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내자불선(來者不善) (2)
“쳇, 별거 아니잖아?”
목을 맞고 대번에 혼절한 증대랑을 보며 조 대야가 비웃는 소릴 내자,
이 전령도 몸을 돌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왁살스럽게 통째로 움켜잡은 얼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소주가 고통에 발버둥을 치든 말든 가벼운 짐짝처럼 끌고 오면서,
“한 가락 하던 산적(山賊)이었다며? 그거 제대로 알아본 거요?”
미심쩍게 묻는 말에 왕 포쾌가 입맛을 다시며 팔을 꺾어 누른 장노이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전 얘기라. 어이, 예전 증가채(曾家寨)의 삼호(三虎) 중 둘째였던 양병호(佯病虎) 장두병(張斗柄), 맞지?”
“으, 으윽. 무, 무슨 소릴 하는…….”
얼굴이 탁자에 짓이겨진 장노이가 억지로 입을 열지만, 왕 포쾌가 또 무릎으로 그 허리를 찍었다.
“크윽!”
“별호처럼 어지간히 엄살이군. 한 십오 년 되었나, 쾌활호(快活虎) 증길(曾吉), 너, 그리고 투심호(偸心虎) 왕대평(王大平)이, 에, 저기 모야랑(母野狼)이라 불렸던 계집까지 해서. 여기저기 도적질 하다가 집포통문(緝捕通文)이 나오니까 감쪽같이 사라졌었잖아. 그때 이 대첨산에 들어와 산채를 꾸렸던 모양이다만, 흐흐흐.”
왕 포쾌가 좋지 않은 명호들을 줄줄 꿰다가 묘한 웃음을 흘렸고,
조 대야가 손을 털며 또 키득거렸다.
“인적도 없는 곳에 산채를 차려서 굶어 죽을 뻔했다는 멍청이들 얘기지? 그거 나도 들어봤어. 크큭.”
“흥.”
코웃음 치며 소주를 끌고 오던 이 전령.
퍽.
다짜고짜 탁자 모서리에다 소주의 머리를 내리찧는 광경에 장노이의 눈이 뒤집혔다.
“이, 이익.”
왕 포쾌가 지껄이는 과거의 비밀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한쪽 눈으로 소주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온몸을 뒤틀어 일어나려 했지만.
우두둑.
“케엑!”
오른팔이 부러지면서 속절없이 나뒹굴었다.
“허, 이놈 봐라. 요추(腰椎)를 제압했는데 제 팔을 제가 부러뜨려? 역시 독한 데가 있었구먼. 봐, 이 형, 이게 내 말이 맞단 증거라고.”
덜렁거리는 장노이의 팔을 내려놓으며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왕 포쾌.
이 전령이 쓰러진 소주를 발로 밀어내고 의자를 끌어당기자,
조 대야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어째 이리 손속들이 거치실까. 게다가 왕 형은 산적 토벌 나온 관군 같고, 이 형은 소매치기를 작살 내는 포쾌 같아서. 둘이 직업을 바꾼 게요? 에이.”
이 전령이 당기던 의자를 잽싸게 빼앗아 앉더니,
황기백건을 남실 따라 들이킨다.
“카아, 우리 형님이 황장촌인가 하는 곳에 갔다 올 때까지는 기다리자고 했는데 참 서두르시네. 형님이 배가 고프시면 왕 형이 요리를 할 거요? 목이 마르시면 이 형이 황기백건을 따라 올릴 거요? 나 참.”
움찔.
왕 포쾌와 이 전령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과 조롱이 섞인 말투지만, ‘형님’이란 단어가 나오자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한다.
조 대야가 두 사람을 차례로 보면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뭐 나도 끼어든 셈이니. 기껏해야 반 시진 정도 남았나. 거 꼬맹이는 의자에 꽁꽁 묶어 숨만 쉬게 해놓고, 팔 병신 영감은 혈도를 세게 찍어서 구석에 밀어 놓고. 아, 바닥도 좀 닦아놓으쇼. 그리고 한 사람은 객잔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른 한 사람은 객잔 밖을 제대로 살펴. 아줌마는 내가 살살 구슬려볼게. 자, 어서!”
짝짝.
이리저리 손가락질로 지시를 내리곤 손뼉을 쳐 재촉한다.
말투도 나중엔 아예 반말을 써서 그야말로 아랫사람 부리듯, 왕 포쾌와 이 전령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마지막으로 조 대야가 번갈아 보내는 차가운 시선에 아무 소리 못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이 부러져 헉헉거리는 장노이, 머리가 깨져 혼절한 소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포쾌와 전령에 수상한 인물 셋이서 과거에 집포통문이 나온 수배범을 잡으러 왔다?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체도 불분명한 조 대야라는 자가 지껄이는 이상한 소리.
아무리 증대랑과 장노이의 과거가 집포통문이 나온 수배범이라도, 관(官)이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는 세태라고 해도.
어린 소주를 이렇게 험하게 다루는 건 지나치다.
산적을 나포(拿捕)하러 온 게 아니요, 관차로 볼 수도 없다.
조 대야가 시킨 대로.
왕 포쾌는 장노이의 혈도를 찍어서 계단 아래에 밀어 넣고, 이 전령은 자신의 피풍으로 소주를 꽁꽁 묶어 궤대 앞에 기대놓았다.
그러는 동안에 꼼짝도 않고 술만 홀짝이는 조 대야.
여전히 밀가루 반죽에 머리를 박고 엎어진 증대랑을 힐끗 살핀 이 전령이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이보시오, 조 형. 시키는 대로 다 했소. 헌데 객잔 안팎은 뭐 하러…….”
‘조 대야’가 ‘조 형’으로 바뀌고 목소리에도 불만이 담겼다.
조 대야가 눈길도 주지 않고 피식 웃었다.
“훗, 이래서 초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보는 얼굴에 조소가 맺히고,
“왕 형은 그래도 조금 눈치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 설명을 해줘야 하나? 둘 다 이리 와봐.”
오라면서 자신이 궤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짐승도 기르지 않으면서 고기와 계란이 나오는 객잔, 저번에 내가 그 얘길 하지 않았으면 왕 형이 이것들의 내력을 알아볼 생각이나 했을까? 덕분에 황장촌이란 곳에 물자를 대는 떨거지가 하나 더 있는 걸 알았잖아. 별 볼 일 없는 산적 나부랭이, 그래도 칼 밥을 먹었던 것들이고 그런 만큼 여기서 객잔을 시작한 게 그저 벗겨 먹을 사냥감이 없어서만은 아닐 거야. 지난 십오 년간 무슨 꿍꿍이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뭐, 쓸 만한 물건이 나오면 좋고 꿍쳐놓은 금덩이도 괜찮고.”
먼저 계단 쪽의 왕 포쾌한테 말을 건네더니 이 전령의 앞에 우뚝 섰다.
허우대가 좋은 이 전령을 슬쩍 올려보는 시선.
“이번 표행(鏢行)의 소식을 미리 알아낸 건 이 형의 공이지. 그 덕에 순조롭게 일이 끝났지만, 그걸로 다 됐다고 여기나? 유명한 표국이 셋이나 달라붙은 규모, 그리고 제남부(濟南府)의 인원까지 동원된 호송, 우리 형님조차 남들과 연수(聯手)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작자들이 전부 누구인지도 잘 몰라. 오죽하면 대첨산의 이 객잔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을까?”
“음.”
코앞에서 번들거리는 조 대야의 눈.
이 전령이 질끈 깨물었던 입술을 겨우 열었다.
“처, 처음부터 함께 한 사람들인데. 서로, 서로 다시 볼 일 없도록, 각자 흩어져서 헤어졌, 졌잖소. 더구나.”
침을 꿀꺽 삼켜 더듬거리는 말을 빠르게 이었으나.
“이 대첨산의 길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비밀이라……!”
“후우.”
조 대야의 한숨보다 그전에 자신의 목젖에 닿은 손끝.
이 전령은 등골이 서늘해져 조 대야가 낮게 웅얼거리는 소릴 가만히 들어야 했다.
“말 참 많네. 강호가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처음부터 함께 하고, 서로 신분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분배가 끝나면 깨끗하게 헤어지고. 그거 다 헛수작이지. 분배가 조용할수록 뒤끝이 더러운 게 이 바닥이야. 잽싸게 밖으로 나가.”
당장에라도 차가운 기운이 머리통을 꿰뚫을 것 같아서,
간신히 멈추었던 입뿐 아니라 눈가까지 파르르 떨었다.
살기.
허우대가 좋은 걸로 잘난 체나 하는 전령 따위, 언제 이런 살기를 몸으로 겪어봤을까.
조 대야의 손이 떨어진 것도 모르던 이 전령이 허겁지겁 객잔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에 비하면 왕 포쾌는 좀 더 능구렁이랄까.
“맞는 말씀. 조 형이 이해하구려. 다 낡은 문서 속에서 집포통문을 간신히 찾은 것도 믿지 않던 친구라. 에, 나는 그저 금덩이 말고 은원보라도 하나 찾으면 좋겠구먼. 히히.”
채신머리없는 웃음을 흘려 보이곤 냉큼 내실 쪽으로 향한다.
괜스레 조 대야란 자의 심기를 거슬릴 필요가 없다.
조 대야란 자도 그렇지만 조금 있다 올 그 ‘형님’이란 자는 더욱 무서우니.
군복을 걸쳤다고 거들먹대기나 하는 멍청이와는 달리,
왕 포쾌는 강호가 어떤 곳인지 아는 편이다.
“흥.”
조 대야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증대랑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예전에 강호 물을 먹어본 적이 있다고 꼴에. 어이, 아줌마, 일어나봐.”
왕 포쾌를 혼잣말로 비웃곤 손에 살짝 힘을 주자 증대랑이 겨우 눈을 뜨는데.
“혼혈(昏穴)은 풀었어도 아혈(啞穴)을 잡았으니 말은 나오지 않을 거야. 난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잠자코 들어. 점소이 영감은 팔이 부러져서 기절했고, 주둥이 까진 천방지축 딸내미도 요 앞에다 재워놓았다. 예전에 산채를 짓고 산적 노릇도 했다니 대강 상황이 어떻다는 정도는 알겠지. 우리 형님이 조금 있으면 황장촌에서 왕대평이란 놈도 끌고 오실 건데, 본래 편한 걸 좋아하시는 분이 오늘 무지하게 바쁘셨거든. 전에 보니 요리 솜씨가 꽤 있더구나. 제대로 잘 대접할 준비를 해. 알아듣겠어?”
귓가에 속삭이듯 건네는 말소리가 징글맞지만, 그보다 목덜미를 쥔 조 대야의 손에서 살벌한 기운이 전신으로 스며들어.
증대랑이 이를 악물었다.
조 대야의 말대로.
장노이는 어디로 갔는지, 궤대 앞에는 어린 딸만이 짐짝처럼 둘둘 말린 채 머리를 떨구고 있다. 왕 포쾌와 이 전령도 보이지 않고 자신은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조차 모른다.
단번에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만 했다.
굳이 장노이와 소주를 핑계로 댈 것도 없이,
이 조 대야란 자 혼자서 충분히 객잔의 모두를 처치할 수 있을 터.
단순히 힘 좀 쓴다는 뒷골목의 무뢰배나 건달 따위가 아니다.
산적질을 허탕 치게 하던 표사(鏢師), 표두(鏢頭)도 이처럼 살기를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어, 어째서 이런 일이.’
손을 씻고 새사람이 되어 이 하찮은 객잔으로 버티며 산 게 십오 년.
산적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객잔 주인이 딱 맞는 직업이라고.
권하는 말을 고스란히 따라 이 객잔을 짓고는 몇 년 후에 병사한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연(奇緣)을 얻어 새 삶을 시작했다고 기뻐했던 남편.
여기서 끝날 수는 없다.
증대랑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가루 반죽에 얼굴을 마구 문대는 대답에 조 대야의 입가에 비로소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증대랑의 목을 쥐었던 손을 풀어 탁탁 털고는,
“그렇지. 잘 알아듣는군. 그럼 얼른 맛있는 걸 차려봐.”
“네, 네.”
겨우 혈이 풀려서 잔뜩 움츠러든 증대랑의 대답이 더욱 마음에 든 듯,
냉큼 의자로 돌아가 술잔을 들더니.
“이 술, 황기백건이란 이 술 말이야, 정말 내 입맛에 딱 맞거든. 형님도 좋아하셔야 할 텐데. 아, 술과 안주가 마음에 들면 형님이 정말 대범해지신단다. 혹시 알아? 너희에게 살길을 열어줄 뿐 아니라 두둑하게 한몫 챙겨줄지. 저 초짜들보다야 산적 출신이 훨씬 말이 통한다고. 하하.”
증대랑이 듣건 말건 혼자서 떠들어댄다.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주제에.
반죽을 다시 이겨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증대랑은 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듣지도 못했지만,
막 휘장을 젖히던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 이상하다.
조 대야의 말에 한 가지가 빠졌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