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5화 (16/410)

제4장 박병춘권(薄餠春卷) (3)

해원기가 텅 빈 호중객잔을 둘러보았다.

객잔 식구들은 다행히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떠나서, 증명단이란 소녀가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다.

객잔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침착함을 되찾은 해원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다. 진자현의 예상과는 전혀 달라.’

동쪽에서의 추적자가 없다.

시각은 이미 축시(丑時). 진자현 일당이 객잔에 온 지 벌써 두 시진째.

진자현이 고심해서 계획한 대로 대첨산까지 뒤쫓아 오지 못했나? 그렇다면 도리어 서쪽에서 온 관원 세 명은 무엇인가?

누구의 지시로 밤중에 호중객잔 밖에서 감시를 섰고, 또 황장촌으로 도주한 이들을 독살한 자는? 아니, 왜 불쌍한 화전민까지 전부 죽였을까?

당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진자현이 다른 아홉을 두려워했다는 건 잘못된 추측이었나.

미심쩍은 부분투성이다.

객잔 식구들은 진자현 일당을 끌고 태원으로 향한 듯. 그 뒤를 쫓아 진자현을 자세하게 문초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 추적자라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추적에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진자현의 흔적을 찾아낼 것이고, 끈질기게 뒤를 밟을 가능성이 있다.

강도 사건이 난 곳은 산동의 덕주.

해원기가 동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추적자를 찾는다면 객잔 식구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고,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소원, 맹세, 결심.

황장촌의 끔찍한 사건에 대해 끝까지 파헤쳐 죄를 물을 것이다.

오른 손목에 더는 천을 묶지 않고서 객잔을 떠났다.

푸른빛이 도는 눈이 한밤중의 험한 날씨를 샅샅이 꿰뚫어 보고, 느린 걸음이 신중하게 좁다란 길을 밟으며.

진눈깨비가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적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척은 숨긴 채로 작은 동정도 놓치지 않을 셈이다.

사상(事象)을 통찰하는 동시안, 입무의 보식(步息), 그리고 오행제림의 검왕수. 이 정도까지 신왕공을 전개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진눈깨비는 그치고,

어스름히 새벽이 밝아올 때쯤에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끝난 가파른 산길.

완만하게 이어지는 언덕 밑으로 곧게 닦인 관도가 보인다.

마침내 대첨산을 빠져나왔다.

‘비록 험한 날씨 탓에 흔적이 다 지워졌지만, 진자현 무리를 제외하곤 동쪽에서 대첨산으로 진입한 자가 없다.’

거의 두 시진 가까운 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좁고 험한 길을 걸은 탓에 어깨가 뻐근할 정도.

해원기가 공력을 풀고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일단 추적자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서쪽으로 빠져나간 객잔 식구들에겐 다행이지만,

모호한 상황에 대한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 진자현에게 다른 여덟에 대해 자세히 물을까 하는 생각이 또 들지만, 이것 또한 괜한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삼호니 칠호니, 사투리조차 꾸며댄 자들인데 기대한 답이 나올 리 없다.

황장촌의 촌민들을 모조리 독살한 흉수는 과연 누구와 연관되었을까.

“나 혼자서는 시간도 촉박하고. 흠.”

간밤에 대첨산 속에서 겪은 험한 날씨. 빠져나오자 새벽을 볼 수 있다는 건 비구름이 태항산맥에 막혀 아직 넘어오지 않았다는 뜻.

산서 쪽은 그나마 자신이 수로를 정비했으나 이렇게 비가 내리면 산동의 황신 대비가 더욱 급해진다.

몸은 하나.

황장촌의 참혹한 사건이 덕주에서의 의안(疑案)과 관련이 있다면 그 조사에만도 바쁠 터. 그렇다고 산동에서 황하가 범람하게 놔둘 수는 없는 일.

해원기가 요대자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었다.

“결국 도움을 얻는 수밖에.”

팅.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손에 든 것을 가볍게 공중에 튕겨 올렸다.

새파랗게 녹이 슨 조그만 동전 한 닢.

예전에 받아두긴 했어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녹슨 동전 한 닢을 잡아채며 시선이 관도를 따라 멀어지고,

“이 시각이면 경공으로 양곡현(陽谷縣)까지 한 시진. 아침에 거지를 찾는 건 쉽지 않은데.”

아직 한 새벽이니 관도를 오가는 이가 없어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경공을 펼칠 수 있다.

산동의 서쪽 끝은 양곡현. 황하문의 총타는 양곡현에서 동쪽으로 한나절 거리나 떨어진 제남에 있고, 덕주는 또 제남에서 북쪽으로 한나절이 넘는 거리.

황하문을 거쳐서 가는 것보다는 양곡에서 곧장 덕주를 향하는 게 훨씬 가깝다.

그러려면 신속하게 소식을 전할 수단이 필요하니.

육 년이나 요대자에 넣어두었던 개방(丐幇)의 전령전(傳令錢)을 꺼낸 것이다.

개방의 방주와 장로들만이 대지급(大至急)의 경우에 한해 사용하는 신물(信物).

이미 마음을 정했다.

더는 강호와 무림을 구분하지 않기로 한 이상,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아낌없이 쓸 테다.

산지와 언덕이 뒤섞인 산서와 달리 산동의 현은 규모가 대단히 크다.

양곡현도 속현(屬縣)을 두 개나 거느리고 주변에 스물두 개나 되는 마을이 널린 큰 고을, 현성(縣城) 안에만 이천호(二千戶)가 넘는 사람들이 거주해서.

해원기가 낮은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설 때쯤에는 벌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중이었다.

입춘이 지난 지도 꽤 되었지만 설에 붙여놓은 대련(對聯)들이 여전히 곳곳에 보이고,

아직 봄을 느끼기 어려운 추위에도 사람들은 벌써 생기를 되찾은 듯.

두꺼운 옷을 걸치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다가 해원기를 보고는 인상을 쓰며 피한다.

해원기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시골 촌락이 아니라 현성의 아침. 아침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게 당연하고, 이런 시간은 아직 거지들이 보일 때가 아니다.

밤새 진눈깨비에 흠뻑 젖었다가 현성까지 한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렸으니.

더벅머리는 누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넘어갔고, 전신은 땅바닥에 구른 것처럼 먼지투성이.

누가 봐도 아침나절에 행패나 부릴 작정으로 뛰쳐나온 상거지다.

호중객잔에 갔을 때도 형편없는 몰골이었는데.

‘지쳐서 주저앉지 않은 게 다행이군.’

증대랑이 차려준 평범한 요리, 좁은 객잔 방의 낡은 침상. 그나마 오랜만에 누린 휴식 덕에 버틴 건가.

슬쩍 한심한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스스로 택한 길이다.

철사처럼 뻣뻣해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눈에 드는 대련을 읽어보았다.

“춘회대지천반호(春回大地千般好), 복만인간만상신(福滿人間萬象新).”

대지에 봄이 돌아오니 천 가지 일이 좋아지고, 세상에 복이 가득하니 만 가지 형상이 새로워지네.

흔하디흔한 대련은 오른쪽 골목 어귀의 조그만 탄자(攤子) 위, 어울리지 않게 큰 휘장에 쓰인 글귀.

탄자란 길을 따라 늘어선 노점을 말하는데, 대부분 지붕을 올린 손수레에 화구(火口)와 조리대를 갖춘다. 손수레 가장자리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식탁을 꾸민 소규모 탄자에서 아예 천막을 치고 식탁을 펼친 경우도 많지만,

낚싯대 두 개로 휘장을 걸고 그 밑에 화로 하나만 있는 탄자라니. 그 휘장이 없다면 아예 있는지도 몰랐을 거다.

이리저리 탄자를 둘러보는 사람, 익숙한 가게에서 자리를 잡는 사람,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들고 음식을 사 가는 사람, 아예 제대로 된 반점을 향한다고 은근히 잘난 체하는 사람까지.

곳곳에서 풍기는 열기와 향기가 제법 북적이지만,

이 휘장만 커다란 탄자 쪽에는 얼씬거리는 이도 없다.

해원기가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며 코를 찡긋거렸다.

그럴 만도 하다.

숯도 아닌 생나무를 태워 매캐한 연기가 오르는 화로 위에 넓적한 철판 하나. 그 뒤 바닥에 삐죽 도마 한 귀퉁이가 보이니 조리대조차 없는 모양이다.

어느 곳이든 아침 식사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산동은 상당히 푸짐하게 먹는 편.

콩을 갈아서 간을 해 끓이는 두장(豆漿), 좁쌀에 물을 많이 부어 만드는 소미죽(小米粥)은 기본. 둘 다 숯을 써서 오래도록 불에 올려야 맛이 난다.

그리고 차지게 치댄 밀가루 반죽을 그늘에 두어 발효시킨 후 쪄내는 증막(蒸饃). 흔히 만두(饅頭)라고 하는 찐빵과 기름에 계란을 바짝 볶아내는 초계단(炒鷄蛋)이나 대파를 넣어 지지는 대총병(大葱餠) 등이 주식이 된다. 여기에 찐 계란이나 기름에 튀긴 꽈배기인 유조(油條)까지 준비하려면 아무리 줄여도 화구가 두세 개는 되어야 하는 법.

만두만 파는 탄자라면 아예 집에서 미리 쪄낸 만두를 손수레에 실어 오는 것이라 추운 날씨에 금방 식지 않도록 뜨거운 면포를 덮기 위해 화로 하나가 필요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화로 하나라니.

매캐한 연기를 손바닥으로 헤치며 다가간 해원기의 표정이 묘해졌다.

화로 위에 올린 철판, 둥그렇고 약간 우묵한 형태가 눈에 익어서 손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매달린 판과를 만졌다.

크기만 다를 뿐 자신의 판과와 같은 모양. 해원기의 것이 작은 평저과의 바닥 부분만 잘라낸 것인데 반해 화로 위의 것은 가장 큰 평저과를 눌러 편 듯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여보세요.”

일단 사람을 찾는데.

“어이쿠, 어서 오이소.”

화로 뒤에서 올라오는 백발. 바닥에 쭈그리고 있다가 일어서는데도 머리가 철판 위까지 밖에 올라오지 않는다.

비녀 하나 없이 낡은 천으로 묶은 거친 백발, 주름이 가득한 얼굴, 왜소한 체구에 구부정한 허리의 육십이 훨씬 넘은 노파. 말투도 이곳 억양이 아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긴 뭘 팝니까? 할머니.”

할머니라는 호칭에 히죽 웃는 입속엔 이도 거의 없다.

“마, 여기는 춘권(春卷) 하나밖에 없소.”

“호, 춘권이라. 이쪽에선 드문데. 아침거리가 될까요?”

“당연히 되지. 내 춘병(春餠)은 먹기가 좋아서. 그런데…….”

춘권이래더니 금방 춘병이란다. 게다가 말을 흐리며 해원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

비렁뱅이로 의심하는 걸 눈치챈 해원기가 얼른 요대자를 더듬었다.

잡히는 대로 손바닥에 올려 펼쳐 보이니.

“에, 그 삭은 동전 한 닢으론 턱도 없고, 쇄은은 내가 거슬러 줄 게 없는데에에.”

일부러 말꼬리를 늘여 곤란한 척. 그러면서도 얼른 바닥을 더듬어 철판에 기름부터 두른다.

해원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령전까지 꺼냈나. 하나 있던 은원보는 호중객잔에서 지불하고 거스름돈도 못 받았지.

콩알만 한 은자 부스러기 세 개가 전 재산.

“하나에 얼만데요?”

“얼마 안 혀. 고생깨나 했나 본데 하나 가꼬 되겠어?”

치이익.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말을 받는데, 나이답지 않게 손은 또 무지 빠르다.

철판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엔 지단을 만들고, 다른 한쪽엔 채소와 고기를 볶고.

지단도 그냥 계란이나 밀가루가 아니요, 채소 역시 배추와 홍당무, 마른 두부와 산채를 잘게 썰어 다진 돼지고기와 섞어 소를 만들 재료라.

화로 뒤에다 숨겨놓은 게 많기도 하다.

해원기의 쓴웃음이 진해지며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 눈앞에서 착착 진행되는 요리. 굳었던 몸과 무거웠던 마음이 절로 녹는다.

이 할머니,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건 계란 흰자위에 콩물이 들어간 지단이군요. 소에다 마른 두부와 산채가 들어가면 돼지비계랑 잘 어울리죠. 처음 봅니다.”

“호오, 총각이 요리를 좀 아는감? 여기 사람들은 이 맛을 잘 모르거든. 그저 두피(豆皮)나 먹을 줄 알지.”

“아까 춘병이라고 하시더군요. 할머니 말투도 그렇고, 남쪽에서 오셨어요?”

“그려. 난 본래 회양(淮陽) 쪽이라. 뭐 그래도 여기로 시집온 지 거반 오십 년이나 되는데. 말투는 영 고쳐지지가 않는구먼. 히히.”

해원기가 살짝 놀랐다. 회양은 하남(河南)에서 휘주(徽州)로 넘어가는 곳, 양곡현에서는 빠른 마차를 써도 보름이 넘게 걸리는 먼 곳이다. 노파의 말에 휘주 사투리가 섞였고, 춘권을 춘병이라고 다시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춘권은 본래 남쪽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고, 그곳에선 흔히 춘병이라고 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먼 곳까지 시집을 오는 경우는 드문데. 길거리에서 손님도 거의 찾지 않는 아침을 파는 처지를 굳이 원했을 리가.

간만의 손님이 반가워서일까. 노파는 묻지 않는 말도 술술 이어간다.

“열 살쯤일 거여. 내가 팔려온 게. 우리 집은 무지하게 가난하고 딸린 입은 또 많기도 해서. 휘주 차상(茶商)이 여기 양곡현의 부잣집에 계집종을 구해줄 때 냉큼 뽑혔거든. 워낙 인물이 좋은 데다 손재주까지 뛰어나서 말이여. 히히히.”

“아.”

“머리카락으로 꽃신도 지을 줄 알지, 한번 보면 웬만한 요리도 척척 해내지. 도련님의 굄을 받아 아기도 넷이나 낳았다구. 참 좋은 시절이었어. 자아, 일단 지진 것부터 먹어봐. 얼른 또 하나 해줄게. 이번엔 살짝 튀겨서… 에, 왜 그러나?”

조그만 주걱으로 맵시 있게 말은 춘권. 해원기 쪽으로 밀어내던 노파가 짓무른 눈을 껌뻑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손님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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