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9화 (10/410)

제3장 검왕오지(劍王五指) (1)

지나치게 이상한 상황에 처하면 사람이 잠깐이라도 멍해지기 마련이다.

진자현과 조정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해원기가 꼿꼿하게 세운 식지를 향했고,

그 손가락이 투명한 기운을 물줄기처럼 뽑아 올리는 걸 목격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음덩이를 목덜미에 넣은 듯 깜짝 놀라서,

진자현이 반사적으로 탈명은편을 잡아당겼다.

담담한 은빛을 띤 연편(軟鞭)으로 보이지만, 공력이 주입되면 솜털처럼 가는 침이 무수히 돋아나고 교묘하게 꺾이는 손목을 따라 전신을 휘감아 찢어버린다.

어떻게 저항하든 이미 발목을 묶었으니 적어도 중심을 잃을 터.

그런데 진자현이 도리어 상체를 휘청했다.

“헉.”

힘없이 당겨지는 이유가 탈명은편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겨서라는 걸 확인하기 전에,

오른팔을 타고 퍼지는 저린 느낌.

허나 무슨 일인지 따질 겨를이 없다.

진자현의 눈앞엔 온통 투명한 빛이 산란하니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터진다.

유리광(琉璃光)?

그런 의혹이 든 것도 잠시.

퍼퍼퍽.

“크윽.”

어깨와 허리에 한 방, 연달아 배를 찌르는 일격에 그대로 몸을 접으며 고꾸라졌다.

쇠몽둥이, 아니, 마지막은 검에 찔린 것 같아서 내장이 전부 뒤집혔다.

끄르륵.

속에 든 걸 토해내느라 조정이 고함을 치는 것도 들리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시건방진 미친놈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왼쪽, 오른쪽, 가운데.

그런데 형님이 돌연 몸을 이리저리 뒤틀더니 결국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다.

미친놈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도 되는 양, 형편없이 무너졌다.

말도 되지 않는다.

장풍보의 주인, 새북의 패자요 장풍무명이란 위명을 지닌 형님이.

이건 분명 사술(邪術).

“이노옴!”

목이 터지라 외치며 바로 몸을 날렸다.

추풍객이란 외호처럼 본디 속도에는 자신이 있었고, 있는 대로 끌어올린 공력이 두 손의 포풍조를 뚫고 나올 듯하다.

단숨에 덮쳐들어 미친놈의 상판대기를 찢어놓을 찰나,

형님을 가리켰던 미친놈의 손가락이 먼저 옆을 그었다.

두둑.

자신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란 걸 어찌 알겠나.

펑.

“켁!”

날아간 몸이 기둥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기절해버렸다.

해원기가 진자현과 조정을 번갈아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기수식(起手式)인 일지광한(一指廣寒)조차 이러니.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말이나 할지 모르겠다. 명주 아가씨에게 행한 짓이 미워서 유리검(琉璃劍)을 꺼낸 게 실수지.”

우울한 표정.

장난처럼 고수 둘을 제압하고선 심란하기만 하다.

“남 욕할 게 아냐. 내가 더 과하게 손을 썼잖아.”

자책까지.

진자현이나 조정이 들었다면 기함을 할 노릇이다.

이게 기수식이란다. 게다가 더 심한 건 처음부터 맨손인 주제에 무슨 검을 꺼냈다는 건가.

잠시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던 해원기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할 수 없지. 일단 뒤처리가…….”

두 명의 고수를 순식간에 처치한 손가락이 이번엔 객잔의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내실에 증대랑과 장노이, 여기 계단에 명주 아가씨와 왕대평이란 이, 위층에 포쾌를 묶어놨고. 에, 여기 바닥에 두 사람, 아차, 눈덩이로 쓴 병사도 한 명 있구나. 음, 우선.”

이 작은 객잔에 자신까지 아홉 명.

적지 않은 인원인데 그중에 멀쩡한 건 자기 혼자뿐이다.

“문부터 닫자.”

찬바람에 눈보라까지 섞여들어 객잔 안이 추워졌다.

해원기가 객잔 문을 닫으러 가면서 구멍이 숭숭 뚫린 바닥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이건 어쩌나. 고치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방금 보였던 놀라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영 어수선하다.

“으, 으응. 어, 엄마.”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가물가물.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어머니부터 찾는 건 본능. 흐릿한 눈에 증대랑이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이 들어와 일어나려다,

소주가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쓰러졌다.

“흐윽.”

어찔하고 구역질이 난다.

“아, 명주 아가씨.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머리를 다쳐서 조금 더 누워있어야, 잠깐 기다려요.”

아는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머리를 받쳐주는 따스한 손길에,

“오, 오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칭호가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그래, 처음 본 젊은 손님. 신기한 분위기에 말도 곱게 해서 오라버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해원기라는 이름의.

“자, 이걸 삼켜요.”

입에다 넣어주는 대로 꿀꺽 삼키자 어지러움이 가시고 노곤해진다.

해원기가 잠이 드는 소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돌아섰다.

주방 옆에 붙은 내실. 소주가 누운 큰 침대 가에 증대랑과 장노이, 왕대평을 차례대로 기대놓았다.

다들 소주와 마찬가지로 눈이 가물가물 금방 곯아떨어질 듯.

“환약을 먹였으니 명주 아가씨는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경맥이 흔들린 증대랑이나 근골이 상한 아저씨들도 제가 일단 치료는 했습니다만, 환약을 드시고 잠을 좀 자두셔야 회복이 되죠.”

장노이 곁에 늘어놓았던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장노이의 부러진 오른팔과 뒤틀린 허리에 발라주었던 끈적끈적한 고약, 네 사람에게 한 알씩 먹인 손톱만 한 환약. 각기 다른 자기병에 든 물건이요, 부목 위로 묶어준 천 한 뭉치까지.

전부 요대자라는 희한한 허리띠에서 꺼냈다.

해원기의 말이 끝나자 더욱 노곤해지는 몸, 눈꺼풀이 내려앉는데도 증대랑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자세한 내막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유령같이 나타난 해원기에 의해 내실로 피한 후 혼란한 기억,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바닥에 앉은 자신의 등에서 시원한 느낌이 들 때였다.

왕노삼을 구해오고 장노이를 치료해주었으며 소주까지 보살펴준 사람.

낯선 길손에게 구원받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쾌체가 아니면 어떤가. 낯선 길손이 정체를 숨겼으면 또 어떤가.

난데없는 재앙에서 모두가 멀쩡하게 살아난 것만 해도 기적, 이렇게라도 감사한 마음을 표해야만 한다.

“아, 뭐.”

더벅머리를 긁는 해원기의 대답도 채 듣지 못하고 잠에 빠져드는 증대랑이다.

해원기가 내실을 둘러보고 몸을 일으켰다.

“복원고(復元膏)와 백초환(百草丸)도 거의 다 썼구나. 약왕당(藥王堂)에 한번 다녀와야겠는데…….”

혼잣말이 느려지고 휘장을 걷으면서 작은 한숨이 나온다.

“후, 이제부터가 문제일세.”

약왕당에서 얻어온 여러 가지로 다친 사람들을 구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나쁜 놈들과의 대화는 영 골치 아프다.

이 전령이 소주를 묶을 때 썼던 피풍, 그 피풍을 잘게 찢어서 왕 포쾌와 이 전령을 묶었고, 왕 포쾌를 묶었던 포승으로 진자현과 조정의 손발을 객잔 기둥에다 엮어놓았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전에 꽤 바빴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조정과 조정에게 쌍장을 얻어맞은 이 전령은 여전히 인사불성.

진자현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간신히 내뱉는 판이고, 막 정신을 차린 왕 포쾌는 자신만 멀쩡한 이 기막힌 상황에 눈만 껌뻑대는 중이다.

해원기가 더러워진 바닥을 발로 슥슥 밀었다.

“에고, 아까운 요리 다 버렸네. 접시도 깨지고. 나중에 청소도 좀 해야… 아, 정신이 들었습니까? 머리는 괜찮죠?”

머리? 맞다. 장노이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머리가 선뜻하더니 이 꼴이 되었지.

“누구……?”

왕 포쾌가 겨우 입을 여는데.

“혈도를 점하는 게 서툴러서 그냥 살짝 때린 겁니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에, 관인(官人)께서 먼저 오늘 발생한 사건의 배경을 얘기해주셔야겠어요. 아까부터 대화가 자꾸 비틀렸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왕 포쾌가 좌우만 거듭 둘러보게 되자,

“어, 다들 괜찮을 겁니다. 조정이란 사람은 당분간 거동이 어려울 거고, 진자현이란 양반은 달포쯤 앓겠지만. 여기 군관보다 튼튼한 분들이라 회복이 빠를 텐데요 뭐. 추풍객이랬나? 저 사람 손이 매워서 엉뚱하게 두들겨 맞은 이 군관은 다 나아도 후유증이 있을 듯, 나중에 좋은 의원 찾으라고 전해주세요. 하여간 지금 제일 멀쩡한 분은 관인입니다.”

알뜰하게도 챙겨주는 말이 더 이상하지만.

왕 포쾌는 원래 눈치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

눈앞의 어수룩해 뵈는 이 더벅머리 청년이 외모와 달리 비범한 인물이란 걸 재빠르게 인지했다.

추풍객 조정, 장풍무명 진자현.

강호 물을 조금이라도 먹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겁이 나는 고수들. 그런 고수 둘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는 인물이라면.

입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협사(俠士), 협사시군. 이, 이래 봬도 아문의 포쾌 일을 하기 전엔 저도 정도문파에 있었던… 호, 혹시 보검부(寶劍府)라고 아십니까? 아차, 젊은 분이라 모르시려나. 왕년에 태원부에서 가장 유명했었는데. 대정보광검대(大正寶光劍隊)라면 그래도 한때.”

“정도의 무인이셨다? 네, 알겠습니다.”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을 딱 끊는다.

보검부든 대정보광검대든 아예 관심이 없는 태도.

해원기가 허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부터 말해 봐요.”

천을 꺼내 오른 손목을 감으면서 심드렁하게 펴 보이는 손바닥.

왕 포쾌가 입맛을 쩍 다시다가 눈을 크게 떴다.

한 손에 쏙 들어올 크기의 작은 상자 갑, 온통 새까맣게 칠했는데 뚜껑 주위만 새빨간 테두리를 둘렀다.

“나중에 이걸 지니고 있던 양반에게도 다시 물어볼 셈이니 제대로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상자 갑으로 슬쩍 진자현을 가리키는 통에 왕 포쾌가 움찔했다.

소위 물증(物證)을 눈앞에 들이댄다는 거다.

차분한 높임말이 어쩐지 더 무섭고, 이게 문초라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진짜 고수.

장풍무명 정도는 상대로 되지 않는 일류 고수 앞에서 괜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

바보짓.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이제까지의 사정을 숨김없이 다 털어놓아야 했다.

경사에서 고관(高官) 한 명이 낙향한다는 소식. 그게 혼자가 아니라 가솔과 재산을 모조리 남쪽으로 옮기는 거창한 행렬이라 호송하는 표국만으로 부족해서 연도의 관부에까지 요청이 들어왔고.

제남의 군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자주 제남을 왕래하던 태원의 이 전령이 우연히 상세한 내용을 얻어듣게 되었다.

낙향하는 고관은 설날이 지나고 돌연히 사직한 상보감(尙寶監)의 장인태감(掌印太監). 내관십이태감(內官十二太監) 중에서 황제의 옥새와 어용의 보물을 관리하던 직책이고, 재직하는 동안에 상당히 치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나. 더구나 목적지는 아득히 먼 절강(浙江)이니 여정 중에 도적을 만날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그런데 겁 많은 장인태감이 여러 표국에 의뢰하고 각지의 관부에 요청을 넣는 바람에 되레 소식이 은밀하게 퍼져나갔고, 이 표행을 노리는 자들이 생겼다.

이 전령이 태원으로 돌아와 왕 포쾌에게 자랑삼아 떠든 게 마침 그런 자들 중의 하나에게 알려졌으니, 그 사람이 바로 장풍보를 배경으로 삼아 설치던 추풍객 조정.

조정의 연락을 받은 장풍보에서는 놀랍게도 아예 보주인 장풍무명 진자현이 직접 나섰고, 이렇게 판이 커진 상태에서는 왕 포쾌와 이 전령이 낄 여지가 없었는데.

진자현과 조정이 아무리 고수라도 표행을 단독으로 노리기엔 무리였던지, 또 다른 신비한 자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던 모양, 그러면서 기어이 왕 포쾌와 이 전령을 끼워 넣는 이유를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약속한 당일 저녁.

꼼짝없이 끌려간 왕 포쾌와 이 전령은 희한한 광경을 목도했다.

산동 북쪽의 덕주(德州)에 접어드는 곳.

말 네 마리가 끄는 큰 마차가 수십 량(輛), 경사와 하북에서 가장 유명한 표국이 셋이나 호송을 책임지고 제남의 아문과 군부의 인원 수백이 마중을 나올 즈음에.

맨 뒤에 있던 마차가 슬금슬금 처지더니 샛길로 빠졌고, 그 마차를 호송하는 십여 명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듯.

게다가 일행이 복면을 하고 다가섰을 때에는, 아예 호송 인원 한 명이 나머지를 전부 도륙한 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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