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1화 (12/410)

제3장 검왕오지(劍王五指) (3)

나찰랑이니 여귀니.

‘사람 잡아먹을 년’이라는 여자에 대한 욕. 왁살스럽게 고함을 질러대는 여자에게 하는 욕이지만, 너무 심했다.

진짜 사람 잡아먹는 귀신일 리가 없잖나.

‘응?’

해원기의 시선이 객잔 문을 향했다.

남자 셋이 황장촌 쪽으로 급하게 도주하는 기척인데 엄청난 고함을 질러댄 여자는 뒤를 쫓지 않고 곧장 객잔으로 다가오는 듯.

여자의 움직임이 대단히 경쾌해 해원기가 감지한 순간에 이미 문 앞에 이르렀다.

콰당.

왁살스런 고함만큼 호쾌하게 열어젖히는 문.

눈보라가 밀려들기 전에 새까만 옷자락이 먼저 펄럭였다.

“아니, 다들 뭐하느라… 어?”

어지간히 낭랑한 목청이 불만을 토하다가,

벽면을 보면서 입이 딱 벌어졌다.

계단까지 벽을 타고 조르륵 늘어앉은 넷.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앓아누운 셋과 얼이 빠져 쳐다보는 하나,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더벅머리 청년.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해 새까만 옷자락의 주인이 눈만 되록되록 굴리는데.

해원기 역시 들어온 인물이 전혀 예상 밖.

여자. 아니, 소녀, 그것도 예쁘장한 소녀다.

오밤중에 눈보라 속에서 마주쳐도 사람 잡아먹는 귀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소녀.

겉에는 커다란 창의(氅衣)를 걸쳤지만, 드물게 온통 검은색이라 학창의가 아니라 오창의(烏氅衣)라 불러야 할 듯. 더구나 옷 전체를 휘감는 용 한 마리를 또 검은 실로 수놓아서. 여간해선 볼 수 없는 진기한 겉옷이고, 안에는 어울리지 않게 짙은 청색의 도복(道服) 차림이다. 오창의의 넓은 소매에서 삐져나온 두 손에는 손등까지 덮는 가죽 토시, 발에도 사슴 가죽으로 만든 녹피화(鹿皮靴).

훌쩍한 키를 더욱 늘씬하게 보이게 하는 차림새지만, 반면에 널따란 방립(方笠) 아래는 분을 바른 듯 흰 얼굴.

짙은 눈썹에 또렷한 눈,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이 선명해서 나이는 많지 않아도 꽤 성깔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오창의 어깨 한쪽으로 삐죽 올라온 검병(劍柄).

도복처럼 짙은 청색인데 손잡이 끝의 동그란 운두(雲頭)에는 붉은 수실이 눈길을 끌고, 그게 또 방립 위로 틀어 올린 머리칼을 고정시킨 홍옥잠(紅玉簪)과 같은 색이라.

참으로 강렬해 누구라도 한번 보면 잊지 못할 인상이고, 보통의 여자가 입을 의상이 아니다.

게다가 비바람에 눈보라가 섞인 고약한 날씨 속을 뚫고 왔건만, 그다지 젖은 곳이 없다.

붉은 수실이 달린 검병이 아니더라도,

평범치 않다.

혹시?

마침 왕 포쾌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었던 터라, 자연스레 다른 도적 무리의 추적자를 떠올리게 되어서.

해원기의 눈썹 끝이 꿈틀하는 순간.

소녀의 짙은 눈썹이 홱 일어섰다.

소녀의 시선은 이미 관복을 입은 왕 포쾌와 군복을 걸친 이 전령을 거쳐 요리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구멍이 뚫린 바닥을 훑었고, 낭랑한 고함이 또 터졌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네 이놈!”

파라락.

“으헤엑.”

오창의가 폭풍처럼 날려 덮치는 바람에 왕 포쾌가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데.

해원기 역시 살짝 놀랐다.

아무리 작은 객잔이라고 해도 문에서 해원기까지는 열 걸음 정도 떨어졌건만,

확 하고 바로 목을 잡아 오는 하얀 손.

왈칵 오른쪽으로 젖히지 않았다면 단번에 목이 잡혔을 속도다.

허나 소녀의 손목이 꺾이면서 손날이 횡으로 쓸어오고,

해원기가 오른쪽 무릎을 꺾어 몸을 낮추며 물러섰다.

핏, 핏.

그런데도 소녀의 손을 벗어나질 못한다. 횡으로 쓸어오던 손이 확 펴져 정수리를 노리니.

대단히 빠르고 강하다.

해원기가 꺾인 오른쪽 무릎을 축으로 허리를 틀었다.

빙글빙글. 춤추듯 세 번이나 회전해 계단 아래쪽으로 돌아나가려는데.

파락.

검은색 오창의도 거의 동시에 휘날리고, 소녀가 훌쩍 계단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돌연히 공중에서 해원기에게 떨어지는 한 줄기 섬광.

날카롭고 맹렬해서 피할 곳이 없다.

쨍.

쇳소리와 함께 오창의가 또 한 차례 공중에서 펄럭이더니 소녀가 내실 입구에 내려섰다.

마치 검은 구름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지만,

놀란 표정이 앞으로 겨눈 자신의 검을 거쳐 상대를 향한다.

어느새 뽑아 내리쳤던가.

“손가락?”

어처구니가 없어 입술 사이로 말이 새어 나왔다.

구름무늬가 은은히 어린 검신, 척 보기에도 상당히 공을 들여 제작한 보검인데.

이 보검을 막아낸 건 겨우 손가락 하나.

이게 말이 되나.

해원기가 식지를 굽혔다 펴면서 아픈 표정을 지었다.

“잠깐, 잠깐 기다려 봐요. 이렇게 정확한 직도황룡(直搗黃龍)은 처음 보는데, 당신은 누굽니까? 아, 아파라.”

아프다고? 더 기가 막힌다.

허나 섣불리 다시 달려들 수는 없었다. 소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건 자신이 등진 내실 안의 기척을 살피기 위함이었지만, 손가락 하나로 자신의 검을 막은 눈앞의 청년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

그래도 불같은 성격이 대뜸 말을 받았다.

“당신은 누구냐고? 그건 바로 본 낭자가 할 소리. 우리 객잔에서 이런 희한한 짓을 벌이다니. 식구들을 전부 잠재우고 관차로 나온 이들을 저렇게 두들겨 팬 네놈이야말로 대체 누구냐?”

목소리가 객잔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지만,

해원기를 겨눈 검극은 미동도 하지 않고 기이한 기운을 흘리기 시작한다.

내실에는 백초환을 삼킨 네 사람이 회복을 위해 잠들었고, 이 전령과 왕 포쾌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군복과 관복 차림.

해원기가 아프다는 손가락으로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긁었다.

맞는 말. 멀쩡하게 혼자 서 있는 건 자기뿐이니 누구라도 의심할 상황 아닌가.

마치 객잔 사람들을 잠재우고 관차를 털고 있던 강도 같겠지.

“그게… 엇?”

어떻게 설명하나 말머리를 찾다가, 문득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쁘장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왁살스러운 목청을 지닌 소녀, 이 소녀의 말에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 귀에 꽂혔다.

‘우리 객잔’과 ‘식구들’이랬다.

“설마, 공부하러 타지로 떠났다던 증대랑의 큰따님? 몇 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던 명주 아가씨의 언니? 맞습니까?”

황망하게 머리를 긁던 손이 위로 쑥 올라가 먼 곳을 가리키고, 왼손은 내실 쪽을 향해 흔드는 통에.

소녀가 움찔, 왼손을 꼿꼿하게 세웠다.

상대가 손을 쓰는 줄 오해했지만, 이 빠른 반응도 더 이어지진 않았다.

검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데 부산스럽게 손짓을 더하며 묻는 엉뚱함.

먼 타지로 떠났다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고. 들은 얘기란 걸 강조하는 손짓까지 덧붙이니.

바본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면서,

소녀가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이 엉뚱한 작자의 부산스러운 반문에 얼떨떨해졌으니까.

“에? 우리 엄마, 소주를 알아요?”

말투부터 달라졌고,

겨누었던 검극도 기운을 잃고 아래로 처진다.

서로 대답도 없이 계속 묻기만 했던 두 사람이 비로소 궁금한 시선을 마주했다.

오해와 우연이 겹쳤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아, 저는 처음으로 투숙한 해원기라고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려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식구들이, 왕삼숙까지 넷이나, 다 괜찮은가요?”

“네에. 다들 무사하십니다. 그런데 진짜 명주 아가씨의 언니 맞는 거죠?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 척 보면 몰라요? 내 이름은 증명단(曾明緞)이고, 산에서 내려와 엿새나 걸려 겨우 집에 도착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멀쩡했던 집이 이런 난장판이. 아, 그보다 당신은 정체가 뭔데, 직도황룡을 어떻게 알아보는, 아니지. 그 손가락은 뭐죠?”

해원기의 말이 번번이 끊겼다.

증명단이란 소녀, 목청만 큰 게 아니라 엄청 급한 성격이라 남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니.

대화가 되질 않는다.

해원기의 어깨가 처지고 한숨이 나왔다.

증대랑을 닮은 억센 기질, 소주와 비슷한 빠른 말투. 이 객잔의 큰딸이 틀림없겠지만,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타지에 공부하러 갔다는 게 무공이었을 줄이야. 더구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한 성취를 이룬 것 같다.

몸을 움직이는 신법, 왼손 하나로 연달아 몰아치는 수법, 순간적으로 발휘하는 검법.

천부의 자질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부단한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검기(劍氣)를 뜻대로 흘리는 건 내공이 견실하다는 증거지.’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녀라고 믿기 어렵다.

그리고 그 검법.

해원기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던 초식.

그건 분명히 복룡검식(伏龍劍式)의 일초이기에.

이미 강호에 많이 유전(流傳)되긴 했어도 본래 오악검법(五岳劍法)의 하나요, 그 초식을 이렇게나 정묘하게 구사하는 이는 거의 없다.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간다.

복룡검식으로 구주정문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항산검파(恒山劍派)가 사라진 지는.

증명단이란 소녀는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을까.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지지만.

그보다 한숨을 내쉰 건 다른 이유.

내력을 짐작하기 어려운 실력,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무공.

그러나 기질과 처사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왈가닥 소녀다.

성급하고, 제멋대로 판단하며,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가족들이 어떤지를 대충 파악하곤, 관차로 오인했던 네 명에겐 관심도 없으며, 돌연히 해원기의 손가락이 궁금하단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슬그머니 맥이 빠지려다가 처지던 어깨가 다시 올라붙었다.

홀연히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명단 낭자, 잠깐만요. 그것보다 방금 누군가를 쫓다가 온 것 같던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증명단이 호쾌(?)하게 객잔으로 뛰어 들어와 난리를 치는 바람에 잊을 뻔한 일.

해원기를 요리조리 훑어보던 증명단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훌쩍 뒤로 돌렸다.

스릉.

손목만 튕겼는데 검이 제대로 돌아 검집에 꽂힌다. 등에 멘 검집에 손도 대지 않고 검을 수납하는 건 노련한 검객이어야 가능한 일.

역시 평범하지 않은 솜씨인데.

“몰라요. 태원에서 나올 때, 먼저 출발한 관차가 있다는 소릴 얼핏 들었는데. 날씨가 어째 이상해지더군요, 그래서 내가 데려가는 게 낫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들어 부리나케 달리다가 집이 가까울 즈음에, 음, 표창 나부랭이가 날라 오지 뭐예요. 눈을 뒤집어쓰고 숨어있었나 본데. 나 참, 기가 막혀서. 여긴 산적도 포기한 곳인데 어떤 놈들이…….”

조잘대는 입은 영락없는 십 대 소녀.

산적도 포기한 곳에 위치한 호중객잔의 큰딸, 증명단이 빠르게 입을 놀리다가 다시 묘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데 그쪽은 뭐 하는 사람이죠? 어떻게 우리 집을 알고, 처음으로 왔다고요?”

말하다 보니 의심이 뭉클 인다.

산새도 넘기 어렵다는 대첨산 속에 숨겨진 길이다. 이전에도 극소수의 관차와 그 관차를 통해 소개받은 믿을 만한 이들만 손님으로 받았었다. 비록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변했을 리 없다.

이 사냥꾼 차림의 더벅머리 청년은 정체가 뭘까.

그러나 증명단이 의심을 풀 여유는 없었다.

사람이 바뀐 것처럼 어리숙하던 청년의 인상이 신중하게 변하고, 두 눈에서 맑은 빛이 반짝이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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