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내자불선(來者不善) (4)
팍.
술잔이 부서졌다. 형님이란 자가 마셨던 술잔을 손아귀에서 으깨며 벌떡 일어섰고.
조 대야도 그릇을 내던지며 곧장 주방으로 몸을 날리려는데.
신속한 반응. 대번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반사적인 행동.
그러나 둘의 동작은 시작하는 순간 멈추었다.
탁탁.
때맞춰 객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조 대야와 형님이란 자의 시선이 문을 향하자마자,
콰당.
하얀 눈덩이가 왈칵 덮쳐드니 조 대야가 재빨리 몸을 날려 두 손을 뻗었고,
동시에 형님이란 자가 훌쩍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손을 흔들었다.
퍼펑.
“응?”
연거푸 내친 손바닥에 나가떨어지는 눈덩이가 이 전령임을 비로소 확인한 조 대야의 의아한 소리.
헌데 형님이란 자의 손에선 으깨어 부순 술잔 조각이 그 옆을 노리고 벼락같이 뿌려졌다.
눈덩이로 덮친 이 전령의 바로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마치 유령처럼 바닥을 가로지른다.
문가에 내던져진 왕대평의 몸뚱이가 그 그림자에 휩싸여 궤대까지 날아가고,
퍼퍼퍽.
형님이란 자가 뿌린 술잔 조각이 객잔 바닥을 벌집으로 만드는데.
그림자는 이미 궤대에서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휩쓰는 듯 놀라운 움직임.
바위처럼 굳어진 형님이란 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림자에 꽂혔다.
단숨에 왕대평과 소주를 구해 계단으로 물러난 그림자.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모습.
더벅머리에 낡아빠진 사냥꾼 복장을 한 청년이 소주의 상태를 살피느라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빠르군. 비황척(飛蝗擲)을 피하다니.”
되는대로 그냥 집어던진 게 아니다. 술잔 조각 하나하나가 화살처럼 꿰뚫는 힘을 지닌 고심한 암기수법. 그런데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형님이란 자의 무거운 음성에 이어 조 대야의 노한 고함이 터졌다.
“누구냐!”
희롱당한 느낌에 당장에라도 달려들 생각이었지만.
형님이란 자의 왼손이 슬쩍 제지한다.
“잠깐 기다려라.”
돌멩이를 매단 듯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
그의 비황척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한 청년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확인해야만 한다.
지금까지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이번 일, 누가 수작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
“어린 여자애를 이렇게…….”
해원기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소주를 살피며 자신의 오른 손목에서 천을 풀어냈다.
다행히 충격으로 혼절한 것일 뿐, 그래도 이마가 찢어져 피가 멈추질 않는다. 천으로 꼼꼼하게 동여매 왕대평 곁에 기대놓고서야 몸을 돌렸다.
조 대야의 고함 따위 들리지도 않았다.
“손속이 너무 과하군요. 이미 녹림(綠林)을 떠난 이들인데.”
차분한 목소리에 흔들림 없는 눈동자.
천을 풀어낸 오른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면서 정면의 두 사람을 훑어본다.
이 평범한 자태가 이 순간에는 평범치 않아서.
벌컥 화를 냈던 조 대야도 손을 천천히 내렸다.
휘잉.
열린 객잔 문으로 세찬 바람이 눈발을 끌고 들어오고, 조 대야가 바닥에 내던진 요리를 뒤덮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조 대야가 형님이란 자를 힐끗 보곤 목을 가다듬었다.
“어흠, 추풍객(追風客)이라 불린 내 이목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니. 대단하군. 어느 길을 걷는 친구요? 이 조정(曹政)의 인사가 늦었소.”
추풍객 조정.
가벼운 포권을 취하면서 제대로 별호와 이름을 밝히는 얼굴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니.
잠깐 사이에 평정을 되찾을 정도의 심기(心機)는 갖추었다는 건가.
명호를 대면 보이는 반응으로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살핀다. 대적 경험도 꽤 갖춘 모양이지만,
해원기는 그저 서늘한 눈으로 쳐다볼 뿐.
형님이란 자가 침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무시하는 거냐? 아니면 아주 멀리서 와서 내 아우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나? 그럼 진자현(陳資賢)이란 이름은 어떨까.”
해원기의 눈썹이 비로소 살짝 움직인다.
“들어본 것 같군요. 허나 섬북(陝北) 황릉(黃陵)에서는 이 대첨산까지 아주 먼 거리이고, 흠, 산동 쪽 길을 통해 온 거면 정말 긴 여정이라서.”
자신의 눈썹이 움직인 걸 느꼈나.
말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눈썹을 미는 해원기의 눈매가 더욱 깊어졌다.
처음에 장노이에게 쾌체 일을 한다고 했지만, 하북에서 산서 태원부로, 다시 산동으로 간다는 소리에 의아한 기색을 보였었다.
쾌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거리.
허나 섬서 북부의 황릉에서 산동에 갔다가 다시 산서 경계의 대첨산으로 오는 데에는 비교할 수도 없다. 거의 강북(江北)을 횡으로 왕복하는 정도.
아무리 강호를 떠도는 무림인이라도 이렇게나 긴 여정을 목적 없이 움직이진 않는다.
더구나 이 진자현이란 자.
“감히. 장풍보(長風堡)의 주인이신 형님의 이름을 알고도 뻣뻣하게…….”
선선히 말대답만 하고 아무런 예도 차리지 않는 해원기에게,
조정이 겨우 진정했던 노기를 벌겋게 얼굴에 올릴 만큼 한 지역을 차지한 인물이다.
장풍무명(長風無明) 진자현.
장성(長城) 부근 새북(塞北)의 마적 떼나 몽고의 잔당들조차 겁을 내 피할 실력을 지녔고, 엄청난 부를 쌓아 지은 장풍보를 기반으로 섬서의 북쪽 끝에서 장성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제패한 고수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새북의 바람, 그 바람에 결국은 눈도 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고 외호가 장풍무명.
허나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전통의 구주정문(九州正門)이 중건하기 시작한 십여 년 전부터는 장풍보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이 외진 대첨산 호중객잔에 나타났다.
진자현의 치밀하고 매운 성격을 잘 아는 처지라 어떻게든 참으려 했지만,
조정이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어디서 빌어먹다 왔는지 모를 새파란 애송이가 뻔히 형님의 명성을 알면서 건방을 떨다니.
자신을 제지했던 진자현의 왼손이 아직 내려가지 않아서 시뻘게진 얼굴로 눈만 부릅뜨는데.
“신분을 바로 밝히는 건 죽여 입을 봉할 셈. 굳이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까?”
해원기가 눈썹에서 손을 떼며 하는 말에,
여간해선 미소조차 보이지 않던 형님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려서 치밀어 오르던 화도 잊었다.
“푸하하, 아주 영민한 젊은이야. 이렇게 말귀가 밝은 친구는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똑똑한 젊은이가 어쩌자고 이번 일에 끼어들었을까? 보아하니 삼호(三號)나 칠호(七號)의 사주를 받은 것 같은데 일 처리가 아주 서툴러.”
웃음과 함께 왼손이 얼핏 가리키는 객잔의 열린 문.
진자현이 자연스럽게 두봉을 묶은 끈을 풀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삼호는 억센 동북 말씨, 칠호는 교주(膠州) 사투리를 썼다. 물론 그대로 믿을 내가 아니다만, 촌구석 냄새까지 속일 수는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뒤를 쫓게 한 게 누군지는 밝히는 게 어떨까?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더 좋은 보수를 지급할 용의도 있거든. 어차피 서로 누군지 궁금해서, 어떻게든 뒤를 칠 요량으로 꾸몄을 터.”
회유.
진자현이 여유를 보이며 말을 이어가는 동안,
조정은 슬금슬금 객잔 문 쪽으로 위치를 옮긴다.
형님은 이미 버르장머리 없는 애송이를 죽일 마음을 먹었고, 도주할 길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전령을 눈덩이로 써서 눈을 속이고 들어올 때 보였던 날랜 신형, 귀신같이 장노이와 증대랑을 빼돌린 솜씨.
그러니까 이 객잔까지 뒤를 쫓아올 수 있었겠지.
신분을 다 드러냈으니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된다.
형님은 언제나 회유하는 척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을 노린다.
진자현과 조정 둘 다, 해원기의 정체를 추적자라고 자신들 나름대로 단정했고.
계획이 틀어졌으니 서둘러야만 했다. 또 다른 고수가 뒤를 이어 닥치기 전에.
그래서 사냥꾼 차림의 이 청년을 다시 한번 살펴보지 않았고, 이 청년이 객잔의 선객이란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경적(輕敵)은 필패(必敗). 고수라면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펄럭.
비바람을 막기 위해 걸친 두봉이 활짝 펴져 해원기를 뒤덮는 순간,
진자현의 허리춤에서 튀어나온 은빛 선 하나가 소리도 없이 바닥을 쓸었고, 진자현 자신은 곧장 두 손을 위아래로 뻗었다.
눈 깜빡할 사이, 모든 게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공격.
두봉으로 막힌 시야에 발목을 노린 은빛 선, 그리고 머리와 가슴을 한꺼번에 노리는 두 손은 뿌연 기운까지 흘린다.
이미 상대가 비황척의 암기수법을 피할 수준임을 파악했기에 재빠른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면서 일격에 치명상을 입힐 생각.
함부로 위로 피했다간 연결되는 공세에 즉시 목숨을 잃는다. 초보나 저지를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테니.
피할 곳이라곤 객잔의 문 쪽. 그곳엔 조정이 두 손을 새 발톱처럼 잔뜩 오므리고 공력을 모은 채.
바람도 잡아챈다는 포풍조(捕風爪)로 잡히는 대로 찢어발길 준비를 했다.
옴치고 뛸 데가 없는데 경공이 뛰어나면 뭐 하나.
헌데.
해원기를 뒤덮던 두봉이 갑자기 돌돌 말려 진자현의 손에 부딪친다.
파팍.
뿌연 기운이 담긴 두 손과 마주치자마자 가루가 되어 흩어지지만, 진자현 자신도 얼핏 중심이 흔들려 급히 다리에 힘을 줘야 했다.
“음?”
전혀 예상치 못한 대응.
“이게 황풍절호수(荒風絶戶手)군요. 특이한데?”
눈을 깜빡이며 묻는 해원기의 멀쩡한 모습,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자현의 미간이 확 좁아져 해원기를 빠르게 살피고, 자신이 도리어 한 걸음 물러선다.
“역시 보통이 아니구나. 선풍을 일으켜 거꾸로 두봉을 이용한다라. 하지만, 역시 서툴러. 흠.”
황량한 새북의 변두리라도 한 지역을 제패한 고수.
진자현은 두봉이 왜 돌돌 말리고, 자신이 잠깐 중심을 잃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회오리바람 한 줄기가 두봉을 빨래 쥐어짜듯 하면서 황풍절호수를 막고 그 힘을 거꾸로 자신에게까지 전달했다.
힘줄기를 새끼줄처럼 꼬아대는 일종의 염자결(捻字訣). 상당한 실력이긴 하지만, 병기 없이 맨손으론 그 힘이 약하기 마련. 장풍(掌風)을 이용했다면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다.
장풍무명이란 외호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더구나.
진자현이 낮게 목을 울리면서 오른손을 살짝 올려 보였다.
언제 쥐었는지 담담한 은빛을 띠는 채찍 손잡이,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인 얇은 채찍이 바닥을 거쳐 해원기의 발목을 휘감고 있고.
잔뜩 공력을 끌어올렸던 조정이 맥이 빠지는지 웃음을 흘렸다.
“하하, 생각보다 허술한 놈이었군. 시건방지다고 여겼더니 사실은 겁이 났던 게냐? 뭐, 어차피 형님의 탈명은편(奪命銀鞭)에 걸렸으니…….”
유령 같던 움직임도 그것 하나뿐이었나.
이젠 자신이 손을 쓸 기회도 없다.
여간해선 쓰지 않는 진자현의 독문병기. 장풍무명의 ‘무명’이 사실은 ‘탈명’으로 인한 어둠을 의미한다는 걸 제대로 아는 이는 장풍보 사람들뿐.
그렇게 아끼는 독문병기를 처음부터 펼쳤으니 젊은 놈의 목숨도 바로 끝이다.
멍청하게 오른손을 계속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은 어쩔 줄 몰라서일 게다.
갓난아기들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꼼지락대듯,
나이든 어르신들이 작은 호두를 손아귀에 쥐고 조몰락대듯.
소주의 머리에 천을 감아준 이후부터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하던 해원기.
“아, 이제야 힘이 들어가네. 그러면.”
얼굴 앞에 두 번째 손가락, 식지(食指) 하나만을 세웠다.
“들을 얘기가 있습니다만, 먼저 혼이 좀 나야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발목이 이미 탈명은편에 휘감긴 것도 모르나?
혼을 낸다? 누가 누굴? 이 시건방진 젊은 놈이 미쳤나?
진자현과 조정 모두 얼떨떨해졌는데.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하는 미친놈은 끝까지 말을 놓지 않는다.
“두 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