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박병춘권(薄餠春卷) (1)
증명단의 목소리가 또 커졌다.
“그럼 그 해원기라는 사내가 진자현에게서 훔친 물건을 꺼내 갔다는 건데, 이거 훔친 걸 또 훔치는 도둑놈 아냐?”
내실에서 짐을 꾸리던 증대랑 역시 질세라 목청을 키우고,
“그게 지금 중요하냐? 우리를 도와준 건 분명하고 그 덕에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그것보다 여기를 떠나는 게 먼저라면서 넌 또 왜 거기서 떠들어?”
장노이가 얼른 증명단 옆으로 의자를 당기며 끼어들었다.
“자, 성질은 그만 내고. 형수님도 갑자기 떠나려니 속이 상해서 저러지. 그래, 네 생각에도 위험하다는 거구나. 그나저나 참…….”
모녀지간의 충돌을 막는 건 언제나 장노이의 몫이지만, 한쪽 팔에 부목을 댄 채 증명단의 차림새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한다.
눈에 확 띄는 독특한 복장도 그렇지만, 오랜만에 보는 질녀는 많이 변했다.
훌쩍 커진 키 때문이 아니라 전신에서 풍기는 성숙한 느낌. 아직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했으나 대단한 고수가 된 것 같다.
조정이나 진자량 같은 이름난 고수들의 혈도를 간단히 제압하고, 이 전령과 왕 포쾌를 다시 단단히 묶는 솜씨가 능숙하다.
장노이가 엉뚱한 곳에 산채를 엮는 어리숙한 산적이긴 했어도 그래도 한때 녹림의 물을 먹었기에 마혈과 아혈 정도는 위치를 아는 편.
허나 몇 개의 혈도를 동시에 때려 완벽하게 제압하는 쇄혈법(鎖穴法)은 구경조차 처음이었다.
‘처음엔 죽어도 싫다고 도망쳐서 돌아오곤 했었는데.’
본래 강한 성격. 고집스럽고 왈가닥이라 훌륭한 사부를 만난 기연을 굳이 부정한 아이.
지금의 명주보다 어렸을 때였지만, 그게 단지 억지만은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어머니 증대랑만을 닮은 게 아니다.
산채를 엮었다가 새 인생을 찾은 가족, 아버지의 병사, 장노이와 왕노삼이 끝까지 함께 하려는 걸 그 어린 나이에도 환히 알고서,
자신이 가장 노릇을 하려고 맘을 먹었던 모양. 그렇기에 찾는 이도 거의 없는 이 호중객잔을 떠나지 않으려고 기를 썼던 거다. 큰형으로 아우들을 품어주던 아버지처럼.
그랬던 아이가 이렇게 장성해서 마침 가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돌아왔으니.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감개가 일지 않을 수 없다.
왕대평, 왕노삼 역시 같은 심정이었던지.
“옛날 얘기에나 나오던 북악의 검, 명단이 항산검파(恒山劍派)를 잇게 될 줄이야. 큰형님이 이제는 마음을 놓으시겠지. 이거, 축하 잔치를 거하게 열어야 마땅한데… 이 쌍놈의 새끼들 때문에.”
영탄조로 말이 나오다가 욕설로 바뀌었고,
묶여있는 새끼줄을 더 단단히 조이며 왕 포쾌에게 부릅뜬 눈을 들이댄다.
“아문의 포쾌가 뒷돈 좋아하는 거야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아예 강도질에 끼어? 게다가 저번에 양천현을 거쳐 황장촌에 들른 게 결국 오늘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째 형님 팔도 부러뜨렸겠다, 이 나쁜 새끼!”
볼수록 화가 나서 대뜸 손이 올라가지만,
“왕삼숙, 참아요. 왕 포쾌가 있어야 우리가 편하니까. 나도 장이숙 팔을 보고는 똑같이 팔 하나 날리려다 억지로 참았다고요.”
증명단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는 말에 간신히 참았다.
왕 포쾌가 해원기에게 했던 말을 두 번째로 똑같이 진술했을 때, 식구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면서 다들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강 알게 되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섣불리 정할 수가 없었다. 이미 왕 포쾌가 밝혀낸 식구들의 과거, 수배된 적이 있던 산적들이었잖은가.
과감한 결정을 내린 사람은 바로 증명단.
“이언(李彦)이란 통판(通判)대인 알죠? 당신은 빼줄 테니까 이자들을 전부 강도질한 범인으로 압송해가요. 당신은 오히려 큰 상을 받을 거고, 이 대인이 안찰사에 사건을 넘기면 뒷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지. 우리 객잔에 관해서는… 알아서 할 눈치 정도는 있겠죠?”
예쁘장한 얼굴에 소녀다운 빠른 말투였어도, 왕 포쾌는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자신이 살길을 만들어준다는데.
태원지부 바로 아래의 통판대인과도 아는 사이. 더구나,
“나 누군지 알아요?”
증명단이 마지막에 눈에 빛을 머금고 묻는 말에 목이 빠지라 고개를 끄덕였었다.
“소, 소문은 들은 적이 있. 항산, 항산의 용낭자(龍娘子)라고. 네, 넵!”
목이 메여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그저 힘찬 대답만 거듭했다.
그렇게 객잔을 떠날 준비가 시작되었다.
몇 년 전부터 은근히 돌던 소문이었다.
항산에 여자귀신 하나가 나타났다고.
항산과 오대산 부근에서 못된 짓을 일삼는 토호나 악패들이 적잖이 징계를 받았다나.
생김새는 어린 소녀 같은데 어찌나 거칠고 왁살스러운지, 또 손이 매워 걸리면 멀쩡하게 끝난 적이 없어서.
뱀이 아닌 용과 같은 아가씨. 용낭자라는 외호가 붙었지만.
뒤에서는 나찰랑이니 여귀 같은 욕을 붙였단다.
토호, 악패와 결탁한 관청의 소리(小吏)들에게까지 알려진 이름.
여기 대첨산에 나타날 줄은, 객잔의 큰딸이었을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그 매운 손아래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강도들을 압송해 간 공로까지 보상받는다니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왕 포쾌가 어떤 생각을 하든,
증명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들어보니 간단한 얘기가 아니에요. 새북 장풍보가 비록 올바른 집단은 아니지만, 그 보주가 직접 강도질에 끼었다는 것부터, 그게 아홉이나 되는 무리에다 자기들끼리 또 딴 속셈을 차리고 묘한 짓거리를 벌이는 게 영. 더구나 훔친 물건이…….”
따져볼수록 머리 아픈 문제, 그리고.
“저 진자현을 말도 못 하게 만들어놓고 날름 들고 튀어버렸잖아요. 그 해원기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쾌체는 무슨 쾌체? 아유, 속 터져!”
참았던 성질이 확 일어나는데.
“그 오빠가 어때서? 그 오빠가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내실에서 소주가 종알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자 증명단이 쌍심지를 세웠다.
“오빠? 얼씨구! 요 계집애가 뭐에 홀려서. 주우글래?”
“흥, 공부를 마치면 뭐하나. 저 성질머리는…….”
“아, 시끄럽다! 지금 둘이 투덕거릴 때여? 요것들이 정말.”
을러대는 언니, 대드는 동생, 짜증이 난 엄마.
장노이가 부목을 댄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북악의 검을 계승한 용낭자면 뭐하나.
‘주우글래’라니. 하나도 변한 게 없구먼. 조금 전의 감개가 사라지려는 때에.
왕노삼이 몸을 돌리며 미간을 모았다.
“형님, 그 청년이 객잔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며? 혹시 다른 얘기를 한 건 없수?”
“어, 글쎄. 장거리 쾌체 일이라는 특이한 직업 빼고는. 무공을 지닌 줄도 몰랐고, 뭐 어떻게 손을 썼는지 본 게 있어야지. 우리를 다 멀쩡하게 만들어준 신통한 약은 또 뭔지. 이것 참.”
화제가 바뀌어서 장노이가 바로 대답하다가 입맛을 다셨다.
부러진 팔이 그저 삔 듯한 통증만 남았을 뿐인데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런데 왕노삼이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볼까.
“명단이가 놀랄 정도의, 장풍무명 진자현을 저 꼴로 만든 엄청난 고수. 쾌체라기보다는 사냥꾼 같은 차림새…….”
“왕삼숙, 왜 그래요?”
그러지 않아도 해원기의 정체가 궁금했던 증명단이다. 내실을 향해 언제 성질을 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왕노삼이 슬쩍 장노이의 눈치를 보았다.
“형수님과 형님이 다 화를 내겠지만. 음, 그게.”
자꾸 말을 끄는 게 답답해서 장노이도 앉았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뭔데 그래?”
증대랑이 마침 안 보여 다행이랄까. 왕노삼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돌아가신 큰형님께 여기다 객잔을 하라고, 객잔 이름은 호중이 좋겠다고. 그렇게 해주신 분이 누군지 잊었소? 객잔으로도 먹고 살기 힘들면 찾아오라고 하시던 그분.”
비밀스런 내용인가. 언제 적 일인지 기억도 가물가물.
조금 얼떨떨해진 장노이와 달리 증명단은 어렸을 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진정한 녹림의 주인, 녹림군자(綠林君子) 방(方) 어르신.”
아버지가 생전에 입에 달고 다녔던 이름이 고스란히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자,
기억이 퍼뜩 되살아난 장노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녹림군자 방송서(方送暑).
과거 흑도의 도적 떼에 불과했던 녹림을 완전히 뒤집어 의(義)를 지향했던 거물.
홀로 산림을 주유하며 못된 산적들을 내쫓고 의적(義賊)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했으니,
실로 녹림이라는 명칭이 강호에서 다시 쓰이게 된 건 전부 그 덕분이다.
무림에서는 이미 전설이 된 녹림의 진정한 영웅.
그를 만난 기연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호중객잔이 있으랴.
장노이가 은혜를 잊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운 낯이 되었다.
삼 형제와 형수, 집포통문으로 수배령이 내리자 이 대첨산으로 숨었고, 큰형 증길의 성을 따 산채를 엮었다. 허나 사람은커녕 짐승도 드문 이 험지에 어찌 과객이 있겠는가.
산속에서 굶어 죽게 된 멍청한 산적, 이 우습지도 않은 상황의 막판에 마침내 손님 하나가 걸려들었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산적들에게 껍데기까지 홀랑 벗겨져야 정상인데.
껍데기가 홀랑 벗겨진 건 도리어 달려들던 산적들이니 우스운 걸 넘어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 손님이 바로 험한 산중만 돌아다니며 산채를 찾던 방송서였으니.
이 불쌍한 산적들에게 갱생의 길을 일러주고, 덧붙여 일 년은 족히 버틸 재물까지 선사하곤 유유히 떠나버렸다.
벌써 십여 년이나 되었다.
“뭐예요? 방 어르신이 그렇게 새파란 청년일 리 없잖아요.”
해원기를 왜 가족의 은인과 연관시키는지. 얘기가 엉뚱해서 증명단의 동그랬던 두 눈이 확 째려보지만,
왕노삼은 더 묘한 소리를 이어갔다.
“아, 그게. 나는 밖에서 자주 소식을 듣곤 했거든.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녹림에 은밀하게 전해지는 얘기가, 방 어르신의 명으로 녹림을 지켜주기로 했다는 신비의 절세고수가 있다는 거여. 녹림구성(綠林救星)이라고 부를 뿐이지만 무고하게 핍박받거나 억울한 재난에 처하면 반드시 나타난다던데… 음, 아주 젊다더라.”
“노삼, 너 아직도 녹림이랑? 형님이랑 다 맹세했잖으냐, 다시는…….”
‘우리 녹림’이란다. 왕노삼이 여전히 산적들이랑 어울렸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 장노이가 불쾌감을 표하기 전에,
“에? 그럼 그 해원기라는 청년이 녹림구성이란 거예요? 흥, 말도 안 돼.”
증명단이 콧방귀를 뀌며 싹 무시해버렸다.
이 호중객잔에 일어난 오늘의 일은 전부 예측할 수 없었던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걸 이미 떠난 녹림과 연관 짓고, 도움을 주었다고 당장 녹림구성으로 여긴다? 억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허황된 소리를 무시한 증명단이 다시 내실로 향하다가 조그맣게 들리는 소리에 코를 찡긋거렸다.
치이익.
“이건 뭔 냄새야. 아,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지지는 소리와 고소한 향기.
어느새 내실 휘장을 뚫고 전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꾸린 봇짐이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너끈하게 둘러메고 나오는 증대랑 뒤에 소주가 넓은 접시를 받쳐 들고 나온다.
쑥스러운 듯 조금 어색한 표정이지만,
“아무리 급해도 이건 입에 하나 물려야지. 소주가 지졌다.”
증대랑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자 소주가 얼른 탁자에 접시를 올렸다.
“이거. 어렸을 때 언니가 자주 해주던. 난 솜씨가 젬병이라…….”
어물어물. 말이 뚝뚝 끊기는데.
‘주우글래’를 외쳤던 증명단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접시에 올린 건 전병(煎餠) 몇 조각.
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밀고, 그 위에 다진 파를 조금 뿌려서 평저과에 꾹꾹 눌러 지진 음식이다.
요리라 할 것도 없고, 특별한 풍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유일한 간식거리랄까.
물론 반죽을 얼마나 차지게 만드느냐, 얼마나 얇게 밀어 내냐, 얼마나 바삭하게 지져 내냐에 따라 식감은 천차만별.
지금 소주가 내온 건 전혀 얇지도 않고, 겉을 조금 태워서 부스러지게 생겼으나.
“잘 돌아와서, 음, 기뻐.”
오랜만에 만난 못된 언니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는 건 역시 부끄러울까.
붉어진 얼굴로 말을 마치곤 얼른 엄마 손에서 작은 봇짐을 뺏어 든다.
거침없는 성격의 증명단이 선뜻 손을 내지 못하고,
장노이와 왕노삼이 먼저 웃음을 흘렸다.
“이야, 간만이구나. 맛있게 보인다. 허허.”
“소주 솜씨가 그새 또 늘었네. 아주 얇은데. 흐흐.”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둘이만 보낸 어린 시절. 맨날 투덕거리긴 했어도 그 추억의 상징 같은 음식이다.
증명단이 그제야 전병 하나를 들어 덥석 물었다.
“움움. 이제 박병(薄餠)도 지질 줄 아네.”
두툼한 전병을 얇다고 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입가에 부스러기를 붙인 채.
“우리 소주. 다 컸다.”
그게 고맙다는 표현이겠지. 언니의 말에 붉어진 소주의 얼굴 역시 피식거리며 풀렸다.
온 가족이 비로소 다시 함께 있다는 걸 실감했다.
무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