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박대정심(博大精深) (2)
“저 아이들은 누굽니까?”
“응? 묘지촌(墓地村)에 사는 가난뱅이 애들.”
“묘지촌? 그런 이름의 마을도 있습니까?”
“에이, 마을에 그런 이름을 붙일 리가 있나. 자넨 생긴 대로 멍청하구먼.”
달칵.
유룡생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머리를 저었다.
자기가 묘지촌이라고 해놓고 마을 이름이 아니라니. 설명이 부족하잖나.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음, 양곡현은 유구한 역사, 광대한 면적, 많은 인구를 지닌 고을이야. 게다가 위치가 묘해서 산서, 하남에 다 통하고 산동으로 보면 외진 곳. 간단히 말해서 예로부터 토호(土豪)가 설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이거지. 대대로 부귀를 이어온 집안들이 많다, 요건 뒤집어보면 토호 집안을 빼곤 전부 밟혀 사는 사람들이란 건데. 땅을 잃고 살길이 막막한 이들, 집을 뺏기고 쫓겨난 이들, 쓸모없다고 버려진 이들이 어디 갈 데가 있겠나? 어떻게 현성까지 와도 결국은 성 밖의 공동묘지에나 사는 수밖에. 여기 양곡현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상스러운 말투를 쓸 때와는 달리 간단명료한 해설.
해원기가 아이가 내온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낡은 고택. 주인이 누구인지 알 길 없는 고택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명의 아이들이 나와서 보퉁이를 받아갔다.
방 안에서 음식을 나누고 술을 정리하는 모습이 능숙하고.
문짝이 다 떨어진 중당(中堂). 해원기와 유룡생이 의자에 앉기 무섭게 차를 내오는 것도 습관적이다.
한두 번 했던 일이 아니라는 뜻.
기껏해야 열서너 살 먹은 애들 데리고 뭘 하는 걸까.
유룡생이란 절세적인 용모의 귀공자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점점 더 궁금해져서 잠자코 듣는 중인데.
역사와 지리에 근거해 이렇게 간단명료히 상황을 논하는 건 그만한 학식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고,
말대로라면 가난한 묘지촌을 위해 기루에서 도둑질을 일삼았던 모양이다.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큰 고을의 공동묘지라. 그런 경우가 적지 않죠. 세상이 어째 갈수록 어려워지는지. 후우.”
해원기 자신도 다년간 목격했던 광경들, 절로 동감을 표하지만.
“어쭈! 한숨? 그럼 뭐하나? 한숨만 열나게 쉰다고 뭐가 달라져? 살기 어려워지는 건 바보멍충이들이지, 잘나가는 것들에겐 아주 살판 나는 세상일걸. 묘지촌의 가난뱅이들은 진짜 한심한 것들이라… 자기 애새끼들처럼 구걸이라도 할 생각은 꿈에도 안 해. 그게 꼴 보기 싫어서, 에, 자넨 뭐 하는 작자야?”
유룡생이 대뜸 또 걸진 말투로 지껄이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해원기의 한숨이 거슬렸는지 불쾌한 표정.
그래도 다시 찻잔을 들며 엉뚱하게 한패가 된 자의 내력을 알아보려 하니.
‘의기만 있는 게 아니라 속도 깊군.’
한심한 몰골이 해원기의 정체가 아니라는 걸 이미 간파했다. ‘너’라는 호칭이 ‘자네’로 바뀐 것만 봐도.
해원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자기 옷자락을 툭 쳤다.
“장거리 쾌체입니다. 산서에서 오는 길에 겨우 쉴 곳을 찾았지요.”
“쾌체? 그럼 기(寄)야, 환(還)이야?”
기는 일을 맡아서 물건을 갖고 가는 길, 환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쾌체를 알아야 쓰는 용어인데.
해원기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환입니다.”
“그럼 산동이 괘표(掛標)야?”
역시 마찬가지. 괘표는 쾌체가 상주하며 위탁을 받는 곳. 유룡생은 용케 이런 용어를 알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그게 거의 문초와 다름없지만.
해원기는 굳이 속일 이유가 없다.
“아닙니다. 괘표는 사실 당산이지요. 장거리라고 했잖습니까.”
“헛.”
유룡생이 어이없다는 듯 희한한 소리를 내더니, 그 잘생긴 얼굴로 묘한 웃음을 짓는다.
“하북 당산이 괘표, 산서로 갔다가 산동으로 온다고? 장거리 쾌체니까 다릿심도 좋아서 본 공자를 숨도 헐떡이지 않고 따라왔단 말이지? 말 되네, 말 돼.”
영 꼬투리가 잡히지 않아서인지 들었던 찻잔을 마시지도 않고 내려놓았다.
“그럼 그 장거리 쾌체가 아침 식사까지 해결하고서 무슨 이유로 기루 골목에서 어정거린 걸까? 산서에서 함빡 젖은 김에 아침 댓바람부터 한 따까리 하시려고?”
한 따까리.
식지를 세워서 다른 손 주먹 안에 꽂는 시늉. 남녀의 잠자리를 천박하게 표현하는 손동작에 기가 막혔지만,
해원기는 유룡생이 여전히 냉정한 눈이란 걸 알아보았다.
해원기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럴 처지가 되나요? 노자로 쓴 게 많아서 이번은 완전 손해였거든요. 실은 기루 골목에 가면 아침에도 거지를 찾을 수 있다고 해서 간 겁니다. 아까 얼핏 들어보니 오늘은 적선이 쉬는 날이라던데.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아서, 흠, 이상하게 꼬였지요?”
여전히 차분한 대답.
유룡생의 묘한 웃음이 얼어붙고, 천한 손동작도 굳어졌다.
“들어보니 꼬이긴 꼬였구먼. 그런데…….”
냉정한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오고, 시선은 해원기에게 꽂힌 채. 입만 천천히 움직인다.
“굳이 기루 골목까지 거지를 찾아 나선다? 차라리 거지라면 패거리를 찾는 줄 알겠지만, 장거리 쾌체라고 했잖아.”
누가 들어도 이건 말이 안 된다.
당연한 반응이라 해원기가 말을 보태려다 얼른 머리를 젖혔다.
핏.
유룡생이 주먹 안에 꽂았던 오른손 식지가 벼락같이 뽑혀 해원기의 목젖을 노리는 통에.
오래된 고택의 중당, 두 사람이 앉은 의자는 높다란 등받이가 벽에 붙었고, 의자 사이엔 작은 협탁 하나가 있을 뿐.
팔을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라 유룡생의 오른손은 벌써 공간을 가르고 지나가는데,
그 와중에도 해원기의 눈은 유룡생의 기이한 손 모양을 놓치지 않았다.
찌르고 찍는 지법(指法)도 아니고, 할퀴고 조이는 조법(爪法)도 아니다. 다섯 손가락이 모였지만 붙지 않고 살짝 비틀린 모양.
휘익.
더 생각할 틈이 없다. 오른쪽 관자놀이로 유룡생의 왼손이 무겁게 덮쳐오니.
주먹이 활짝 펴진 손바닥, 더는 뒤로 피할 수가 없다.
해원기의 오른손이 밑에서 위로 반원을 그렸다.
팍.
유룡생의 양손이 한꺼번에 튕겨 나가며 여력으로 의자가 뒤로 넘어가지만, 넘어가던 의자가 돌연 빙글빙글 돌며 해원기의 정면으로 다가들었다.
미리 준비한 듯 눈부시게 빠른 대응. 의자에 앉은 채 두 손이 무서운 속도로 해원기의 상반신을 덮친다.
기이한 오른손은 부드럽게 흔들려 종잡을 수 없고, 활짝 펴진 왼손은 철판을 두드리듯 강렬하다.
전혀 다른 두 가지 힘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면서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어느 게 오른손이고 어느 게 왼손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데.
해원기가 별반 표정을 바꾸지 않고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일지광한에 중지를 덧붙인 이지무성이 무수한 공격을 모조리 얽어맨다.
파파파파, 팡.
연거푸 막히는 두 손이 마침내 서로 부딪쳐 가벼운 소리를 내고,
유룡생이 의자째로 주르르 밀려났다.
경악으로 두 눈을 홉뜬 표정인데도 영준한 용모는 그린 듯 아름답고,
잠시 해원기를 보다가 벌린 입에서는 예의 천박한 말투가 그대로 나온다.
“쓰벌! 이건 뭐야? 손가락 두 개, 지법으로 어떻게 소녀염화(少女拈花)와 철옥선판(鐵玉扇板)을 막아?”
초식과 공력이 얽혀 제멋대로 부딪친 두 손을 탁탁 털면서 벌떡 일어서자,
퍼석.
앉았던 의자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유룡생의 두 손에 담긴 힘, 그게 고스란히 돌아갔고, 그걸 다시 풀어내 의자로 흘린 것도 보통 솜씨는 아니지만.
결국 단번에 꺾인 셈.
그런데도 유룡생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편해 보인다.
해원기 역시 유룡생의 어처구니없다는 물음에 선선히 대답했다.
“비범한 염화수(拈花手)에 견고한 철옥장(鐵玉掌)입니다. 손가락을 두 개나 펴야 막을 수 있군요. 아, 지법은 아닙니다만.”
손을 털던 유룡생이 천천히 걸어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거 또 헷갈리는데. 내가 전혀 모르는 무공이라 사형과는 상관이 없다 여겼거늘. 소녀염화와 철옥선판이 뭔지 짐작한다는 거야? 자네, 도대체 정체가 뭔가? 아니, 거지는 왜 찾아?”
해원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대자에서 꺼내는 동전, 다가오는 유룡생에게 던져주며 빙그레 웃는다.
“일이 꼬이긴 했습니다만 제대로 찾은 것 같습니다.”
얼떨결에 동전을 받은 유룡생의 입이 딱 벌어지고,
“에? 전령전?”
해원기는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주물렀다.
“당신이 개방 내에서도 아는 이가 드물다는 신비의 유룡개(游龍丐)로군요. 반갑습니다.”
유룡개라는 말에 유룡생이 못 박힌 것처럼 우뚝 섰다.
딱 벌어진 입, 멍한 표정.
아무리 뛰어난 용모라도 이 순간에는 덜떨어진 멍텅구리 같았다.
정도의 중흥기.
구주정문의 끊겼던 맥이 다시 이어지고, 쇠퇴했던 문파들도 차츰 본래의 면모를 찾아가는 시간.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건 개방이었다.
흔히 천하제일대방(天下第一大幇)이라고 일컫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지라는 특수한 구성원 때문. 세상 곳곳에 있는 거지들이 하나의 방파에 속했으니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은 없을 것이지만, 천하제일이 되려면 그만큼 많은 거지가 필요하고, 거지가 많다는 건 또 세상이 살기 어렵다는 뜻이니.
강호가 혼란해야 개방이 융성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개방을 천하제일대방이라고 칭하는 건 어느 정도 우스개가 담겼으나, 당금 무림에선 가히 정도의 기둥이라 할 정도.
역대로 천하제일대방만큼 개방의 특징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말이 용사혼잡(龍蛇混雜)이다. 누가 거지가 되는가. 일반적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운,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는, 세상에서 버려진 자들이 거지가 되지만. 때로는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거지를 택하는 경우도 있어서.
하찮은 뱀 떼 속에 용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세의 개방은 뱀보다 용이 더 많다고 할까.
명성이 자자한 풍진삼우(風塵三友) 중의 한 사람이 개방의 호법장로(護法長老)인 취개(醉丐)요, 취개의 사형이며 당금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고수 협심개(俠心丐)가 방주.
예전과 달리 분타를 늘이는 대신에 총타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여 그것만으로 능히 구주정문에서 가장 강하다는 평을 받고.
그게 전부 십여 년간 공들여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을 길러냈기 때문.
그런데 이런 변화 중에 은근히 섞여 전해진 소문 하나. 낙양 총타의 거지들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바람에 도리어 더욱 신비하게 전해졌지만, 워낙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해서 근 오 년 동안은 아예 잊힌 셈인데.
바로 후개(後丐)에 관한 소문이었다.
무림의 문파에서 흔히 장문제자(掌門弟子)라고 부르는 다음 대를 이을 후계자.
협심개, 취개의 막내 사제로 사형들을 훨씬 능가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어 마치 강호를 노니는 한 마리 신룡과 같다던가.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성별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헛소문일 게다.
결국 거지들 아닌가. 거지야 당연히 강호를 노니는 처지, 그 주제에 무슨 신룡이니 뭐니. 허풍도 어지간하다고 개방 내부에서도 웃음거리가 되었다나.
거지는 영웅이 아니다.
유룡생이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손바닥만 쳐다본다.
“전령전은 모두 세 개, 하나는 방주 사형,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이건 술꾼 사형이 예전에… 당신은 녹림장관(綠林壯觀)에서 왔소?”
‘너’에서 ‘자네’, 이제 ‘당신’으로 바뀌었다.
개방에서 소식을 전하는 신물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 가장 권위를 가진 것은 바로 전령전. 방주와 호법장로, 그리고 순행장로(巡行長老)만이 대지급의 전령전을 사용할 수 있다.
유룡생의 말은 이미 그의 신분을 밝혔다.
그가 바로 순행장로요 협심개와 취개의 사제인 유룡개라는 것을.
그렇다고 가장 권위를 가진 전령전의 주인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취개가 녹림에 준 적이 있다는 예전 얘기를 겨우 기억해서 묻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심정이 선뜻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녹림의 중추인 녹림장관 출신이라도 그렇지, 손가락 두 개로 자신을 물리친다고?
해원기가 미소를 지은 채로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닙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두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만, 하나는 좀 서두를 필요가 있어서 전령전을 썼지요.”
유룡생의 머리가 퍼뜩 올라왔다.
아무리 미심쩍어도 전령전이 확실한 판에 언제까지 멍할 수는 없다.
“전령전의 주인은 누구라도 개방의 소식통을 대지급으로 부릴 수 있지. 뭐든지 말씀하시오.”
뻣뻣하긴 해도 아까보다는 훨씬 공손해졌고, 욕을 하지 않은 게 어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