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화 (18/410)

* 제5장 박대정심(博大精深) (1)

현성 북쪽.

이끼가 잔뜩 낀 오래된 담장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해원기가 더벅머리를 마구 긁었다.

골목 앞에 늘어섰던 탄자들이 다 떠날 때까지 흘깃거리는 시선을 수도 없이 받느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심통을 부리기로 작정한 상거지로 여기는 것도 그런데.

하필 또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아침때라서 등을 다 끄긴 했으나, 이곳은 홍등가(紅燈街). 이른바 기루(妓樓) 골목이란 곳이다.

양곡현에서 가장 비싼 술과 환락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어서 밤이면 흥청망청 불야성을 이루지만,

아침이 되면 거꾸로 잠이 드는 곳.

그래도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의 아침거리를 위해 탄자들이 모여든다.

이 골목에 해원기가 왜 오게 되었는가 하면,

춘권을 파는 노파의 소개 덕분.

아침 댓바람부터 거지를 찾는다는 말에 별반 의심도 하지 않고 이 기루 골목을 가르쳐주었다.

초라한 해원기의 몰골이 거지와 잘 어울려 보였을까.

“누구 아는 이라도 있는감? 흐흠, 거지라. 날이 훤해질 무렵부터 밖에 나올, 그런 부지런한 거지가 있을 리가… 아아, 거기라면 있겠네. 손님들이 남긴 요리를 내버리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서 온다던가. 히히히.”

양곡현 부잣집에 팔려와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더니.

현성의 어디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짐작하는 듯.

춘권 두 개로 은자 부스러기를 챙기는 횡재(橫財)를 한 탓에 길을 자세히도 가르쳐주었고,

이치에 맞는 설명이라 현성 사람이라면 이 시간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기루 골목에 오게 된 것이다.

허나 전령전을 사용해 개방의 도움을 구하려는 마음이 급해서, 이런 볼썽사나운 구경거리가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루에서 남은 음식들을 언제 내버리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이곳의 거지들뿐일 터.

“이거 참.”

대첨산을 빠져나온 이후로 양곡현까지 급행. 제대로 씻을 틈도 없어서 해원기 역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난감한지 알고 있다.

딱히 외모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라도, 어려서부터 항상 깔끔하고 정결하도록 습관을 들였거늘.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가.

맛있는 작춘권을 통해 초심을 되살린 건 좋은데 그렇다고 외양(外樣)이 곧장 내심(內心)처럼 회복되진 않는다.

해원기가 간지러운 머리를 다시 한번 긁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탄자도 다 떠나고 곳곳의 문이 꼭 닫힌 기루 골목은 적막강산. 점점 밝아지는 햇빛을 거부하듯 한밤중처럼 조용하다.

기루의 아랫것들이 대강 허기를 채우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가 될 텐데.

거지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이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할머니 말이 틀릴 리는 없고.”

어쩐지 헛걸음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슬쩍 든다.

해원기의 입에서 하릴없이 한숨이 새어 나오려 할 때,

삐꺽.

왼쪽에서 작은 쪽문이 열리는 소리.

얼굴 하나가 나왔다가 재빨리 도로 들어간다.

해원기를 발견하고 놀란 듯 커진 눈을 언뜻 본 듯해서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또 상거지 취급인가.

“에? 모르는 얼굴인데?”

그 얼굴이 금방 튀어나왔다.

놀라서 커졌던 눈이 그새 가늘어져 의심스러운 시선이 해원기를 위아래로 훑는 통에.

해원기 또한 마주 쳐다보다가 눈을 껌벅였다.

이십 대 초반일까. 머리끈이 느슨하게 풀려서 어지럽게 흘러내린 긴 머리칼,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이지만 날카롭게 뻗은 눈썹과 반짝이는 눈, 우뚝한 콧날과 두툼한 입술이 각진 턱선과 어울린.

참으로 보기 드문 미남자.

다년간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언제나 믿음직한 탁 소숙과 그 벗들이 한때 삼준(三俊)이라 꼽혔기에,

남자의 준수한 용모에 대한 해원기 나름의 평가기준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빼어난 용모는 처음.

속칭 눈이 번쩍 뜨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내다.

걸친 옷도 질 좋은 백삼 위에 따뜻한 면오(綿襖) 덧저고리, 허리에는 옥구슬이 장식된 고급 요대를 둘렀고 신발도 목이 긴 가죽 장화라 부유한 귀공자티가 줄줄 흐른다.

그런데.

양쪽 손에 든 큼직한 보퉁이, 한쪽은 푹 젖어서 즙 같은 게 뚝뚝 떨어지고, 한쪽에는 닭다리와 튀김 조각들이 삐져나와 있어서.

준수한 용모의 귀공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입에서 나오는 말투가,

“넌 뭐야? 이 구역 얼굴이 아닌데. 양곡현 거지라면 오늘은 기루 적선도 쉬는 걸 모를 리 없고. 구역도 모르고 어슬렁대는 신참이냐? 아니, 아무리 신참이라도 아침 댓바람에 구걸은 무리잖아. 바보가 아니고서야…….”

뒷골목 싸구려 건달이나 할 법한 소릴 지껄여서.

해원기가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그저 쳐다보고 있는데.

슬금슬금 쪽문을 빠져나오던 발이 문득 멈추며 해원기를 다시 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너, 설마. 사형이 보낸? 이런 젠장!”

돌연 벌컥 화를 내며 목소리가 높아지고,

거의 동시에 쪽문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튀었다! 요리를 죄 챙겨서 튀었어!”

“이놈의 새끼를. 저기다. 쪽문이야!”

“잡아! 잡아!”

찢어지듯 높아진 여자 목소리, 거친 남자 음성과 여자들이 마구 외쳐대는 소리가 뒤섞여 와르르 밀어닥치자.

준수한 귀공자의 표정이 확 변했다

“으엑. 내가 이런 실수를. 이이익.”

잡아먹을 듯이 해원기를 흘기더니 부리나케 골목 안쪽으로 뛰기 시작하고,

“밖에 상거지도 한 명 있었어요.”

“뭐야? 오늘은 적선 없는 날이잖아. 그놈이 한패일 게다.”

“다들 나와! 잡아라!”

탄자에서 만두 몇 개를 사 간 계집종이 일렀나. 거친 목소리와 사내들이 달려 나오는 기척.

기루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해원기라도 소위 호화(護花)라는 건달패가 상주하는 것쯤은 들은 적이 있어서.

이 엉뚱한 오해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근본이 되는 흑도(黑道)랄까.

기루는 창기, 술, 음식을 제공해 돈을 버는 가게. 당연히 모든 것이 시세보다 몇 배나 비싸고 손님도 돈깨나 있는 자와 나름 어깨에 힘주는 자들. 비밀을 보장하고 이권을 유지하며 질서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무력이 필요하다.

하찮은 불량배나 건달에서부터 꽤 세력을 갖춘 방파를 배경으로 둔 자들까지.

괜한 시비에 휘말리기 싫은 해원기가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골목 안쪽을 향했다.

노파에게 물어 온 기루 골목, 지리를 아는 곳도 아니니 그저 준수한 귀공자가 향한 방향을 택할 수밖에.

“와아! 저놈이다.”

“잡아! 죽여!”

날이 훤해지는 현성 안에서 경공을 쓸 수는 없다.

해원기가 벌써 한참 멀어진 귀공자의 뒷모습을 찾으며 냅다 달렸다. 굳이 경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육 년간 쉬지 않고 일한 육체. 내외겸수(內外兼修)가 의도치 않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그것만으로도 진짜 쾌체가 무색할 속도를 낸다.

‘호, 그런데 저 잘생긴 사내도 어지간하네.’

뒤를 쫓는 건달패의 악다구니보다 양손에 훔친 음식을 들고도 자신과 같은 속도를 내는 귀공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양곡현 거지는 전부 안다는 듯이 말했었다.

양곡현의 북쪽은 고성구(古城區)였나.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고 꼬불꼬불한 골목이 대체 어디로 이어지는지 동서남북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거의 반 시진 가까이 정신없이 뛰면서도 용케 막다른 곳은 다 피해 나가니.

한두 번 돌아다닌 솜씨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한패가 되어 뒤를 바짝 따르게 된 해원기가 오래된 골목 바닥을 흘낏 보았다.

쪽문에서 나올 때 양손에 들었던 보퉁이. 아마 훔친 요리들을 잔뜩 담았을 텐데 양념 덩어리 하나, 국물 한 점 흘리지 않았다. 분명 잔뜩 젖어있었는데도.

해원기처럼 그냥 헐레벌떡 뛰면서 뭔 재주를 부렸기에.

점점 더 궁금해졌다.

건달패들의 고함은 이미 들리지 않고, 귀공자가 돌연 몸을 세우며 홱 돌아섰다. 골목이 끝나고 현성의 성벽이 보이는 구석. 결국 막다른 곳까지 왔다.

“그만 따라와! 너 때문에 아침부터 존나 고생했잖아. 쓰벌.”

치켜뜬 눈썹, 불을 토할 듯한 눈빛. 검미성목(劍眉星目)에 딱 맞는 영준한 생김새면서 ‘존나’, ‘쓰벌’이란다.

해원기가 이 맛깔스런(?) 욕설에 바로 앞에 서며 쓰게 웃었다.

“이런.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요? 당신 때문에 하마터면 이유도 없이 치도곤을 당할 뻔했잖습니까. 억울합니다.”

언제나 부드러운 말씨.

귀공자가 뜻밖의 대답에 입을 주억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 황망해서 마구 대한 건 자신이고 그게 오해였다는 것도 도주하면서 깨달았다.

초라한 몰골에 대뜸 거지 취급을 했잖은가. 뭐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음식이라도 나눠 줘?”

여전히 시비조로 나가긴 해도, 성질을 내던 눈매는 이미 누그러져서.

새삼 해원기를 찬찬히 살핀다.

“현성에 들어오자마자 끼니는 때웠습니다. 한바탕 뛰어 소화를 시켰다고 또 음식을 탐할 리 없고요. 어째 오해가 계속되는 곳이라 빨리 떠나고 싶은데. 후읍.”

해원기가 심호흡하며 손을 들어 양쪽을 가리켰다.

“초행길이라 당최 지리를 모릅니다. 특히 이런 고성구는. 길눈이 밝은 것 같던데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아, 저는 해원기라고 합니다.”

천연덕스러운 요청에 귀공자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깍듯한 말투와 숨도 차지 않는 자태.

엉망으로 넘긴 더벅머리에 더러운 옷차림과는 전혀 다른 기품.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보상으로 길 안내를 하라는 얘기.

귀공자가 괜스레 상쾌한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하하, 너 꽤 괜찮은 녀석이잖아. 낯짝 두꺼운 건 나랑 비슷하고. 초행길이라면, 에, 안내 정도야 뭐. 본 공자는 유룡생(游龍生)이라고 한다. 우선 이걸 좀 들어주라.”

제 또래라고 여겨도 그렇지. 반말로 하는 인사에 욕설이 섞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그보다 귀공자가 밝힌 이름 때문에 보퉁이를 들어주려던 해원기가 멈칫거렸다.

유(游)라는 성도 희귀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이름이라고 여기기 어렵다.

물속을 노니는 용처럼 자유롭게 산다는 뜻. 이름보다는 별호로 들리고.

또 보퉁이가 왜 멀쩡한지도 알게 되었다.

번들거리는 포대(布袋), 기름이나 초를 먹인 걸로 보이는 포대로 보퉁이를 언제 감쌌을까. 처음부터 기루에서 음식을 싸 들고 도망가면서 흔적도 남기지 않을 요량이었던 거다.

“어떻게 이걸.”

치밀함에 감탄해주면 자랑이 나오기 마련이다.

유룡생이란 귀공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듯하게 차리고 가서 허풍 좀 떨면 대우가 달라지거든. 손이 큰 멍청이가 왔다고 바가지를 잔뜩 씌우려고 하지. 술은 도수가 높은 명주, 음식은 다 먹지도 못할 만큼. 거꾸로 못생긴 계집애들이 처마시게 해놓고 깡그리 챙긴 거야. 넌 요리와 과일을 들어. 술은 도로 내다 팔 거라서 깨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니까. 이쪽으로.”

해원기에게 건넨 건 묵직한 보퉁이. 즙이나 국물이 떨어지던 거다.

술이 든 보퉁이라는 걸 품에 안은 유룡생이 앞장서서 골목 끝을 돌았다. 막다른 곳으로 보였는데 또 굽은 골목이 있었던가.

바짝 뒤를 따르던 해원기가 이번에는 정말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골목을 이루는 오래된 담장, 이끼가 파랗게 오른 담장 끝이 사실은 나무판자에 돌조각을 붙인 눈속임이고 성벽에 잇대어 문짝 구실을 하니.

대문을 통하지 않고도 작은 고택의 정원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다.

유룡생이라는 준수한 귀공자.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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