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내자불선(來者不善) (3)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왜 왕 포쾌가, 왜 이 전령이. 그리고 왜 저 조 대야란 자가 이런 짓을 하는가.
기껏해야 오래 묵은 관차들이 몰래 이용하는 길,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객잔일 뿐. 딱히 손님을 많이 받아 돈 벌 궁리를 한 적도, 그래서 귀한 손님들을 홀대하거나 바가지를 씌운 적도 없다.
어울리지 않던 산적을 그만두고 평범한 양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남편은 죽었지만 두 딸아이가 잘 크고, 남편의 아우들도 의리를 지켜 함께 지내고 있으니 달리 원할 게 없다.
밭을 일구고, 나물을 뜯고, 사냥을 하고, 나무를 베고.
그 정도면 충분히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고, 아무리 손님이 없는 때라도 미리 선물 받았던 재물로 버텨나갔다.
그렇게 지낸 십오 년.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막내딸이 열두 살이나 되었고, 맏딸은 좋은 인연으로 새 인생을 찾게 되었건만.
이런 재앙이 닥치다니.
조 대야란 자, 그리고 왕노삼(王老三)을 잡아 온다는 그의 형님.
흉신악살(凶神惡煞)과 다름없는,
진짜 무림인이다.
사람 목숨 따위 길가의 돌멩이 보듯 하는 자들.
일반인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지녔고, 자신만을 생각하며 제멋대로 행사한다.
저렇게 무섭고 치밀한 자들이 덮친 이 객잔, 어떻게 해야 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남자에 못잖은 체력으로 한때 커다란 칼을 들고 설쳐서 모야랑이란 이름까지 붙었던 증대랑이지만,
주방의 식칼 몇 자루로는 턱도 없다.
격이 다르다.
순순히 자신을 놔주어 요리 준비를 시키곤 관심도 보이지 않는 조 대야, 언제든지 자신과 소주의 목숨을 앗아갈 자신이 있다는 뜻.
참혹한 심정에 속이 터질 것 같은데.
응? 문득 깨달은 사실.
그렇게 지독한 인간이 한 가지를 빼먹었다.
증대랑, 장노이, 소주. 그리고 황장촌의 왕노삼까지 언급한 자가,
한 사람은 전혀 말하지 않았다.
설마 객잔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걸 몰랐나? 그들보다 먼저 온 낯선 길손 한 명을.
증대랑은 혼절해 있느라 왕 포쾌를 시켜 객잔 안을 뒤지라고 한 얘기를 못 들었다.
“쩝.”
내실에서 기껏 은자 부스러기 한 주먹을 찾은 왕 포쾌가 입맛을 다시며 얼른 계단을 올랐다.
조 대야가 뭘 하는지 쓸데없이 살필 생각도 없다.
원래 그런 자들, 아문의 포쾌든 군부의 전령이든 수틀리면 언제든지 목이 달아날 수 있다.
‘왕법(王法)과는 아무 상관 없는 놈들이지. 대첨산의 이 길, 그리고 객잔에 대해 알려준 대가만 제대로 받으면 그만. 어서 일 끝내고 돌아갔으면 좋겠구먼.’
약속한 보수가 적지 않지만, 제대로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까도 마차 안에 값나가 보이는 상자가 여럿 있었는데, 그냥 그 검은 상자만 털었지. 같이 일을 벌인 자들도 전부 똑같은 게…….’
머릿속에 돌아가는 생각을 잊으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다 쓸모없는 생각이다.
무림인이란 종자는 뭔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저 무사히 돌아가 돈을 받는 게 최상의 결과, 어차피 이 객잔도 남아나지 않을 공산이 커서 조금이라도 더 챙기는 게 낫다.
그쯤 생각하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워낙 작은 객잔, 아래층에는 탁자 세 개와 주방, 그리고 증대랑 모녀의 내실 하나. 위층에 작은 객방이 네 개 있고, 그중 하나는 장노이가 쓰다가 손님이 많으면 비워준다.
지금까지 몇 년을 이용하면서 객방이 다 차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장노이가 쓴다는 맨 오른쪽의 객방부터 뒤져야지.
고린 동전 한 닢이라도 챙겨볼 기대로 객방 문을 닫던 왕 포쾌.
문득 복두를 뒤집어쓴 정수리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응?”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더듬으려다,
툭.
머리를 건드리는 손가락에 그대로 허물어져 버렸다.
절그럭.
정신을 잃던 순간에 뭔가 쇳조각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쓰러지는 왕 포쾌를 얼른 안아 침상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벌어진 도롱이 안으로 보이는 청의(靑衣), 가슴팍에 용(勇)이란 글자가 둥근 원 안에 커다랗게 새겨져 있으니 아문(衙門)의 관원이다.
푸른빛이 어린 시선, 동시안이 빠르게 왕 포쾌의 전신을 훑으면서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리춤의 철척(鐵尺)과 포승(捕繩), 아문의 포쾌로군. 들어보니 나쁜 짓을 하고 도피 중인 것 같다. 문제는 조 대야라는 자와 황장촌에서 온다는 그 형님이라는 인물. 객잔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해야 해.’
가만히 염두를 굴리다가 왕 포쾌의 허리춤에 걸린 포승을 풀기 시작했다.
피곤한 김에 깊은 잠에 들었으나, 그래도 평소의 잠심침령은 무의식적으로 운용되고 있었기에 느지막이 손님들이 든 걸 알았고.
이 작자들이 대뜸 손을 쓰기 시작하면서 잠이 깨었다.
예상치 못한 일. 이 객잔에 들를 손님이라면 당연히 관차라고 여겨 돌연히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헌데 그들이 지껄이는 얘기들. 조 대야의 웅얼거리는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다 들으면서 일이 간단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 대인과 이 대인은 딱히 신경이 쓰이지 않아도, 조 대야라 불린 자는 바로 무림인이란 걸 알아챘고,
한바탕 남모를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 객잔에 들러 난리를 치는 게 모두 미리 계획된 일이다.
단순한 시골 악패(惡覇)로 보이질 않고, 녹록한 신수라 단정하는 것도 금물.
이 호중객잔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사는 식구들을 안전하게 지켜내야 한다.
과거에 우연히 알게 된 곳이지만,
자신과의 인연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곳이지만,
그것보다 고통받는 무고한 사람들을 어찌 보고만 있으리.
맨 왼쪽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지붕을 거쳐 장노이의 방으로 이동했다. 미풍도 일지 않는 절묘한 신법, 빗줄기가 거세고 우박에 눈발까지 섞였지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고 웬만한 고수는 기척도 감지하지 못한다.
지금 기절한 왕 포쾌를 얼른 안아 누인 것도 미세한 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아래층에 신경을 집중한 채 포승을 길게 늘여 손으로 끊어냈다.
포승은 죄인을 묶기 위한 줄, 포쾌들만의 독특한 결승법(結繩法)이 있어 허리에 동여맨 걸 남들이 쉬 풀기도 어렵고, 휴대에 편하도록 손가락 굵기 정도지만 도검에도 잘 잘리지 않을 정도로 질기다.
그런데도 해원기는 금방 풀어서 마른 국숫발 끊듯 가볍게 끊어내곤, 판과의 구멍에 맞추어 끼웠다.
그 솜씨도 빠르고 정확해 엉성하고 부산스럽던 아까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지 않아도 끈 하나가 사라져 자꾸 울어대던 판과, 가슴 앞에 마치 엄심갑(掩心甲)처럼 단단히 고정시키고 나머지 포승으로 왕 포쾌의 손발을 꽁꽁 묶더니, 입에는 이불로 재갈까지 물렸다.
객잔에 올 때처럼 낡은 조끼까지 갖추어 입은 해원기, 토시와 감발처럼 손목과 발목에 칭칭 감은 천까지. 물기 하나 없다.
일단 한 명.
워낙 험준한 산, 그 가운데 숨은 공동에 세운 객잔이다.
한여름에도 매서운 산바람이 자주 불고 다른 곳보다 훨씬 추위가 심하고 긴 곳.
당연히 창문이 조그맣고, 그나마도 오늘 덧창을 대 꼭꼭 막아놓았다.
왕 포쾌의 기척을 살펴 이 층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것만도 그다지 쉽지 않건만.
해원기는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경공(輕功).
무공의 기초 중 기초, 몸을 가볍게 하는 거다.
사부가 입무(立舞)라는 춤부터 가르치기 시작할 때, 해원기는 사부도 머쓱한 미소를 지을 줄 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입으로 읊조리며 발을 움직여 추는 춤, 구음입무(口吟立舞)야말로 앞으로 배울 모든 무공의 바탕.
“기쁘면 흥에 겨워서, 슬프면 잊으려고, 노하면 가라앉히려 사람은 춤을 춘단다. 고죽(孤竹)의 전승, 천손지무(天孫之武)는 바로 사람의 삶, 걷고 뛰고 앉고 서고 눕고 엎드리는 모든 게 춤이다. 바르게 할 줄 알고 부지런히 행하면 자연히 몸이 가뿐해지는 법. 그러니 경신(輕身)이란 게 달리 있겠느냐? 허나 사부는 워낙 아둔해 네 사조에게서 검법 한 가지만 배웠을 뿐이라 사실 이쪽은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경신의 도리도 한참 시간이 걸린 후에야 겨우 깨우쳤지. 그게…….”
기초요 바탕인데 잘 가르쳐주지 못해 무안했을까.
하지만 말을 이으면서 바뀐 사부의 얼굴.
그건 어쩐지 아련한 그리움 같았다.
“세상에는 이 사부 말고도 한 가지만 가지고 무도를 걸은 이가 또 있었고, 그가 택한 건 바로 이 경신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닦은 건 단순한 경신이 아니라, 그래, 경공이란 단어가 그에게만은 어울리겠구나. 비록 다른 문파의 무공이지만, 그를 통해 사부는 비로소 이 구음입무가 지닌 경신의 도리를 엿볼 수 있었다. 경(輕)이 단순히 쾌(快)일 뿐 아니라 부(浮)요, 산(散)이며 또한 홀(忽)이고 리(離)라는 것. 그래서 그 친구에게 배운 이치를 너에게 얘기하고자 한다.”
궁금했다.
“그 친구 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표풍부운(飄風浮雲) 나문(羅文). 아, 사부의 친구는 아니고… 음, 호적수(好敵手)였다.”
‘그 친구’라고 했으면서 금세 아니란다.
다시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부의 눈에 기억이 물결처럼 흘러가는 걸 보았고,
‘호적수’라는 말이 ‘벗’을 다른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도 그때 배웠다.
사부가 호적수라고 지칭한 이를 그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덜컥.
“젠장, 아주 눈사람이 되겠다 이거. 길도 헷갈리고, 후우.”
객잔 문이 열리면서 불평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퍽.
목소리의 주인공이 허리춤에 끼었던 걸 되는대로 문가에 내던지고 고개를 드는 모습에,
“형님!”
술잔을 홀짝대던 조 대야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머리에 뒤집어쓰는 모자가 달린 긴 피풍, 검은 두봉(斗篷)이라는 걸 걸친 탓인지 머리와 어깨에 붙은 눈이 선명하게 보인다. 육척(六尺) 가까운 키에 어깨가 한일자로 벌어져 당당한 체구, 모자를 뒤로 젖히자 단단한 용모가 드러났다.
짙은 눈썹에 큰 눈, 벌어진 코에 단정히 다듬은 수염이 각진 얼굴과 어울려 마치 바윗덩이처럼 묵직한 생김새. 희끗한 머리도 뒤로 곱게 넘겨서 오십 줄인데도 훨씬 젊어 보인다.
조 대야가 황망히 앞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왕복 한 시진은 걸린다고 하더니만. 허 참, 죄송합니다. 오시는 줄도 모르고… 아니, 이 친구는 뭘 하는 거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평소에 극진히 모시는 형님, 워낙 예민한 분이라 항상 조심해 받들어 모셨는데 오늘은 일이 복잡해서 자신이 이렇게 편한 역할을 맡는 데다가 오는 걸 미리 알지도 못했으니.
게다가 비가 언제 눈으로 바뀌었는가.
대체 그 멍청한 전령 녀석은 밖에서 뭘 하는 건지.
말이 두서없이 나가자, 새로 객잔에 들어온 형님이라는 자가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황장촌이 워낙 작은 마을이어서 왕대평이란 놈이 사는 곳도 금방 찾았으니까. 비가 눈으로 바뀐 게 남들 눈을 피하기엔 더 유리했고. 그보다…….”
시선이 조 대야가 앉았던 탁자를 훑고,
“매우 시장하구나. 흐음.”
성큼 탁자로 향하면서 목을 낮게 울린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내는 소리다.
문가에 내던진 건 왕대평이란 놈이겠지. 황장촌까지 왕복 한 시진이 걸린다고, 왕대평이 사는 곳까지 세세하게 알린 왕 포쾌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기껏 포쾌 따위의 능력으로 잰 거리, 일단 행하기로 결정한 형님이 제대로 경공을 발휘했을 테니 거칠어진 날씨도 아무 상관이 없었겠지만.
그보다 미리 밖으로 내보낸 멍청이는 정말 하나도 쓸모가 없군.
조 대야가 잰걸음으로 탁자를 돌아 급하게 술잔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우선 한 잔 드시고 못난 아우의 불찰을 꾸짖어주십시오.”
허리까지 바짝 굽혀 깍듯하게 사죄하는 예를 올려도,
형님이란 자는 찡그린 미간 그대로 본체만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크음.”
넓적한 콧구멍을 벌렁대며 미간이 조금 펴지는 게,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조금 풀렸나 보다.
눈치를 보던 조 대야가 또 재빨리 탁자 위를 치웠다.
대충 건드렸던 지삼선과 목수육 그릇을 두 손에 나눠 들고,
“막 새 요리를 시킨 참이었습니다. 형님 번거로우실까 봐 제가 미리 손을 좀 써서 말 잘 듣게 해놓았는데. 얼른 내오도록 이르죠.”
그럴듯하게 보고하면서.
서둘러 손을 써서 객잔을 제압한 게 되레 잘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님이란 자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비로소 조 대야에게 고개를 돌렸다.
“꼬마 계집애 하나뿐이구나. 나머지는 다 어쨌고, 음, 왕가와 이가는 어디 갔지?”
객잔에 들어올 때 이미 궤대 앞에 묶어놓은 소주를 봤을 터.
그러나 그 다음 질문이 이상해서 조 대야가 멈칫거렸다.
“왕 형은 객잔 안을, 이 형은 밖을 살피라고 했고. 저기, 점소이 영감은 계단 뒤…에? 이게?”
대답을 서두르다가 조 대야가 눈을 홉뜨며 몸을 홱 돌렸다.
이 전령이야 엉뚱한 곳을 헤매느라 형님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어도.
일단 객잔에 들어온 형님이 기척을 살피지 못하고 물었을 리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층에 올라간 왕 포쾌는 뭐 하느라 얼굴을 내밀지 않나? 아니, 그보다 계단 뒤에 처박은 장노이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밀가루 반죽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간 증대랑 쪽에도 아무 소리가 없다.
형님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자신이 분명히 확인했건만.
지금은 정신을 잃은 소주만 남았을 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