(博大精深) (3)
“과연. 산서에 비가 내렸다면 조만간 태항산맥을 넘어오겠군. 그러지 않아도 이즈음엔 황하문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는 게 관례라서…….”
첫 번째 부탁은 황신 대비를 황하문에게 알리는 것.
말을 꺼내자마자 유룡생이 금방 알아듣는 건 개방 역시 근 몇 년 동안 해마다 치렀던 일이기 때문인데.
별처럼 빛나는 눈이 또 의심스럽게 해원기의 젖은 옷을 훑는다.
무공은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고, 개방 내부에서도 아는 이가 드문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는 데다, 분명히 녹림에 전해졌을 전령전을 꺼내 보였다.
유룡생이 쓴 소녀염화와 철옥선판은 새로이 창안한 수법. 두 사형 외에는 같은 개방도라도 알지 못하건만, 그걸 가볍게 봉쇄해버린 해원기의 두 손가락. 지법이 아니라는 황당한 소리에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뭔지 알아야 따져볼 게 아닌가.
게다가 단 한 번 부딪친 걸로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까. 자신이 기가 막혀 토로한 무공 명칭도 간단히 염화수와 철옥장이라고 줄여서 칭했다. 소녀염화와 철옥선판의 바탕을 훤히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전령전을 받고 사형이라는 소릴 하기도 전에 유룡개라는 이름을 먼저 꺼냈으니.
상대방은 나를 다 아는 것 같은데 나는 상대방에 대해 하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뭐 하는 작자기에.
은근히 심통도 나는 판인데 전령전의 첫 번째 부탁이란 게 생각지도 못한 일.
오륙 년쯤 되었나. 황하문이 황신을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개방이 힘을 보태기 시작한 때가.
매년 황신이 일어나기 전에 황하문이 그때를 정확히 짚어내는 걸 신통하게 여기면서도, 황하의 형제들이니 그럴만하다고 대충 납득했었는데.
지금 해원기의 부탁을 들으면서 이전에 납득했던 것까지 수상해졌다.
“설마.”
머릿속에 문득 드는 생각을 급히 부정하는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지만.
해원기는 못 들은 척 깊은 눈매를 모았다.
“오는 도중에 날씨가 급변했으니 황신이 예상보다 빠를 수 있습니다. 황하문의 막(莫) 문주에겐 제 이름을 대면 될 거고요.”
“철탑거령(鐵塔巨靈)과 잘 아는 사이요?”
유룡생이 대뜸 황하문 문주의 외호를 들먹이며 묻자, 해원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다음 건은 좀 복잡한데,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유형(游兄)이라 특별히 부탁드립니다만.”
유룡생을 아무렇지 않게 유형이라고 부르면서, 그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바람에.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한바탕 불퉁한 소릴 내려던 유룡생이 입을 삐죽거렸다.
유룡생.
유룡개라는 별호 대신에 쓴 가명인 걸 뻔히 알고서 놀려대려는 게 아니다. 개방의 신비, 순행장로 정도의 위치여야 가능한 일일 터.
그리고 해원기가 처음으로 보이는 심각한 표정에서 평범하지 않은 일이란 걸 직감했다.
그래서 억지로 평소의 거친 소리를 참았지만.
유룡생은 해원기의 정체가 갈수록 더 궁금해졌다.
장거리 쾌체라는 직업과 해원기라는 이름만 밝힌 이 사람, 정체가 뭘까?
해원기의 얘기가 끝나자 유룡생의 얼굴도 굳어졌다.
특별한 부탁이 맞다.
“상보감 장인태감의 낙향, 규모와 호송의 구체적인 내용, 덕주에서 겁표가 발생한 전후 상황…….”
자신도 모르게 뺨을 긁으며 걷기 시작했고.
낡은 대청을 한 바퀴 돌고서야 유룡생의 걸음이 멈추었다.
대충 꼽아보아도 복잡한 사안이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지만, 참았던 불만이 먼저 튀어나왔다.
“젠장! 이거 한 가지 부탁이 아니잖소? 차라리 천자의 속곳이 몇 벌인지 알아오라는 게 더…….”
“그러니 유형에게 부탁하잖습니까. 오, 그런 것도 알아올 수 있습니까?”
“나 참.”
천자의 속곳 얘기가 아니잖나.
평소 같으면 바로 욕설을 내뱉었을 유룡생이 입맛을 몇 번 다시는 걸로 참았다.
흥미가 생겼다.
“당신이 뭘 알고 하는 부탁인지 모르겠소. 상보감 장인태감이라면 얼마 전까지 권세가 뜨르르했다던 놈이고. 그런 놈일수록 구린 구석이 많을 테니 낙향도 철저히 비밀로 했겠지. 유명한 표국이 셋, 경사부터 산동까지 각지의 관아들이 징발된다? 이게 영 이상해. 그리고 덕주에서의 겁표, 아무리 마차 하나라도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소. 표국과 관아가 호송하는 행렬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빼낸다는 게 가능할까? 이건 처음부터 더듬어봐야 할 문제, 더구나 표국이나 관아에도 확인이 들어가야.”
“그러니까 유형에게 부탁한 겁니다.”
해원기가 손을 모으는 시늉을 해서,
말이 끊긴 유룡생이 인상을 썼다.
유룡이라는 별호를 지닌 자신이 어째 자꾸 말리는 듯한 느낌. 명석한 그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놔두고, 저 정중한 말투와 예의 바른 태도, 그리고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기이한 기품.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자유분방(?)한 말투와 행동이 구속당하는 것 같다.
유룡생이 불쾌한 기분을 지우려고 코가 떨어지라 냉소를 쳤다.
“흥! 전령전 하나로 아예 톡톡히 부려먹을 심산이로군. 인원과 시간이 필요한 일, 언제 어디로 알려주면 되겠소?”
양곡현만이 아니라 산동과 하북 지역의 거지들을 다 동원해야 하고, 관아와 표국뿐 아니라 경사의 소문까지 모조리 수합해야 한다.
순행장로 정도 되어야 가능하니, 제대로 찾은 셈인데.
“여기서 바로 덕주로 갈 예정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조사를 할 테니 수시로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전령전을 이용한 두 가지 부탁. 다 들었으니 후딱 해원기를 내몰려던 유룡생의 표정이 변했다.
같이 있으면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정체도 모른 채 끝내기는 싫었다.
“덕주로 간다라. 직접 현장을 확인하려고?”
“네.”
“얘기만 들었다며. 덕주 지리는 알고? 아니, 덕주가 얼마나 큰지는 알고?”
“몇 년 전에 거쳐 간 적이 있습니다만. 잘 모릅니다.”
“어느 길로 갈 건데?”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어우, 제길!”
연달아 묻다가 그만 목소리가 커졌다.
전령전의 주인이라고 나름 조심했던 반말이 도로 나왔는데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정중한 말투가 더 복장 터질 노릇.
유룡생이 다시 술기가 오른 듯 붉어진 얼굴을 확 들이대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당신! 그 짜증 나는 바보 흉내는 그만하시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해원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유룡생이 성질을 내서 겁이 난 게 아니라.
성질을 냈는데도 그 용모가 눈부시게 아름답기 때문. 두 뺨에 홍조가 올라 웬만한 미녀라도 울고 갈 만큼 매력적이어서.
미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미남자란 걸 실감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개방의 신비인 순행장로를 누가 감히. 유형은 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니 방향만 알려주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해원기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쓴웃음을 지으며 오른 손목을 주무르자,
유룡생이 또 코웃음을 쳤다.
“흥, 진짜 남의 속을 박박 긁는 말투구먼. 그러면서 수시로 보고는 올려라? 그렇게 당신 맘대로만 할 순 없지.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야! 꼬맹이들!”
벌컥 화를 낼 줄 알았더니.
기루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하는 아이들을 부르며 휑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서.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이 아프다니 확실히 지법은 아니구나.”
해원기가 들으라는 혼잣말일 게다.
손목을 주무르는 해원기의 모습에 그나마 조금 자존심을 되찾았나.
“대충 정리해서 나가. 내일부터는 다시 거지들이랑 놀고. 본 공자는 바부탱이 하나가 걱정되어서 데리고 가야겠다. 어서, 어서.”
애들을 몰아세우는 목소리도 커서.
일부러 들리게 한다.
해원기가 요대자에서 천을 꺼내다가 피식 웃었다.
유룡생이 동행하겠다는 뜻을 알아듣고. 어색하면서도 든든한 묘한 기분이다.
“움움. 해형(海兄), 내 본명은 오소민(吳素敏)이니까 알아두라고. 움. 손목은 괜찮나?”
유룡생, 아니 오소민이 커다란 닭 다리 하나를 뜯으면서 건네는 말에,
해원기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냥 이대로 덕주까지 가면 될까요?”
낡은 고택에서 나와 곧장 현성의 북문을 통과했다. 그동안 말 한 마디 없이 휘적휘적 앞서 걷던 유룡생, 어디에 넣어 왔는지 모를 닭 다리를 꺼내 먹더니 불쑥 본명을 밝힌다.
딴에는 그새 고민을 했나 보다.
전령전의 주인인 해원기에게 막 대하기는 껄끄럽고, 그렇다고 말을 올리긴 심통 나고.
비슷한 나이끼리 쓰는 형이란 칭호가 반말을 쓰기에 제일 좋은데, 자신은 가명인 게 불편했겠지.
그래도 영준한 외모에 귀공자 같은 차림새로 길바닥에서 닭 다리를 뜯다니.
당최 남의 시선 따위 안중에 없다.
오소민이 닭 껍질을 살살 벗기면서 히죽 웃었다.
“흐흥, 왜, 그냥 현성을 나와서 걱정이 돼? 염려 말라구. 묘지촌 애새끼들 중의 하나는 양곡현의 소개(少丐)거든. 소개가 뭔지는 알지? 버얼써 전했을 거야. 기루 적선도 없는 날이라고 맘 놓고 처질러 자던 비렁뱅이들 놀랬을걸. 크큭.”
‘애새끼들’, ‘처질러 자던’. 평소의 말투를 회복한 게 즐거워서인지 키득거리고.
해원기도 새삼 그 치밀함을 다시 확인했다.
소개는 개방의 주요 분타에 비밀로 정해둔 열 살 아래의 꼬마 거지. 무공을 익히지 않고 눈치가 빨라야만 한다. 분타가 괴멸될 정도의 피해를 입었거나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연락할 최후의 수단.
낡은 고택에서 벌어진 일을 전부 기억했다가 오소민의 지시로 움직였단 거다.
오른 손목에 붕대처럼 다시 천을 감아 묶은 해원기가 마주 미소를 지었다.
“역시. 유, 아니 오형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같이 가주니까 부족한 저에게 큰 힘이 되는군요. 가능하면 덕주에 대한 소개도 좀…….”
우직.
“읏, 퉤퉤. 뼈 씹었잖아. 거 공자님 뼈다귀 씹는 소리 좀 어떻게 안 될까? 겉으로 보기엔 딱.”
뼛조각을 내뱉던 오소민이 해원기를 위아래로 훑곤.
“쓰벌. 완전 거꾸로 됐잖아. 퉤엣!”
괜히 나오지도 않는 침을 뱉는다.
준수한 귀공자는 거지답게 험한 말투, 반면에 상거지와 다름없는 몰골의 해원기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니.
거꾸로 된 게 맞다.
그래도 천박한 말투로 대답은 잘 해주는 편.
“잘 들어. 전에 어딜 거쳐 갔는지 모르겠지만 덕주는 양곡현의 다섯 배가 넘는 고을이야. 제남부의 직할로 현이 세 개나 되지. 물론 경사의 하간부(河澗府)와 하북의 동창부(東昌府)에도 일부분이 속하니까. 흠, 그래서 경사에서 산동으로 길을 잡으면 덕주를 거칠 수밖에. 쳇, 따질수록 찾을 곳이 많아지잖아.”
소개를 하다 보니 해원기가 부탁한 일이 점점 더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되고.
오소민의 미간이 조금 접혔다.
“우리는 요성(聊城) 쪽 길로 간다. 이쪽은 이맘때엔 왕래하는 이들이 별로 없으니까 속도를 내기 좋지. 그래도 세 시진은 족히 걸릴 터. 그래서 배부터 채우는 거야.”
혼자 닭 다리를 뜯는 데에 이런 이유가.
이제야 알게 된 해원기는 또 감탄.
“호오. 점심을 거르고 직행이로군요. 오형이 철저한 대비로 이렇게 신경을 써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으이구!”
오소민이 아예 진저리를 쳤다.
비위가 좋아도 유분수지 먹던 닭 다리가 체할 것 같아서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목적이 뭐야? 겁표한 도적들을 찾아? 상금이 걸렸나? 못된 환관 나부랭이는 당해도 싼데. 아니면 혹시 찾는 물건? 대단한 보물? 아는 사람 부탁?”
징글징글한 해원기의 대답을 미리 봉쇄하기 위해 질문이 거듭되는데.
해원기의 부드럽던 표정이 살짝 굳어진다.
권력을 쥔 자들의 횡포 때문에 민생이 어려운 당세. 녹림의 산적이, 부잣집 담을 넘는 도적이, 시정의 흑도가 차라리 더 의롭다고 여겨지는 세상이라. 악명이 자자한 환관의 낙향을 겁탈한 게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자세한 실정을 아직 모르는 오소민으로선 당연한 질문.
해원기의 눈에서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죄지은 자를 찾으려고요. 벌을 줄 겁니다.”
똑같이 차분하고 예의 바른 말투건만, 오소민이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속을 뒤집지도, 비위가 거슬리지도 않고.
어쩐지 목이 말라서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