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검왕오지(劍王五指) (4)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면서 바로 입을 열었다.
“낭자의 말이 옳습니다. 그냥 놔둘 일이 아니겠군요. 저들 네 명은 전부 산동에서 표행을 겁탈한 강도들입니다. 귀 객잔을 이용하려고 식구들에게 못된 짓을 하다가. 아, 우선 저 양반, 왕이라는 포쾌한테 설명을 들으세요. 그리고 되도록 서둘러 이곳을 정리하고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골치 아픈 일에 엮인 듯한 느낌. 흠, 빨리 정리되면 제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만.”
부산스럽기는 해도 이렇게 말을 정신없이 쏟아낼 성격이 아닌데.
숨도 쉬지 않고 단번에 말을 마친 해원기가 바로 몸을 돌렸다.
“에?”
증명단이 얼이 빠졌다.
갑작스럽게 와르르 밀려든 얘기, 아직 뭐가 뭔지 감도 잡히지 않는 판인데.
이 청년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객잔을 나가려 한다.
뭐지?
생각해보면 자신이 물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게 하나도 없었다.
“저기……?”
부르려던 손을 채 들지도 못했다.
스슥.
눈앞에 있던 해원기가 마치 물거품처럼 퍽 꺼져버리는 통에.
어안이 벙벙한데,
“귀, 귀신…이건 귀신이…….”
왕 포쾌의 신음 같은 중얼거림에 증명단이 정신을 차리고선 오만상을 지었다.
사람이 퍽하고 사라졌으니 귀신이라고 여길 법하지만, 이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는 뜻.
증명단은 이게 극히 고절한 경공이란 걸 알 수 있었고, 해원기라는 청년이 전력을 다할 정도로 급한 일이 생겼다고 추측했다.
사부의 눈에 띄어 무공을 배운 지 팔 년, 최근 삼 년은 아예 폐관으로 꼼짝도 하지 못했고 열아홉이 되고서야 하산의 허락을 받았다.
이 하산도 먼저 사부가 시킨 심부름을 처리하는 조건이었지만, 그만큼 강호초출(江湖初出)의 제자를 믿는다는 의미.
백 년 만에 본파(本派)를 중흥할 재목이라고 사부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셨나.
성급하고 왁살스럽지만, 타고난 기지와 감각이 뛰어난 편이라서.
해원기가 놀라운 경공으로 황급히 떠난 게 자신이 한 말 때문이란 걸 직감했다.
눈덩이를 뒤집어쓰고 은신했던 자들, 자신이 빠르게 접근하자 표창으로 암습했고, 대단한 실력은 아니어서 곧장 도주했다. 무엇보다 객잔과 식구가 걱정되어 그들을 놔주었지만,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
이 길을 아는 자들, 태원에서 자신보다 먼저 출발했다는 관차.
험한 날씨 속에서도 은신한 건 감시거나 뭔가를 기다렸다는 것. 이 길에서 감시할 대상은 객잔밖에 없다.
그리고 그자들이 도주한 방향이 동쪽이 아니라 황장촌으로 빠지는 샛길이니 확실히 객잔을 자주 왕래했던 인물일 것이요, 도주로를 정한 다른 이유가 또 있을 수도.
아울러 해원기라고 이름을 밝힌 더벅머리 청년의 정체.
무지 복잡하다.
“아, 짧게라도 설명을 해주고 가야 할 거 아냐! 그냥 냅다 튀어버리면 어쩌라구. 참 무책임한 사낼세!”
머리를 굴리려다 먼저 신경질이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니, 그 우렁찬(?) 목청에 객잔이 또 울리고,
성질을 내자마자 벽에 딱 달라붙은 왕 포쾌를 째려보았다.
저 인간에게 설명을 들으라고 했겠다.
눈빛이 검처럼 날카롭게 찔러, 이미 혼비백산한 왕 포쾌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정과 진자현도 무서웠지만, 어째 갈수록 태산인 듯.
그러고 보니 이 소녀, 별명이 ‘사람 잡아먹는 여자 귀신’이었잖아.
눈보라가 치면서 비까지 섞인 고약한 진눈깨비.
워낙 특이한 지형이니 날씨조차 이상한데, 얼음 조각이 퍼붓는 것 같은 눈과 비를 무릅쓰고 해원기가 엄청난 속도로 객잔을 떠났다.
증명단의 얘기를 들으면서 불쑥 마음속에 든 불안감.
자신이 어쩌면 소홀했을지 모른다.
아홉이나 되는 무리. 진자현을 제외하곤 어떤 자들인지 알지 못하면서 대강 진자현 정도의 고수라고 여겼었다. 그건 그저 왕 포쾌의 말에 근거해 자신이 추정한 것일 뿐.
‘그의 말 중에 주목할 점이 있었어. 포쾌의 경험에 의한 분석. 아홉이나 되는 자들이 손을 잡은 배경은 모호해, 만약 진자현이 정보제공자의 자격으로 끼었을 뿐이라면.’
치밀한 계획과 내응이 필수적이랬다.
목표는 더구나 궁중에서 큰 권력을 누렸던 태감의 이삿짐이다. 유명한 표국이 셋이나 호송하고, 각지의 관아와 군부가 동원될 만큼 거창한 표행.
하지만 표행 전체를 덮친 게 아니라 마차 하나만 빼돌린 듯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표가 마차의 호송 인원을 전부 죽였다고.
이 기묘한 계획과 생각지 못한 내응을 진자현이 준비했을 리 없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진 고수라도 그의 본거지는 새북. 혹시 이 표행의 정보를 제일 먼저 안 사람이 진자현이 아닐까.
이 전령이 제남부에서 들은 소문이 사실은 극히 귀중한 기밀이었다면?
진자현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동료를 구했기에 그 자격으로 끼어들을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일이 끝나자마자 즉시 도주할 궁리를 했고, 호중객잔을 제압한 것도 이치에 맞는다.
진자현은 두려웠던 거다. 나머지 여덟 중에 누군가, 혹은 묵계를 맺은 몇몇을.
‘다는 아니겠다. 삼호는 동북, 칠호는 교주 말씨라니.’
이렇게 따지면 새북, 동북, 교주는 전부 표행의 노선과는 동떨어진 외진 지역인데, 대체 누가 그렇게 모을 수 있을까.
‘범행 장소를 고른 안목도 남다르다.’
덕주는 하북에서 산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라 두 지역의 관아와 군부가 미묘하게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곳. 더욱이 관도와 샛길이 사방으로 퍼져 동서남북, 심지어 발해까지도 빠져나갈 수 있다.
지리에 환한 자가 세운 계획이다.
생각할수록 진자현에게 직접 진술을 듣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이런 일일수록 깊이 생각하고 두루 따져야 한다고 배웠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고.
숲을 보면 나무를 보지 못하고, 길에 정신이 팔리면 산중에 든 것도 모를 때가 있다.
큰 국면에만 신경 쓰거나 자잘한 사안에만 집중하다간 진짜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법.
그래서 항상 자신의 사유(思惟)를 점검하고 다시 되짚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배운 대로.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찾아가며,
왼손이 퍼붓는 진눈깨비를 가리듯 둥근 원을 그렸다.
갈수록 심해지는 진눈깨비, 이젠 지척도 분간하기 어렵고, 황장촌은 가본 적이 없다.
질풍(疾風)의 경공 속에서 해원기의 오른손이 손가락 두 개를 세웠고,
일지광한이라고 했던 식지와 바로 옆의 중지(中指).
두 손가락이 왼손이 그린 둥근 원의 가운데를 곧장 찔렀다.
위이이이이.
공간이 놀란 비명을 지르고,
눈보라와 얼음 조각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서 시야가 말끔해지더니,
진눈깨비가 마구 뒤엉켜 해원기의 앞을 치달린다.
길을 막던 진눈깨비가 거꾸로 해원기가 탄 마차를 끄는 말이라도 된 것처럼 먼저 달려 나가서,
해원기의 신형도 더욱 빨라졌다.
비록 손목에 다시 천을 묶어 무상십검(無相十劍)을 꺼내진 못해도,
천하유일의 신왕공(神王功)이 운용된 두 손가락.
일지광한에 이은 이지무성(二指茂盛)이 진눈깨비를 사역한다.
호중객잔은 대첨산의 숨은 길 가운데,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꽉 막힌 곳이고, 오직 남쪽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벼랑 하나가 있다.
진자현이 왕대평을 끼고 그 벼랑에서 불쑥 나타난 것을 객잔 지붕에서 발견했던 게 다행.
해원기의 동시안이 어둠 속에서 절벽에 붙은 듯 보이는 벼랑을 찾았고,
이지무성에 의해 사역당하는 진눈깨비가 이끄는 대로 해원기가 서슴없이 뛰어내렸다.
휘익.
진눈깨비를 공중으로 되돌리고 신왕공을 전신에 유포한 채. 이지무성이 여전히 시야를 확보한다.
보이는 건 그다지 깊지 않은 좁은 계곡, 그리고 계곡 한구석에 시커멓게 뚫린 구멍이다.
수천 겹의 층암(層巖)이 어지럽게 얽힌 구멍, 동굴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갈라진 틈에 불과한데. 더구나 마치 계단을 어지럽게 포개놓은 듯이 거칠게 아래로 구부러졌다.
한두 사람이 겨우 통과할 만한 좁은 구멍이라 경솔하게 움직이다간 이곳저곳이 찢어지기 십상.
동시안으로 구멍 입구에 찍힌 젖은 발자국을 확인하면서,
해원기가 다시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똑바르지도 않은 구불구불한 통로임에도 해원기의 신형은 아슬아슬하게 거친 바위를 피해 미끄러져 내린다.
객잔을 떠날 때는 한 줄기 질풍이더니, 지금은 살랑거리며 휘도는 미풍과 같다.
증명단이 쫓던 자들, 이곳을 얼마 전에 지나갔다.
계속 내려간다.
‘음.’
대첨산의 기이한 지형이 이룬 천연의 통로는 원래 계곡의 물이 산 아래로 새어나가는 작은 물길. 부드럽게 낙하하던 해원기의 시선이 아래쪽의 출구를 찾아냈다.
밖에서는 암벽을 타고 흐르는 작은 폭포처럼 보일 터.
왕 포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런 길이라면 익숙한 사람이라도 왕복 한 시진은 족히 걸린다.
‘대첨산은 거꾸로 박힌 창처럼 뾰족한 산. 산 아래 마을도 다른 곳처럼 완만한 기슭에 기댄 게 아니라 절벽에 붙은 모양이겠지. 객잔에 필요한 물자를 왕대평이 남몰래 전달하기에는 딱 알맞은…….’
말도 되지 않는 곳에서 산적 질을 하려다 개심해서 객잔을 세웠지만, 그 운영이 쉽지 않았고 큰형인 증길이 또 병사했다. 둘째인 장두병은 남겨진 형의 가족 곁에서, 셋째인 왕대평은 산 아래 황장촌에서 어떻게든 객잔을 유지하려 했겠지.
그렇게 의리로 지켜온 세월이 무참하게 무너진 오늘 밤.
마침내 황장촌까지 내려온 해원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가느다란 폭포 옆으로 나오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에.
가파른 산을 더위잡고 반 시진 정도 올라가 본 사람들은 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산 위와 아래의 날씨가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지무성까지 써야 했던 진눈깨비 대신에 무심하게 내리는 빗줄기.
진자현이 왕대평을 잡아 올 때에는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더니, 지금은 도로 비가 되었나 보다.
해원기의 눈에 들어오는 건 십여 호 정도가 듬성듬성 자리한 작은 마을. 험준한 대첨산의 절벽 끝까지 몰린 마을이니 궁벽한 화전민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오밤중이라도 이렇게 아무런 기척이 없다니.
어디에서도 생기가 전해지지 않고, 심지어 뒤를 쫓았던 사내 세 명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비에 씻겼다 해도 동시안을 피하긴 어렵다.
더구나 객잔에서 증명단과 지체한 시간을 감안해 이지무성까지 써가며 서둘렀는데.
해원기가 황급히 가장 가까운 모옥으로 향했다.
불길한 느낌이 더 강해져서, 그대로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다가 그만 우뚝 멈춰버린 발.
흐트러진 땅바닥 위에 나뒹구는 세 명, 이미 숨이 끊겼다.
셋 다 백색 천을 덧입힌 도롱이 차림, 흠뻑 젖은 종아리와 이곳저곳이 찢긴 도롱이로 보아 이들이 증명단을 피해 도주한 자들인 듯.
나무 침상 하나와 시렁 몇 개가 전부인 모옥. 한쪽 구석에 땅을 파고 불을 피우는 지로(地爐)가 있긴 해도 꺼진 지 꽤 되었고, 벽에는 낡은 옷가지와 조잡한 활 따위가 걸려있어서.
누가 사는 집이다.
얼핏 이곳이 왕대평이 살던 곳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중객잔으로 통하는 폭포 뒤의 좁은 통로에 가장 가까운 모옥, 여기서 진자현이 왕대평을 끌고 갔을 텐데, 지금은 누군지 모를 시체가 세 구.
해원기가 몸을 굽혀 쓰러진 자들의 도롱이를 들추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도롱이 안에 두툼하게 솜을 넣은 겉옷, 그리고 그 안에는 가슴에 용(勇)자를 박은 관복. 왕 포쾌와 같은 아역(衙役)들이다.
이들도 관차로 호중객잔을 여러 번 거쳤던 자들일 터. 증명단이 태원에서 자신보다 먼저 출발한 관차가 있다는 소릴 들었다더니.
그러나 관차는 핑계일 뿐이다.
흰 천을 덧댄 도롱이와 솜을 넣은 겉옷은 미리 야외에서 버틸 준비를 했다는 뜻이고, 굳이 객잔에 투숙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것도 다른 목적 때문이다.
태원에서 아역으로 일하며 관차로 대첨산 속에 숨겨진 객잔을 이용했던 자들.
대체 누구의 지시로 움직였을까?
이미 죽은 자들에게선 알아낼 수가 없다.
“후우. 엇?”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보려던 해원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뒹구는 시체를 바로 누이려던 손끝이 이상하고,
손목에 감아두었던 천이 저절로 끊기면서 손끝으로 맑은 기운이 벼락 치듯 뿜는다.
여전히 신왕공을 운행 중이었기에 몸을 침습하려는 탁기(濁氣)에 가차 없이 반응한 건,
바로 제탁지검(除濁之劍).
시체에서 전해지던 탁기를 단번에 베어버렸다.
해원기의 눈이 커지고 입에서 기합처럼 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
굽혔던 허리를 펴기도 전에 전신이 곧장 모옥의 지붕을 뚫고 치솟았다.
펑.
폭풍처럼 황장촌의 다른 모옥들로 날아간다.
불길한 느낌이 설마.
바위처럼 딱딱해진 해원기의 얼굴, 꽉 움켜쥔 두 주먹이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다섯 손가락 모두 하얗게 변했다.
십여 호의 황장촌, 궁벽한 화전 마을이 전부 독에 당했다면.
여간해선 떨리지 않던 다섯 손가락(五指)이 불안과 노기로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