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6화 (17/410)

제4장 박병춘권(薄餠春卷) (4)

열 살.

삭막한 동토(凍土)를 떠도는 일족. 과거의 영광이 어떻고, 위대한 전승이 어떻고. 매일 저녁 작은 불빛 아래서 떠들어대기만 할 뿐.

땅 한 뼘, 집 한 채 없이 이리저리 쫓겨 다니기만 했다.

말을 타고 양을 치는 이들을 멸시하고, 소를 몰아 논밭을 가는 이들을 경시하지만.

오히려 멸시당하고 경시 받는 건 일족.

갈수록 사람 수는 줄고 어린아이라곤 자기 혼자 밖에 없었다.

일곱 살 때던가. 동쪽의 강가에서 우연히 해동청 새끼 한 마리를 발견해 친구로 삼았다.

야생의 해동청은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지.

그게 남들에겐 없는 재주.

얼마 남지 않은 일족의 소멸을 짐작했던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어린아이의 미래를 밝히려고 했지만.

일족은 그저 닥치는 고통을 견딜 돈이 필요했었고, 마침 영특한 야생 매와 그 야생 매를 길들인 어린아이는 거래할 가치가 있었다.

중원에서 백산(白山)을 오가는 인삼 장수, 그에게 팔렸다. 해동청과 함께.

그게 열 살 때였다.

까맣게 잊었다고 여겼는데 노파의 얘기에 불현듯 떠오른 기억.

춘권에 녹아가던 마음속에 여전히 작은 응어리가 남아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지만,

해원기가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아닙니다. 맛있겠는데요.”

젓가락을 찾아 두리번거리자 노파가 냉큼 대나무 꼬챙이 하나를 건넸다.

“이걸로 찍어 먹어. 기름을 더 부을 거니깐 뒤로 좀, 떨어뜨리지 말구.”

춘권에 대나무 꼬챙이라. 하긴 간장이나 식초도 보이지 않는다. 놓아둘 받침대조차 없는 곳이니.

한심한 환경을 일부러 모른척하는지.

“그럼. 맛이야 끝내주지. 그래도 이번 게 더 나을걸. 억수로 큰 작춘권(炸春卷)이거든. 그 쇄은 값은 충분히 되고도 남아. 히히.”

콩알만 한 은자 부스러기가 탐이 났나. 노파는 흥이 나서 손이 더욱 빨라지고, 입도 따라서 쉬질 않는다.

“보아하니 밤새 길을 걸었구먼. 뭐 하는 사람인지 몰라도 고생깨나 한 모양. 그래도 이 늙은이의 작춘권을 먹으면 바로 기운이 날 거여. 우리 애들도 일이 고되면 요걸 그리 찾았거들랑. 이제는 다들. 어차!”

손바닥 길이보다 더 길고 두툼한 춘권을 맨손으로 쥐고서 끓는 기름 속에 넣는다.

벌겋게 부은 손, 손톱도 얼마 남지 않은 거친 손인데도 얼마나 부드럽게 넣었는지 기름 한 방울 튀기지 않고.

넣자마자 대나무 꼬챙이 하나를 들어 길게 꿰는데 그 또한 절묘한 솜씨.

해원기가 손에 든 춘권보다 노파의 손놀림에 정신이 팔렸다.

“정말 잘하시는데요. 할머니 자녀분은 먹을 복을 타고난 겁니다. 그런데 이거…….”

좌우를 돌아보다 그냥 춘권을 베어 물었다.

부잣집에 팔려간 여종 신세지만, 애를 넷이나 낳았단다.

도련님이 진심으로 대했든 아니든 자식들이 있는데 이렇게 아침을 팔러 나오는 신세.

외진 골목 어귀에 겨우 화로 하나. 찾는 손님도 없어서 이제 막 현성에 들어온 길손에게 개시를 하는 처지잖나.

괜한 소리가 나올까 입을 다물었는데, 눈이 절로 커졌다.

고소한 향이 입 안에 꽉 차고 단맛이 씹을 때마다 더해져 침이 확 나오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대충 만든 춘권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정도다.

감탄을 하기 전에 노파의 웃음이 먼저 나왔다.

“히히, 복은 무슨. 천한 팔자가 바뀔 리가 있는감? 도련님 애를 낳았다고 기뻐한 것도 처음뿐, 연달아 셋이나 딸을 낳았더니 아주. 에헴, 그래도 네 번째는 드디어 아들을 봤다구. 집안에서 대우도 좋아지고 딸년들도 덕분에 유모들 손에서 클 수 있었지. 그땐 정말 사는 맛이, 어차, 고거 맛있지?”

튀기던 춘권을 꺼내며 해원기를 쳐다본다.

지진 춘권 한입에 놀란 표정이 기대했던 대로란 듯.

“네. 정말 맛있습니다.”

“그려, 그려. 여기 양곡에선 춘권을 별로 먹지 않아서 고렇게 지져봤었지. 그래도 진짜배기는 튀겨야. 아, 이 늙은이 인생도 볶았다가 지졌다가 튀겼다가. 흠, 음식 솜씨가 팔자랑 같은 걸까? 히히.”

말에 두서가 없고 희한한 웃음을 끼우면서도 열심히 떠들어댄다.

“딸년들 먹을 복은 기껏 오 년이었어. 아들 녀석이 여섯 살이 되기 전에 덜컥 죽어버렸거든. 뭘 잘못 먹었는지, 자다가 뱀이나 독충에 물렸는지. 뭐 잠결에 죽었으니 아프진 않았을 거여. 이미 찬모(饌母)도 아니었는데 내 탓이라고 호되게 당했고, 딸년들도 당장 내다 팔아버리더구먼. 그때 처음으로 대들었다가… 옳지.”

춘권을 그새 또 기름에 넣었다가 뺐다.

처음과 달리 짧은 시간. 두 번 튀긴 춘권에서 기름을 빼느라 꼬챙이를 옆으로 뉜다.

“조금만 참아. 맛난 건 시간이 걸리는 법이여. 에헴.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래서 대차게 두들겨 맞고 창고에 며칠을 갇혔는데, 그러다 나오니까. 얼렐레, 집안이 죄 뒤집힌 거여.”

“뒤집혔다고요?”

“응, 응. 우리 도련님은 둘째 아들인데 나쁜 짓을 많이 하다가 들통이 났다고. 그래서 도련님의 형님이 어르신의 허락을 받고 모조리 잡아들였다고. 그러면서 호되게 당한 나는 거꾸로 그 덕에 멀쩡하게 붙어있을 수 있게 됐으니. 히히, 참 재미있쟈?”

재미있을 리가.

그래도 어느덧 노파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열 살에 부잣집에 팔려가 아이 넷을 낳은 세월, 그 세월 속의 기구한 곡절은 너무나 실감이 나기에.

노파가 턱짓으로 해원기를 재촉하며 작춘권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도 한 이십 년이여, 부엌데기 생활로 보낸 게. 어떻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히히, 젊은 손님, 그거 아는감? 무지랭이 촌구석 계집애도 갖가지 일을 겪다 보면 눈치가 제법 생기고 뭐가 뭔지 알게 된다는 거. 자아, 사람은 손이 두 개니까네, 요것도 입에 넣어봐.”

기름이 다 빠졌나. 겉이 노랗게 변한 작춘권.

해원기가 건네는 걸 왼손으로 받자 노파가 또 웃었다.

“히히히, 한쪽엔 노랗고 한쪽엔 하야니 그야말로 금은만당(金銀滿堂)일세. 길조로구먼, 길조. 손님은 떼돈을 벌 거야.”

속되지만 문자도 쓴다.

노파의 말대로 부잣집에서 보낸 인생 덕일까.

해원기가 양손에 든 춘권을 보았다. 처음의 지진 춘권은 계란 흰자위가 많아서인지 흰색, 막 건네받은 커다란 작춘권은 콩물이 튀김에 변해서인지 노란색. 황금과 백은이 집에 가득하다는 금은만당이 딱 맞는다. 기껏해야 대나무 꼬치 두 개에 불과하지만.

“제 몰골에 어디 떼돈이 붙겠습니까. 할머니는 좋은 말씀만 해주십니다.”

“헤에, 몰골이 어때서? 사람을 겉만 봐서는 못써. 멀쩡하게 생겨서는 속은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천지삐까리여. 도련님의 형님도 얼매나 의젓하고, 도련님의 정처도 얼매나 현숙했는데. 그 둘이 진즉 배가 맞아서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죄다 해칠 줄을 누가 알았겠어. 심지어 어르신까지도 당신이 그저 불치병에 걸려 죽는다고… 에구구, 어여 먹게, 어여 먹어.”

말이 많으면 하지 않을 소리도 나오는 법이다.

노파가 황급히 손짓을 하곤 바쁜 척 화로 뒤에 쭈그려 앉는 건 자신의 실언에 놀랐기 때문.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죽어간 이들을 적잖이 봤었다.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가 왼손을 당기고. 한숨이 나올 듯해서 얼른 작춘권을 입에 넣었다.

두서없는 넋두리지만 다 알아들었다.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다.

먹고 살길이 없어 아이를 파는 건 드물지도 않고, 부잣집에서 자식들끼리 재산을 놓고 다투는 경우도 비일비재.

있는 사람은 더 가지려고 엄한 짓을 하고, 없는 이는 그나마도 뺏길까 겁을 낸다. 수치도 모르고 용기도 없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뭐가 옳은지 따지지도 않는다.

안타까움에 입맛이 떨어질 것 같은데.

‘응?’

이번에는 눈이 커지다 못해 눈가가 살짝 떨릴 정도.

겉은 바삭, 속은 촉촉. 볶은 채소와 돼지고기가 섞인 소가 녹은 비계로 뒤엉켜 절묘한 맛과 식감을 아우르니.

기가 막히는 풍미다.

사부님이 마련해주신 돈이 적지 않고, 따로 거금을 융통할 신용도 충분했다.

게다가 사부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우인 탁 소숙과 지인들에게도 언제든지 필요한 금액을 구할 수 있지만.

해원기의 수중엔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

황신 대비만 해도 혼자서는 급하고 큰일에만 매달릴 뿐, 나머지는 주변 마을에서 자재와 인력을 동원해야만 한다. 직접 피해를 입을 지주와 부상들이 한껏 염출해도 부족한 자금을 해원기가 메꿔주어야 했다.

황신뿐인가. 장강의 물난리는 어찌하며 이미 피해를 입은 백성들은 또 어떻게 구휼하나.

때 없이 일어나는 지진, 해안을 휩쓰는 해일. 산불과 태풍도 잊을 만하면 덮쳐든다.

재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던가. 아니, 나라님은 아예 재난 구제엔 관심도 없는지. 수재와 화재보다 관의 수탈이 더 심할 지경.

미리 막을 수 있으면 다행이나 이미 벌어진 피해는 수습에 큰돈이 든다.

백 냥, 천 냥이 금방 만 단위로 바뀌고, 금원보(金元寶)도 발이 달린 것처럼 사라져서.

해원기 자신은 신발 하나 새로 살 여유가 없었다.

산과 들에서 노숙하고 되는 대로 먹을거리를 장만해 혼자 요리해 먹는 게 일상, 그러니 시정에 들어서도 싸구려 객잔과 길거리 음식만 먹게 된다.

다년간의 경험 덕에 나름 요리 솜씨도 생겼고, 다양한 음식과 맛을 알게 되었지만.

길거리 음식은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맛있는 음식의 위력을.

“와아!”

감동이 크면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탄성밖에 나오지 않는다.

호화로운 자리에서 고급 요리를 먹어본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 작춘권만 한 감동을 준 적이 없다.

소를 만든 건 흔한 채소 몇 가지와 돼지고기, 돼지고기도 비계가 잔뜩 붙은 싸구려. 콩물과 계란으로 만든 지단에 싸서 지지고 튀긴 단순한 음식이건만.

오미(五味)를 두루 갖추면 풍미(豐味)라지만, 오미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 풍미(風味)가 맞다.

이 작춘권은 두 가지 풍미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그야말로 치명적인 일격에 다름없었고.

일격을 당한 해원기가 입 안의 작춘권을 삼키지도 않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응어리진 옛 기억, 안타까운 심정이 사실은 별 게 아니었다.

불공평한 세상, 억울한 삶과 박복한 팔자가 뭐 그리 대단한가.

자신의 고달픈 인생을 남 얘기하듯 늘어놓는 노파의 손은 고급 요리도 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고,

그 지극한 풍미에 오만가지 상념에 들끓던 손님의 머리는 깨끗이 비워진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는 건 물 위에 뜨는 부평초가 마주치듯 인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건 다 까닭이 있다.

관심을 보이고, 말을 나눈다. 내 얘기를 들려주고, 상대를 살펴준다. 동전 몇 닢의 길거리 음식. 더 많이, 더 크게 만들어 팔면 이문이 더 많이 남지. 부스러기 은자 한 조각을 얻으려 춘권을 지지고 튀기고.

허나 단순히 돈 받고 음식을 주는 거래가 아니라, 지친 길손을 위하는 마음을 담으니 그 마음이 기막힌 맛을 내고, 그 맛에 배가 아니라 마음이 채워진다.

오고 가는 건 물질이 아니라 정(情).

느끼려면 정성(精誠)이 있어야 한다.

해원기는 자신이 한참 동안 잊었던 걸 되살리는 계기를 얻었다.

‘남을 돕는 무림인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뜻을 세웠고 사부는 그 뜻을 이룰 힘을 주셨다.

그렇지만 목표에만 지나치게 정신이 팔렸었다. 사람과 진정으로 어울릴 줄 모르면서 무슨 강호니 무림이니 따졌단 말인가.

‘사부님께서 평생의 좌우명까지 정해주셨거늘. 참으로 어리석구나, 원기야.’

고절한 능력을 지니고 사람들을 돕는답시고.

남을 저 아래 두고 보았다.

사람을 도우려면 스스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거늘.

어리석은 해원기가 크게 웃어젖혔다.

노파가 몸을 일으켜 걱정스런 표정을 지을 때까지.

이놈이 혹시 값을 치르지 않으려고 수작을 부리나?

절령제이(節令第二) 우수(雨水)

우수는 빗물이니 이때부터 비가 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 한기는 다 가시지 않아서 비보다 눈이나 진눈깨비가 내릴 때도 적지 않아.

참으로 겨울은 질기기도 하구나.

그래도 눈이 녹아야 비가 되리니 햇빛이 차츰 더 오래 비추고 더 따뜻해지기 시작하여,

비로소 봄기운이 도는 걸 느끼게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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