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내자불선(來者不善) (1)
장노이가 조그만 은자 부스러기 다섯 개를 종이에 올려놓고는 히죽거렸다.
“이 정도 거슬러주면 충분하지, 암.”
궤짝을 쌓아 만든 계산대, 궤대(櫃臺) 위에 밀가루 반죽을 꺼낸 증대랑이 코를 찡긋거렸다.
“반 냥을 넘게 받으려고? 아따, 장노이도 소주의 욕심이 옮았구려. 그냥 그 자리에서 제꺽 잘라주면 될 것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는 표정에,
“이렇게 멀쩡한 은원보를 얼마 만에 보는 건데. 반 토막을 내기는 아깝잖수. 기념으로다가, 어흠.”
장노이가 멋쩍게 헛기침을 섞고는 얼른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반듯하게 자리 잡은 은원보 한 냥.
소주처럼 처음 보는 백은이라서가 아니다. 한때는 이런 은원보를 수십 수백 개나 만진 적이 있었지.
장노이가 힐끗 궤대를 보곤 마른 입맛을 쩍 다셨다.
증대랑이 지금 밀가루 반죽을 펴는 저 궤대도 본래 은원보와 황금 따위를 담았던 상자였다는 기억이 나서.
“얼씨구, 참 좋은 기념이 되겠네.”
증대랑이 슬쩍 비꼬는 것도 장노이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거스름돈이 너무 적은가?”
조금 민망해져서 은자 부스러기를 몇 개 더 넣으려 종이를 다시 펼치려는데.
쿵쿵.
“어이, 증대랑, 장노이!”
“뭐야? 왜 이리 찾기 어려워?”
문을 두드리며 찾는 소리.
장노이가 깜짝 놀라 급히 종이와 은원보를 품에 넣었고,
증대랑도 뜻밖의 인기척에 손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시각은 이미 해시(亥時)로 넘어가는 때, 산속은 이미 캄캄해졌고 바람이 멈추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아예 객잔 문을 잠갔거늘.
이 시간에 여길 찾을 사람이 있을 줄이야.
목소리 또한 낯설지 않다.
탁탁.
젖은 전립(氈笠)을 털면서 중년인이 오만상을 썼다.
“덧창을 다 닫아놓아서 불빛도 보이지 않더라구. 에잉, 이게 무슨 꼴이야?”
그새 비가 거세졌나.
전립뿐 아니라 걸친 도롱이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장노이와 증대랑이 서둘러 마른 수건을 건넸다.
“아이고, 일찌감치 문을 닫는 바람에 날씨가 확 변한 것도 몰랐습죠. 오후에는 바람이 그리 거세더니만.”
“일단 이쪽으로 앉으세요. 헌데 이게 웬일이람? 왕(王) 대인과 이(李) 대인이 함께, 가만, 이 분도 전에 이 대인이랑 같이 오셨던……?”
전립을 아무렇게나 탁자에 던진 중년인, 왕 대인이라 불린 자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럴 일이 있어. 허, 증대랑은 용케 조(曹) 대야(大爺)의 얼굴을 기억하는구먼.”
전립을 벗은 머리에는 복두(幞頭)를 뒤집어썼다. 작은 눈에 염소수염을 기른 왕 대인은 꽤 민첩해 보였고,
대조적으로 허우대가 좋은 이 대인이란 자는 전립 대신에 홍립군모(紅笠軍帽)와 어깨를 부풀린 홍반오(紅胖襖)를 착용한 군복 차림. 그 위에 영(令)이라는 글자가 박힌 파란 피풍(披風)이 흠뻑 젖었다.
“관(官)과 군(軍)의 일에 초민(草民) 따위가 뭘 알려 하는가. 어서 술과 요리나 내오게. 조 대야도 이쪽으로 앉으시오.”
“아아, 술, 술이지. 저번보다 더 춥구먼. 술이라도 한 잔 걸치지 않고서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젠장. 무슨 놈의 날씨가.”
고압적인 이 대인의 말에 반색하는 조 씨 사내. 그럴듯한 황색 장포 차림이지만,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대인과 달리 겨우 서른을 넘었을까 말까. 강퍅한 인상에 걸진 음성이 어느 뒷골목의 건달 같은데도 조 대야라고 윗사람 대우를 받는다.
먼저 들어온 두 사람과는 달리 황포가 그다지 젖지 않았다.
증대랑과 장노이가 손을 나누어 차와 술을 내오면서,
묘한 시선이 살짝 교환되었다.
대인, 대야.
‘나리’라고 높여 부르긴 해도 그건 다 단골에 대한 예의일 뿐. 이렇게 험하고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을 소위 ‘나리’라는 높은 분들께서 찾을 리가 있나.
왕 대인이란 자는 태원부 아문(衙門)의 포쾌(捕快). 좀도둑을 잡고 관아의 명으로 사람이나 찾는 아역(衙役)이요,
이 대인이란 자 역시 태원부 군부(軍府)에서 전령(傳令)이나 하는 말단 군관에 불과하다.
나라의 녹을 먹긴 해도 그야말로 하찮기 이를 데 없는 자리, 그래도 이 전령의 말투처럼 관과 군에 소속되었다고 밖에서는 거드름을 피우는 게 일상. 일반 백성들은 혹시라도 그 심사를 거슬려 손해를 볼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포쾌와 전령이라 자연히 외부로 심부름을 다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이 호중객잔을 몰래 이용하는 단골들이다.
한 달 전쯤에 이 전령이 산동으로 차사(差使)를 간다면서 데려온 조 씨 사내도 별반 대단할 것 같지 않은 인물.
태원부에서 알아주는 부상(富商)이라고 소개했으나,
증대랑과 장노이, 심지어 소주조차 믿질 않았다. 차림새는 놔두고라도 행동거지가 야비하고 속되기 그지없어 영락없는 건달패.
뭐 포쾌나 전령이나 남몰래 엉뚱한 짓으로 뒷돈을 챙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건달패랑 어울리는 게 이상하지도 않다.
그저 객잔을 이용하는 드문 관차의 하나로 제값이나 쳐주면 그만.
은밀한 짓거리에는 이렇게 숨겨진 길에 있는 객잔이 제격이란 걸 잘 아는 자들이라 계산을 떼먹거나 인색하게 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실상 관차든 딴짓거리든 뭔 상관. 어차피 관청에 확인하러 갈 수도 없잖은가.
대인, 대야라고 굽실거려주기만 하면 된다.
증대랑과 장노이는 이런 쪽을 훤히 아는 사람이니까.
“이게 뭐야? 자네들 먹는 걸 그냥 내오면 쓰나. 에잉!”
급한 대로 지삼선과 목수육 남은 걸 안줏거리로 내왔다고 대뜸 인상을 쓰는 이 전령이지만.
조 대야라는 자는 어지간히 술이 급했나 보다.
“캬아! 저번에도 느꼈지만 여기까지 고생하며 오는 보람이 이 술에 있다니까. 이 한 잔이면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 이거 황기백건(黃芪白乾)이라고 했던가?”
“아유, 기억하시네요. 맞습니다. 이 산속에 많이 나는 거라, 저희는 북기황(北芪黃)이라고 부르죠.”
증대랑이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옹송그리는 동안,
왕 포쾌는 장노이에게 말을 붙인다.
“날씨가 풀릴 듯 풀리지 않아 아직 오가는 관차가 없었지?”
“아, 네. 입춘 지나고 여러분이 첫 손님입니다요. 오늘은 특히 비바람이 거세서 아예 장사를 포기했었는데. 어지간히 급한 일이신가 봅니다.”
“아 좀 그럴 일이 있어. 그러면 그간에 태원부나 양천현에서 출발한 자들이 없었더란 말이지?”
재삼 확인하는 말에 장노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따라 올렸다.
“네. 태원, 양천뿐 아니라 하북과 산동 쪽에서 오는 이들도 없어서. 이러다 저희 굶어 죽겠습니다요.”
관차를 핑계 대고 다른 볼일을 보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혹시나 관아의 다른 차역(差役)에게 들킬까 걱정하는 게다.
뻔한 속내라서 엄살을 섞어 대답했지만, 장노이는 얼핏 한 가지를 놓쳤다.
이 늦은 시간에 도착한 이들이 어째서 태원과 양천 쪽에만 관심을 보일까? 어차피 그쪽에서 출발했을 텐데.
그리고 반대쪽인 하북과 산동에는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태원부에 속한 포쾌와 전령이니 당연히 태원 쪽에서 출발했으리라 여겼다.
밤 시간, 궂은 날씨. 아문의 포쾌와 군부의 전령에다 건달패 같은 작자.
대충 봐도 상황이 관차를 핑계로 뭔가 치사한 짓을 하려고, 다음날 새벽에 출발한 걸로 꾸며 이틀은 시간을 벌 셈이겠지.
드문 일도 아니어서 장노이가 객방 준비를 염두에 두는데,
왕 포쾌가 마음이 놓이는 얼굴로 찻잔을 밀어내고 술병을 가리켰다.
“나도 황기백건이나 한 잔 주게.”
“어? 아, 네에.”
장노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른 술그릇을 찾았다.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의 왕 포쾌, 웬만해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라 이렇게 먼저 술을 찾는 건 처음이다.
‘날이 궂어서 그런가.’
밤늦게 험한 길에서 소나기를 만났으니 춥고 지쳤나 보다.
그쯤 생각하고 술병을 들어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황기백건이 은근히 독한 술이지만, 속을 덥히고 기운을 북돋는 데에는 그만이고.
한두 잔 들어가다 보면 금방 졸릴 테니 더 귀찮을 일도 없을 터.
그 바람에 왕 포쾌가 이 전령에게 슬쩍 눈짓하는 걸 또 놓쳤다.
“아, 꼬맹이 소주는 어디 갔어? 말썽쟁이가 벌써 자나?”
그제야 눈치챈 것처럼 왕 포쾌가 소주를 찾는 시늉을 하고,
“크으, 그 주둥이 까진 계집애. 맞아, 어디 갔어?”
연거푸 잔을 비운 조 대야 역시 눈가를 씰룩이며 두리번거렸다.
거친 말에 막 반죽을 정리하러 돌아가던 증대랑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그렇지, 남의 딸내미를 이렇게 막 부르다니.
강한 성격대로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는데,
마침 내실에서 나오는 소주를 본 조 대야가 목소리를 더 높였다.
“이야, 저기 있구먼. 제멋대로 떠들던 천방지축이.”
“여러 대인들께서 오셨군요. 어쩐지 소란스럽…….”
입술을 삐죽 내민 뾰로통한 표정,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구 지껄이는 인간들에게 제대로 쏘아 붙여줄 참이다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흥, 어디서 처질러 잤던 모양이군. 그러고 보니 한 달 전보다 꽤 깨끗해졌는걸. 못난 년이 이 더러운 돼지우리를 청소라도 했나?”
이번엔 이 전령이 냉소를 치며 눈을 부라린다.
그 바람에 소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관차들이 거들먹거리기는 해도 어린 소주에겐 거의 시비를 걸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되바라진 소주의 말대답을 우스개로 삼아 노닥거리는 편.
이렇게 대뜸 아랫것 다루듯 꾸짖는 이 전령이 낯설어서 저절로 걸음이 멈추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면서 어째 이렇게 사납게 굴지?
해원기의 방에서 괜스레 혼자 당황한 게 부끄러워 주방 옆의 내실에서 잠깐 숨을 돌려야 했고, 들리는 목소리로 대충 누구누구가 왔는지도 짐작했다.
왕 포쾌, 이 전령, 그리고 이 전령이 데려왔던 조라는 사내.
객잔을 이용하는 관차들 중에서도 질이 떨어지는 못난이들.
오늘 참 희한한 날이네.
관차가 있기 어려운 날씨에 낯선 길손 하나 들더니 또 손님이 들어왔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아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
엄마를 도울 맘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상스런 말을 뒤집어썼다.
이 전령이 벌떡 일어나 소주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모습에.
궤대 뒤의 증대랑이 당장 인상을 썼다.
“아니, 이 대인. 뭐 하는……!”
“어어?”
허우대가 좋은 이 전령의 커다란 손이 대뜸 눈앞으로 다가오는 장면에 소주가 바보 같은 소리를 냈지만,
증대랑의 불만스러운 항의도 다 나오지 못했다.
휘익, 투둑.
“에엑.”
술잔을 들던 왕 포쾌가 벼락같이 장노이의 팔을 꺾어 탁자에 깔아뭉개고,
어느새 다가왔는지 조 대야의 손이 증대랑의 목을 가볍게 내리치니.
퍽.
밀가루 반죽에 머리를 박으며 엎어지는 증대랑.
그런 장면을 볼 새도 없이 이 전령의 손이 조그만 소주의 얼굴을 와락 뒤덮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