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박병춘권(薄餠春卷) (2)
비가 내린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비가 하염없이.
새까만 밤을 갈기갈기 찢어간다.
황장촌의 모옥은 총 열두 채. 크기야 각각 다르지만 하나같이 황토로 지은 허름하고 누추한 집들인데.
해원기의 발이 산 아래 평지로 이어지는 길목에 멈추었다.
무겁게 숙인 더벅머리가 푹 젖어 빗물이 줄줄 흐르고,
잔뜩 물기를 먹은 가죽조끼는 갑옷처럼 무겁고 딱딱해졌다.
그렇게 석상처럼 굳어서 참혹한 비를 온몸으로 두들겨 맞는다.
한 줄기 광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정신없이 모든 모옥을 돌아보았다. 지붕을 뚫고 벽을 부수고. 집주인이 보았다면 완전히 미친놈이라 여길 짓거리지만.
꾸짖을 집주인은 하나도 없었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중년을 넘긴 부부, 머리도 묶지 못한 소년과 앳된 소녀, 그리고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닐 꼬맹이들까지.
모두 스물네 명.
다 죽었다.
왕대평의 집이라 여겨지는 모옥의 셋을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은 전부 잠이 든 모습 그대로.
더러운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서로 얼싸안은 채, 한쪽 발을 침상 밖으로 내놓은 채.
진눈깨비와 차가운 비가 번갈아 쏟아지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사신(死神)이 휩쓸고 간 것처럼 공포스러운 광경,
졸지에 온 마을이 유령의 소굴로 화했고.
그 원인은 바로 독.
전부가 중독사.
이렇게 참혹할 수가 없고,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해원기의 가슴은 비분으로 터질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
먹고 살 길이 없어 대첨산 절벽까지 밀려나 화전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이들,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인데.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죽어야 하나.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삶을 마감했다.
힘없는 자들의 무고한 희생.
꼼짝도 하지 못하고, 하찮은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하고.
더구나 시신들에게서 계속 독기가 흘러나와 이런 날씨라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
해원기가 무거운 장탄식과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하아! 독에 대해서만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게…….”
말이 이어지질 않았고,
비통한 시선이 바닥을 흐르는 빗물에서 묶었던 천이 끊겨나간 오른 손목으로 옮아갔다.
시신들을 살필 때마다 제탁지검이 발동될 정도로 독기의 만연이 강렬하니, 황토 바닥에 스며들고 넘치는 빗물을 타고서 흘러나갈 지경.
불쌍한 시신들을 묻어줄 수도 없게 되었다.
허탈과 비통에 가슴이 꽉 막혔지만, 이 불쌍한 화전민들을 애도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위험한 지형.
깎아지른 대첨산 기슭에서 빗물이 빠르게 너른 땅으로 흘러갈 테니 자칫 더 큰 재난이 일어날 수도.
식지, 중지, 무명지.
손가락 세 개를 모으면서 어둠과 비로 덮인 황장촌을 바라보았다.
“용서하십시오.”
잠긴 목소리로 사죄하면서,
화륵.
세 손가락 끝에서 화염이 고요히 일어난다.
삼지화정(三指火正)으로 꺼낸 적멸검(寂滅劍).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파랗게 타오른다.
드문드문 늘어선 누추한 모옥들을 비통한 시선에 하나하나 담으며,
해원기가 오른손을 무겁게 휘둘렀다.
화아아아아아.
수십 장에 이르는 공간이 시야 속에 갇히고 열두 채의 모옥이 한꺼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짓을 저지른 흉수를 찾아서 그 죄를 물을 겁니다.”
목이 메도 흐트러짐 없는 말소리.
퍽퍽.
불길에 휩싸인 모옥들이 삽시간에 재가 되어 하나씩 사라지는데.
빗물이 눈에 들어갔을까.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에 아랑곳없이 붉게 충혈된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고,
해원기의 입매가 드물게 일그러진다.
“반드시!”
악다문 입에서 단호한 음성이 맹세했다.
땅속을 울리는 것처럼 무겁고,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음성.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목소리를 내어본 적이 없었고,
어쩐지 사부 특유의 저음을 닮았지만.
해원기는 스스로 전혀 깨닫지 못했다.
평소에는 어린아이처럼 푸른 기가 돌던 눈자위, 언제나 맑고 깊던 두 눈.
지금은 온통 새빨간 화염으로 물들어서 어둠과 비가 진저리를 치며 튕겨 나갔다.
어둠을 사르는 불빛, 폭우를 태우는 불길.
그건 모두 한 덩어리 업화(業火)와 같은 해원기에서 비롯되었다.
모옥을 재로 만든 불길이 이제는 젖은 땅바닥까지 삼키며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하늘에는 비, 땅에는 불.
깊은 밤은 어둠 대신에 피어나는 연기로 덮이는데.
심령(心靈)의 결계검(結界劍)이 독기를 남김없이 태워버렸지만, 새파란 불꽃은 여전히 손가락 끝에 매달렸다.
혼잣말은 해원기의 버릇.
“나는…….”
차가운 빗물이 타오르던 눈빛도 식혔을까.
눈꺼풀이 천천히 닫히며 악다물었던 입이 열렸다.
“무인(武人)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부님은 내 뜻대로 살아가라고 하셨지. 그래서.”
바로 곁에서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비통과 분노도 가라앉았는가. 뜬금없는 말이 자신에게 속삭이듯 이어진다.
“강호를 걸으며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려 했고. 그다지 무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사부님의 뜻을 이은 탁(卓) 소숙과 여러분들이 계신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에게 강호와 무림은 별개의 단어.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이 강호다.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에 모든 걸 잃고, 가혹한 세파에 시달리며, 강한 자가 설치는 행패에 할퀴어지는 이들.
오직 가족을 싸안고 친구와 형제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도우며 살고자 했다.
때론 슬픔에 마음을 닫고, 때론 분노에 삶을 포기하고, 때론 증오에 눈이 머는 경우가 없기를 바랐다.
자신에겐 힘이 있으니까.
쇠를 자르고 돌을 부술 힘, 만근 거석을 들어 올리고 천 리 먼 길을 달릴 수 있는 능력.
일체의 오류를 부정하고 모든 사악을 벨 수 있는 검.
사부에게 전해 받은 열 자루의 검을 그렇게 쓰고자 했다.
허망한 권력이나 뜬구름과 다름없는 명예, 부질없는 재물 따위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이상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무림이라는 그 이상한 세계.
신마(神魔)가 어떻고, 정사(正邪)가 어떻고, 영괴(靈怪)가 어떻고.
전부 관심이 없었다.
그 여파가 평범한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않으면.
사부와 함께 백 년의 혼란을 바로잡았던 분들이 여전히 굳건하게 무림을 지키고 있잖은가.
굳이 다시 고죽지보(孤竹之寶)를 끄집어낼 필요도 없을 터.
끊임없이 산길을 걷고, 황하와 장강을 오가며 수화지재(水火之災)를 막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육 년.
조그만 판과 하나를 걸고 장거리 쾌체라면서 지낸 세월이다.
그동안 무수한 사연과 곡절을 겪었지만.
“그게 사실은 스스로를 속인 도피였나 보다. 사람을 해치는 게 겁이 나니까. 나는 진짜.”
뚝 끊기고 감았던 눈이 뜨인다.
심해처럼 깊어진 시선이 다시 오른손을 향하고,
“바보야.”
삼지화정의 불꽃이 사그라진다. 소지(小指)가 붙으면서.
대신에 수도(手刀)처럼 세워진 오른손이 무시무시한 예기(銳氣)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지 않아서.
“무를 익힌 것은 바로 사람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 사부님께 배운 걸 쓰지도 못하다니.”
배움은 쓰임이라 하셨거늘.
강호와 무림이 뭐가 다르던가.
엄지손가락이 마침내 붙어서 드디어 곧게 펴진 손.
사지태백(四指太白)에 이은 오지미앙(五指未央)이요, 사지태백 고유의 찬란한 금광이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물처럼 투명한 일지광한, 나무처럼 뻗어가는 이지무성, 불처럼 타오르는 삼지화정, 쇠처럼 날카로운 사지태백, 그리고 대지처럼 튼튼한 오지미앙.
오행제림(五行齊臨)의 법결이 완성된 순간,
해원기의 오른손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뭉쳤다.
한 필의 비단이 사르륵 풀리듯 하늘거리는 삼척(三尺) 길이의 기운,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질기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묘(神妙)한 느낌.
오광(五光)이 두루 얽혔는데도 물에 잠긴 듯 은은하기만 한 형상.
그 형상이 환상처럼 드러나자 해원기의 몸이 누가 밀어 올린 것처럼 둥실 떠오르고,
마지막 혼잣말이 나왔다.
“이제부터 내 소원과 내 맹세, 그리고 주어진 이름대로 행하겠다.”
내 소원. 남을 돕는 무인이 되겠다.
내 맹세. 무고한 희생의 죄를 묻겠다.
그리고 주어진 이름.
오른손이 전면을 가로막은 대첨산을 향해 뻗자 신묘한 형상이 회오리치며 공간을 베고.
쾅!
대첨산이 통째로 울면서 바위 조각이 우수수 떨어지는 엄청난 위력.
아득한 절벽에 무려 삼장(三丈)이 넘는 검흔(劍痕)이 새겨졌다.
그건 바로 해원기의 결심.
육 년간 단 한 차례도 시전한 적이 없던 검왕수(劍王手)였다.
증명단이 입가를 닦으며 표정을 고쳤다.
“왕삼숙, 왕 포쾌의 밧줄을 풀어주고 진자현을 업게 해요. 왕삼숙은 이 전령을, 장이숙은 지게로 조정을 옮기고요. 엄마는 소주를 챙길 거지? 내가 앞길을 살피면서 빨리 움직여야 해.”
아직은 맘 편히 축하연을 열 때가 아니다.
상황은 여전히 모호하고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증명단 자신도 객잔 근처에서 의외의 암습을 받았지 않나.
가족을 안전히 지키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라 해원기라는 청년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부릴 수가 없어서.
다들 증명단의 지시를 이해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증대랑이 큰 봇짐을 등에 묶으면서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다.
“여길 떠나서… 음, 어디로 갈 거냐?”
막상 떠난다니 불현듯 치솟는 갖가지 감상. 그렇다고 아쉬움에 눈물짓는 연약한 성격은 아니지만.
“일단 태원으로요.”
“저놈들을 넘기려면 태원으로 가긴 해야지. 그러나…….”
“우리가 머물기엔 어울리지 않아요. 아까 얘기한 통판 대인만 만나고 바로 떠나도록 하죠. 사부님의 지인이니까 조금 도움을 청해보고, 마차라도 하나 구해주면 즉시 항산으로 가는 거예요.”
“항산? 그럼 결국 네 사부님께 신세를 져야 하나? 에휴.”
면목 없는 더부살이. 한숨이 나오는데.
“잘 됐죠, 뭐. 그러지 않아도 나이 많은 분이 혼자 있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불안했거든. 아예 오대산에 숨어서 죽을 때까지 도나 닦는다나 뭐래나. 엄마가 가서 잔소리 좀 해요.”
증명단은 오히려 은근히 신이 난 모양이다.
하긴.
하산을 서둘렀던 이유는 오직 가족 때문. 가족이 다 같이 항산으로 간다면 굳이 늙은 사부를 혼자만 남겨놓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가족이 억울하게 당한 이번 사건이 워낙 괴상해서 사부에게 묻고 싶었다.
왈가닥 용낭자라고 해도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일 뿐이다.
왕노삼이 이 전령을 짐짝처럼 들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이 덩치를 업고 가라고? 제길, 나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게 나을 뻔했잖아.”
지게를 찾으러 문을 나서던 장노이가 그런 왕노삼을 흘겨보았다.
“어쭈, 지랄한다. 재수 옴 붙는 소리 하지 마, 인마.”
걸진 욕이 나올 만큼 통증이 없다.
다 해원기라는 정체 모를 청년 덕분이지만 그저 또다시 은혜를 마음속에 새길 수밖에.
청년은 지금 어떤 상황이고 뭘 하고 있을까?
증명단이 나름 몸 상태나 체격을 고려해서 사람을 나눈 것.
그러나 이 때문에 다행히 가족을 하나도 잃지 않게 되었다는 걸 이때는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