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호중객잔(壺中客棧) (4)
백은 한 냥.
동전으로 천육백문(千六百文)에 해당하고 경사에서 가장 비싼 호화 객잔에서도 사나흘은 너끈히 머물 금액이다.
나라에서 직접 만드는 관은(官銀) 외에 허가받은 전장(錢莊)에서 소량으로 통용하는 정은(正銀)이 있지만, 무게와 크기 및 모양은 반드시 동일해야만 한다.
돛단배에 계란 노른자, 그리고 은빛.
이 한 냥짜리를 은정자, 혹은 은원보라 부르고.
무른 성질을 이용해 필요할 때마다 적당히 자르고 끊어서 화폐로 사용하면, 그걸 쇄은(碎銀)이나 은자(銀子)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웬만한 은자가 다 손톱만 한 부스러기요, 콩알 크기만 해도 상당한 액수거늘.
이렇게 온전한 은원보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거부호상(巨富豪商) 정도 되어야 만질 물건.
하찮은 쾌체 따위가 어떻게 지니고 있단 말인가.
증대랑과 장노이뿐 아니라 소주까지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보는 게 당연한 노릇.
해원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에, 서두르다 보니 이게 그냥. 이번 일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화주(貨主)가 생각 외로 많은 보상을 해주더군요. 덕분에 여기서 받은 좋은 대접에 적절한 값을 치를 수 있게 되었고요. 하긴, 한 냥은 너무 많은가? 하하.”
덜그럭.
은원보를 탁자에 내려놓곤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증대랑과 장노이의 시선이 빠르게 마주쳤다가 되돌아가는데,
그 순간.
“그, 그렇게 많다고 할 순 없. 우리 객잔은 워낙… 아, 그렇잖아요! 이 외진 곳에서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고, 온갖 대접을 이렇게나 잘해주니 다들 비싼 돈을 아끼지 않는 거죠. 한 냥이 뭐가 많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엄청난 거리를 다니는 쾌체라면서. 그럼 그 정도 보상은 당연한 거고. 엄청난 곳에 있는 객잔에 머물면 한 냥 정도는 지불해야, 에, 에, 에이취!”
돌연 떠들어대기 시작한 소주 때문에 멍해졌다가,
마지막을 장식한 재채기에 다들 화들짝 상체를 젖혔다.
그 와중에도 잽싸게 만두와 목수육 그릇을 챙긴 해원기, 찻잔과 차 주전자를 들어 올린 장노이, 지삼선 그릇을 소매로 가리며 질색하는 증대랑을 빼고는.
두부탕과 탁자 위가 온통 침 범벅이 되었다.
반짝이는 은원보까지.
“아이쿠, 놀래라. 괜찮아요? 명주 아가씨.”
해원기가 깜짝 놀란 얼굴을 도로 내밀며 되묻지만, 두 손은 만두와 목수육 그릇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려서.
그 희한한 모습에 증대랑과 장노이의 굳었던 표정도 씰룩이기 시작하더니.
“이 욕심쟁이 계집애가 눈이 돌아서. 호호호. 아유, 민망해라.”
“말이 된다. 크흐흐, 엄청난 대접이면 하루에 한 냥. 허허허허.”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도 통쾌한(?) 재채기로 탁자 위를 휩쓴 소주의 시선은 홀린 듯 은원보에만 꽂혀.
염려의 시선을 보내던 해원기조차 맥 빠진 웃음을 더해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은원보의 영롱한 자태가 산속에 처박혀 사는 소녀의 마음을 완전히 휘어잡은 모양.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는 의심이고 뭐고.
낯선 길손이라고 신경과민이었을 게다.
태항산을 오가는 장거리 쾌체, 뭔가 귀중한 물건을 제때 전해줄 신용도 있겠지.
사람에 따라선 편지 한 장이 황금보다 더 귀할 수 있다.
마침 그 주인이 고관대작이나 거부호상일 수도 있고, 원하던 걸 제때 얻은 기분에 호탕하게 돈 자랑을 했을 수도 있잖은가.
은원보 한 냥에 이런 호들갑이라니.
그리고 그 한 냥에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다 추태까지 보인 명주 아가씨라니.
한심한 호중객잔이다.
이 한심스러움에 바람도 힘이 빠졌는지,
시끄럽던 덧창이 어느새 조용해졌다.
“이 정도면 훌륭하죠? 마침 솜이불도 오늘 새로 펴놓은 거라고요.”
소주가 가리키는 대로 해원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주 깔끔합니다. 현성의 그럴듯한 객잔도 이렇게 좋지는 않죠.”
얼른 소주가 원하는 답을 해준다.
어처구니없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곧장 쉬러 들어왔지만, 물그릇 하나와 등을 가져다주더니 바로 나갈 생각이 없는 듯.
나지막한 침대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전부인 좁은 방을 알뜰하게 설명하면서,
소주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통에 할 수 없이 상대를 해줘야만 했다.
“한 냥이 과한 값이 아니라니까. 장이숙이 새벽에 거슬러준다고 했지만 굳이 받을 필요 없잖아요? 보아하니 그 허리띠 주머니 안에, 흠, 거참 묘하게 생겨서.”
은원보가 그리 맘에 들었나.
그것보다는 해원기의 독특한 허리띠가 궁금한 눈치. 그 영롱한 은원보가 대체 몇 개나 들었을까.
해원기가 허리를 툭 쳤다.
“이미 지불한 한 냥인데요, 뭐. 아, 이건 요대자(腰袋子)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잡동사니뿐 아니라 소금이나 향유(香油), 물도 담을 수 있는 편리한 물건이죠.”
허리띠는 요대(腰帶), 띠라는 대(帶)를 주머니라는 대자(袋子)로 바꿔도 발음은 똑같다.
먼 길을 오가는 직업, 당연히 휴대할 물건이 적지 않을 터. 또 요리에도 꽤 관심이 있는 티를 내니 판과와 더불어 이것저것 챙겨야 하겠지.
그런 점에서 요대자란 건 딱 어울리는 물건인데.
소주가 일부러 눈을 가늘게 떴다.
“뭐로 만든 거예요? 그냥 산짐승 가죽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쾌체 일 하려고 직접 만들었어요? 요리뿐 아니라 재봉 솜씨까지? 그런데 차림새는 영.”
증대랑 말마따나 까진 주둥이가 어디 가랴.
와르르 밀려드는 되바라진 소리에 해원기가 요대자를 풀며 머리를 저었다.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선물 받은 겁니다. 좀 특이한 가죽이라고 하셨고요.”
조금 낮아진 목소리.
식사를 마치고 피곤이 몰려온 티를 내어도,
“그 장거리 쾌체라는 게 꽤 버는가 보죠? 그 정도 주머니면 아까 은원보가 얼마나, 아유, 아예 커다란 구슬이나 면경(面鏡) 따위도 들어갈 크기네요.”
가까이에서 보는 소주의 호기심은 더 강해져 가나 보다.
해원기가 요대자를 끌러 의자 위에 놓으며 빙긋 웃었다.
“값나가는 걸로 꽉 채우면 좀 좋겠습니까만. 다 고달픈 생활 버텨주는 하찮은 것들뿐이죠. 참, 객잔에 우장(雨裝)이 있을까요?”
자칫 요대자를 다 까뒤집어야 끝날 것 같아서,
화제를 슬쩍 돌렸다.
“우장? 도롱이요? 있긴 있는데, 왜요?”
“그새 바람이 뚝 그쳤어요. 여기 날씨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모르지만, 새벽녘에 떠날 때 비가 올지도 몰라서.”
두 팔을 들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 경장이 추위는 막아줘도 젖으면 엄청 무겁고 딱딱해지는 게 탈이거든요.”
손목과 발목을 꽁꽁 싸맨 차림새에 허리를 바짝 조였던 요대자를 끌렀으니 두툼한 상의가 조금 벌어졌고,
그 속에 하얀 속저고리가 살짝 보여서 소주가 퍼뜩 시선을 돌렸다.
“아, 알았어요. 미리 내놓을 테니 어, 어서 쉬세요.”
아가씨 행세를 할 정도니 조숙한 편. 간만에 들른 길손이 젊은 사내라서 더 흥미로웠나.
그래도 가릴 건 가려야 한다.
비로소 남정네의 객방에 혼자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황망해져서 허둥지둥.
호기심이 대단한 주제에 더러운 차림의 청년이 의외로 깨끗한 속저고리를 입은 걸 따질 생각도 못 했다.
소주가 떠나고 방문이 닫히자.
해원기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후.”
피곤하다.
요대자. 사부에게도 있었다.
본래 교룡피(蛟龍皮) 재질의 연갑(軟甲)이었다던데 태원의 병기점에서 허리띠로 만들었다고.
그 안에 일찍이 신기(神器)라고 불렸던 물건을 담았다고.
사부가 자신을 위해 새로 만들 때 알려주셨던 얘기가 새록새록 기억난다.
과거의 물건은 웬만하면 다 없애버리셨다.
원한과 핏물에 젖은 낡은 물건들은 제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굳이 백산(白山)에서 희귀한 가죽을 구해다가 이 요대자를 손수 만드셨다.
북해(北海)의 절지에만 산다는 백호(白虎), 오래 묵어 영물이 되면 산왕(山王)이라 부른다던가.
산왕피(山王皮)로 이 요대자를 다듬으며 우연히 옛이야기를 꺼내셨었지.
그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사부가 요대자에 간직했던 건 오대산(五臺山)의 다섯 신기.
그 가운데 의가지보(醫家至寶)라는 구슬과 자부(紫府)가 잃었던 거울이 있었다는 걸,
설마 소주가 알고 말했을 리 없지만.
그 덕분에 오랜만에 요대자를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태원을 지나면서 병기점을 찾아본다는 것도 잊었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자신이 지닌 요대자의 원형(原型)을 만든 곳.
자연스럽게 쓴웃음이 지어진다.
병기점을 찾을 생각까지 잊을 만큼, 그렇게 바빴었나.
절그럭.
매달은 끈이 하나밖에 없는 판과도 풀어 두 손으로 잡았다.
“무너진 수로(水路)를 바위로 다시 쌓을 때 짓눌렸나. 끈 달아난 것도 몰랐네.”
스윽.
혼잣말과 함께 판과를 한 바퀴 돌리자 가운데가 조금 우묵해진다.
아무리 얇아도 철판이거늘 거울 닦듯이 손으로 돌렸다고 모양이 바뀌다니.
더구나 해원기의 혼잣말도 이상하기 그지없다.
쾌체라면서 수로를 다시 쌓았다?
제 모양으로 돌린 판과를 요대자 옆에 놓고 해원기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가죽이 다 헤진 조끼, 색이 바랜 경장, 손목과 발목에 감아놓은 천까지 벗어 단정하게 접어 둔다.
하얀 속옷 차림. 두 손을 들어 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침상에 걸터앉더니.
“아무리 잠심침령(潛心沈靈)이라도 닷새를 자지 못했더니 마디마디가 다 뻐근하네. 잘 먹고 잘 자는 게 제일 중요한데.”
중얼중얼 또 혼잣말.
버릇이다.
남몰래 혼자 강호를 떠돌면서 생긴 버릇.
깊은 산속이나 외진 황야에서 아무렇게나 노숙하기가 다반사요, 판과 하나로 대충 요기한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해도 제 시간에 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예 식사와 잠을 거르고 급행(急行)할 수밖에 없고. 또 처리할 일이 만만치 않으면 밤을 도와서라도 서둘러야 했으니.
이번에도 오대산을 이틀 만에 넘었다.
“산동에서 황하문(黃河門)과 연락하면 황신(黃汛) 대비는 얼추 되겠지. 엉망이 된 분하(汾河)의 수로 상황을 미리 살핀 게 다행이었어. 분서현(汾西縣)의 어르신도 마침 사리에 밝아서… 아흠.”
일정을 따져보다 그만 하품이 크게 나왔다.
오랜만에 남이 차려준 맛있는 식사를 했고, 제대로 된 침상에 푹신한 이불도 준비되어 있으니.
조식(調息)보다 증대랑이 차려준다는 조식(早食)을 기대하면서.
그대로 침상에 쓰러져버렸다.
사부가 몇 번이나 강조하셨었어.
잘 먹고 잘 쉬는 것. 무도(武道) 이전에 인도(人道)의 기초라고.
곧바로 잠에 빠져든다.
황토지대(黃土地帶)를 휘감아 도는 분하의 수로를 다시 쌓느라 뻐근한 열 손가락을 쭉 펴고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곤하게 잠이 들었는데.
‘음?’
문득 해원기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후두두두.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