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검왕오지(劍王五指) (2)
“흐음, 표행을 보호해야 할 보표(保鏢)가 오히려 동료를 죽였다?”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왕 포쾌의 말대로 희한한 일이다. 표행을 덮치는 겁표(劫鏢)를 어떻게든 막아내는 게 보표의 일. 표국에 속한 이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는 법이거늘.
동료를 도륙했다는 말은 믿기 어려우면서 동시에 불쾌했다.
“그, 그렇죠? 정말 희한한 일이었습니다만, 그런 짓을 벌인 자도 이미 복면을 해서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
“복면인이 모두 몇 명이었습니까?”
“그, 글쎄요. 저와 이 형은 그저 진 보주와 조 형 뒤를 쫓기도 바빠서. 열다섯? 열여덟? 한 스무 명 정도일까. 하여간 우리까지 아홉 무리인 건 틀림없습니다.”
사람 수도 제대로 세지 못하면서 아홉 무리란 건 어떻게 확신할까.
“아홉이요?”
“그렇다니까요. 그 마차 안에 짐이 꽉 차 있는데도 딱 시커먼 함 하나만 열더라고요. 그 함 안에 바로 고거, 고 상자가 아홉 개 있었거든요. 그걸 하나씩 나눠 가지고 헤어졌으니까.”
왕년에 정도의 무인이었든 아니든 아문의 포쾌인 건 맞는 듯. 사람 수는 정확히 몰라도 분배한 물건을 헤아리는 눈썰미는 있는 모양이다.
해원기가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들어주니 문초란 걸 또 깜빡 잊고,
왕 포쾌가 한패라도 된 것처럼 열띠게 입을 놀렸다.
“마차가 행렬에서 슬쩍 빠진 것, 특별히 그 마차 하나만을 노렸던 것, 호송하던 이들이 별반 반항도 못 하고 죽은 것. 이런 일련의 상황을 따져보면 간단한 게 아닙니다. 다년간의 포쾌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건 미리 치밀하게 계획이 된 일이요, 아울러 믿을 만한 내응(內應)이 있어야 가능하죠. 에헴, 표행의 소식이 퍼진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계획과 내응까지 완벽하게 준비했으니 뛰어난 지모(智謀)뿐 아니라 연줄, 돈과 권력이 다 갖추어졌다고 봐야 이번…….”
“그렇군요. 아홉 무리의 도적 떼라.”
“마, 맞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원이 필요했던 거죠. 쩝.”
너무 떠들었나.
해원기의 ‘도적 떼’라는 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결국 자신도 도적 떼의 한 명에 불과한 처지, 쓸데없이 잘난 척한 실태를 깨닫고 눈치를 보는데.
해원기가 잠시 미간을 모았다가 다시 상자 갑을 들어 올렸다.
“이게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분배했는지 압니까?”
문초라도 대화가 끊기지 않은 게 다행, 왕 포쾌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에, 처음엔 무리가 몇이나 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대강 눈치로 다른 자들과 손을 잡았다고 짐작만 할 뿐. 치부한 환관의 낙향이라니, 당연히 금은재보를 노리는 걸로 알았죠. 진 보주와 조 형 모두 자세한 얘기는 해주질 않아서… 그 자리에서야 서로 번호로 부르는 걸 들었고, 무작위로 나눠 가지더군요. 뭐 겉으로 보기엔 다 똑같은 상자 갑, 내용물이 뭔지 이미 알고 있는지 군소리 없이 집어 들고 인사도 없이 헤어집디다. 빠르고 깔끔한 처리랄까, 하여간 헤어지자마자 저와 이 형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닦달해가지고. 그렇게 여기로. 네.”
그리고 이 꼴이 되었으니.
더 할 말이 있을 리 없고, 그럭저럭 말을 받아주던 해원기의 표정이 심각해져서.
왕 포쾌가 잔뜩 주눅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결국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른다.
바로 앞의 더벅머리 청년. 스물예닐곱? 아무리 많이 봐도 서른 전일 터. 얼핏 사냥꾼으로 여길 낡은 옷차림에 평범하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거대한 산을 마주한 듯, 아득한 바다를 대한 듯 숨이 꽉 막히는 느낌.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이렇게 위압감을 주는 이가 없었다. 태원의 지부(知府)대인도, 아니, 안찰사(按察使)나 포정사(布政使)같이 어마어마한 고관도 이렇지는 않을 터.
허나 그 느낌도 금방 사라지고,
해원기가 상자 갑을 허리띠에 넣으며 짧게 혀를 찼다.
“쯧, 도적 떼끼리 신의가 있을 리 없지. 마침 이 객잔이 있으니까. 억울하게도 엉뚱한 일에 휘말렸구나.”
왕 포쾌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해원기 자신이 이 일에 휘말려 억울하다는 것도 아니다.
왕 포쾌의 상세한 진술(?)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거의 알게 되자,
내실에 있는 네 사람에 대한 염려가 더욱 커졌다.
뭔지도 모를 상자 갑 하나 때문에.
표행을 노린 겁표는 본시 강도질이지만, 정사가 문란한 당세에는 도리어 의로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백성의 고혈을 착취하는 각지의 토호, 무거운 과세로 사복을 채우는 관리, 무력으로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는 군부. 그들을 징계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남송(南宋) 양산박(梁山泊)의 영웅들을 본받는 이도 있었기에.
물론 뜻이 옳다고 행위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백도를 지향하는 이들은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기기 일쑤요, 흑도를 걷는 자 역시 함부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놓고 일을 벌이는 쪽은 녹림 산채 정도일까.
녹림이란 게 원래 핍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도적이 된 것이니까.
소위 관핍민반(官逼民反)이란 거다.
허나,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명을 해치고 재화를 탈취하는 건.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 그야말로 승냥이 떼다.
‘승냥이 떼.’
진자현과 조정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짐작이 간다.
강도질을 벌인 패거리가 아홉.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을 모았겠지만, 일이 성사된 후에는 인원이 많은 게 오히려 불편했을 터.
어차피 노리는 게 같아서 함께 했을 뿐이다. 욕심이란 게 남과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건가.
겉으로야 똑같이 나누었어도, 왕 포쾌의 말처럼 빠르고 깔끔해 보여도 실상은 하나라도 더, 아니, 아예 전부를 삼키고 싶은 게 욕심의 본질.
아홉이나 되는 무리 안에는 이미 서로를 견제하는 암투가 벌어졌을 공산이 크고, 개중에는 미리 선수를 쳐 묵계를 맺은 작자들도 있을 것이다.
진자현이 해원기를 삼호나 칠호가 보낸 추적자로 오인한 배경.
그래서 사전에 왕 포쾌와 이 전령을 끼워 넣었던 거다. 다른 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도주로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험준한 대첨산에 숨겨진 길, 그리고 극소수의 인물만 아는 객잔.
산동 덕주에서 헤어져서 곧장 섬북으로 향하지 않고 굳이 산서를 통하는 길을 고른 이유요, 그 때문에 호중객잔의 식구들이 이유도 모른 채 억울한 재난을 당해야 했다.
아울러.
새북의 패자, 장풍보의 주인인 진자현 정도의 고수가 일찌감치 맞상대를 포기했으니.
다른 여덟이 결코 진자현에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다는 방증이다.
‘이곳만이 아닐 거야.’
진자현만 노렸겠나.
아홉 중에서 진자현처럼 혼자 빠져나갈 계획을 세운 자를 먼저 목표로 삼은 무리가 벌써 움직였겠지.
서로 뒤를 노리고, 서로 물어뜯고.
먹이를 독점하려고 상잔(相殘)하는 승냥이 떼가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밖에.
생각을 정리하면서 해원기가 탄식을 덧붙였다.
“허! 어째 황신(黃汛)을 대비하는 것보다 더 힘들겠다. 눈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도 속상하는 판에…….”
“네? 황신이요?”
왕 포쾌가 의아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해원기의 안타까운 혼잣말 중에 귀에 익은 한 단어. 이 청년 협사께서 갑자기 왜 이런 단어를 입에 올리지?
황신은 산서와 하북, 그리고 산동의 일부 지역에서만 쓰는 단어요, 그것도 이맘때가 아니면 거의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황하 유역이 아니면 그 의미의 심각함을 알기 어려우니까.
가을 내내 건조하면 황하가 바닥을 드러내고 그대로 겨울이 되면 더 심해져 아예 땅이 바짝 말라버린다.
그 위에 몰아닥치는 추위는 지반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어,
만약 다음 해 봄에 갑자기 큰물이 덮치면 상상도 못 할 재난을 일으키는 법.
산서의 황토고원을 제멋대로 휩쓸고 태항산 줄기를 넘을 때에는 폭포처럼 떨어져서는, 하북으로 끌어들인 지류나 산동의 제수(濟水)를 마음대로 헤집어버린다.
더구나 때로는 커다란 얼음덩이가 황하의 근원에서부터 녹지 않고 떠내려온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
서천(西天)에 있다는 빙봉(氷峰)이 황하의 시작이란 걸 그래서 알게 되었단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강을 따라 흐르며 녹겠지만, 황하는 바로 황토를 잔뜩 머금은 흙탕물.
그 위를 녹지도 않고 미끄러지며 제방을 부수고 수로를 바꿔버린다.
그러지 않아도 겨우내 바짝 마른 흙덩이, 광란하는 흙탕물과 쇳덩이와 다름없는 얼음덩이를 어찌 버티랴.
황하를 젖줄로 삼는 백성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갑자기 따뜻해지는 봄이 되면 황하 근처의 삶은 하루하루 불안해지기 마련이고, 각 성(省)의 관리들도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한다.
여름 장마의 홍수가 아니다.
황하의 수재(水災)는 바로 봄에 일어나고,
이를 일러 황하가 만조(滿潮) 때처럼 밀려온다고 신(汛)이라고 했다.
황신. 입춘이 지났으니 그 공포가 또 밀려올 때다.
태원부의 포쾌를 십여 년이나 했으니 아주 말단일 때에는 이 황신을 경계하기 위해 차출되어 황토 먼지를 실컷 먹은 적도 많지만.
왕 포쾌는 해원기가 갑자기 왜 황신을 거론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 다른 얘기입니다. 그나저나 당신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로군요.”
해원기가 자신의 실언을 모른 척 인상을 써서.
왕 포쾌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황신이든 뭐든 궁금해할 처지가 아니지.
문초가 끝나면 판결, 그 다음은 처벌이다.
승선포정사(承宣布政使)의 지휘를 받는 태원지부(太原知府)의 아문에 속한 포쾌라도 잡아 온 죄인의 처리는 제형안찰사(提刑按察使)의 직무.
물론 좀도둑이나 소매치기 따위는 아문에서 대충 처리할 수 있지만, 탐관오리나 반역자 같은 큰 죄인을 다룰 때에는 안찰사의 판결에서 처벌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공초(供招)와 심문(審問), 도중에 정상을 참작하거나 연줄을 대 감형이나 사면의 가능성도 생기는 시간.
허나 지금 이런 생각이 무슨 소용 있나?
범행을 현장에서 제압하고 물증을 모두 확보했으며 관련 문초까지 끝낸 해원기는,
그야말로 포정사면서 안찰사. 게다가 사람 목숨 따위 하찮게 여기는 무림인 둘을 반송장으로 만들었으니.
여기서 네 명의 목을 제꺽 잘라버릴 수도 있겠다.
“자, 잠깐. 저는, 저는 그냥 끌려다녔을 뿐.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자들이 시키는 대로, 그리고, 그리고 아는 걸 다 말씀드렸으니 다 죽이더라도 저만은, 저만은.”
죽는다는 생각에 입술이 마구 떨려 ‘살려달라’는 말도 얼른 나오지 않는다.
애걸복걸, 그저 제 한 목숨 살자고 떠드는데,
“엥? 뭔 소립니까?”
해원기가 도리어 얼뜬 표정이 되었다.
“전 사람 안 죽여요. 그런 끔찍한 말을…….”
어처구니없어서 머리를 흔들다가,
쉿.
돌연 식지를 입술에 대며 말을 멈추었다.
아무 소리 내지 말라는 신호, 시선이 얼핏 푸른빛을 번뜩여 왕 포쾌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심각하다가 어리숙하고, 얼뜨게 보이다가 또 이렇게 진지하다.
종잡을 수 없어서 더 두렵고,
차라리 혈도를 찍혀 기절하는 게 낫겠다는 심정까지.
챙챙.
“이것들이! 거기 안 서? 죽는다아아!”
덧창까지 댄 객잔, 밖에는 눈보라가 치는데 이렇게 선명하게 들린다면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고함일 게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 몇 번, 그리고 이 왁살스런 외침.
게다가 머리가 쭈뼛 설 정도의 고음이니.
점차 가까워지는 소란스러움에 귀를 기울이던 해원기의 눈이 둥그레졌다.
‘여자?’
동네 왈패가 을러대는 듯한 목소리는 놀랍게도 여자 목소리고,
뒤를 이어 비로소 당황한 다른 음성도 들리기 시작했다.
“저, 저건 나찰랑(羅刹娘)이닷!”
“왜, 왜 저 여귀(女鬼)가… 으헥!”
“어서, 빨리 이쪽으로. 빠져나가야 해!”
남자 세 명. 기겁해서 서로 외치는 소리가 비명처럼 엇갈리는데,
객잔으로 가까워지다가 빠르게 멀어진다.
‘동쪽. 진자현이 왕대평을 데리고 온 방향이면.’
이 은밀한 길, 호중객잔을 여러 번 이용한 자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 내리는 어둠 속에서 황장촌으로 빠지는 방향을 알 리 없으니까.
하여간 이 갑작스러운 소란은 또 뭐지?
소수의 관차들만 남몰래 오간다더니 오늘은 손님이 어찌 이리 많을까.
그것도 깊은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