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호중객잔(壺中客棧) (3)
판과를 끼운 허리춤만 해도.
먼지를 털어내고 나니까 그게 특이한 가죽 허리띠라는 걸 알았다. 어떤 짐승의 가죽인지 상당히 탄탄해 보이고 두께도 꽤 있어서 마치 주머니처럼 여러 가지 물건을 넣을 수 있을 터.
가끔 사냥이랍시고 객잔에 얼굴을 비치는 황장촌의 왕삼숙(王三叔)도 저런 허리띠는 갖추지 못했다.
산속에 파묻혀 지내는 소녀의 호기심을 어지간히 자극하는 청년.
해원기가 성큼 장노이에게 다가가 물 주전자를 들었다.
“제가 들지요. 여긴 물이 귀할 테니.”
소주가 내준 수건, 그리고 장노이가 든 커다란 주전자.
그게 제대로 씻으라고 준비한 따뜻한 물이라는 걸 진작 알아챘던 모양.
물 주전자를 대신 들어주려는 해원기의 든든한 손에 장노이가 미소를 머금었다.
낯선 손님. 은근히 수상한 구석이 엿보이기는 해도.
예의 바르고 곰살궂은 데가 있어서 절로 마음을 놓게 한다.
그러고 보니 해원기라는 이 청년, 처음부터 반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 소주에게조차.
“이 지삼선(地三鮮)은 정말 특별한데요. 아주 맛있습니다. 노반랑(老闆娘).”
몇 점을 집어먹지도 않고 감탄을 표하는 해원기에게,
“그깟 지삼선 가지고 뭘. 그리고 증대랑(曾大娘)이라고 부르게. 노반랑은 역 어색해서.”
막 또 하나의 요리를 내려놓던 소주 엄마가 넉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증대랑.”
지삼선은 감자, 가지, 파란 고추를 볶아 만드는 요리. 그야말로 어느 집에서나 해 먹는 가장 흔한 음식이라 요리라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해원기는 눈까지 반짝이며 새로 나온 요리에 시선을 옮겼다.
“그깟 이라뇨? 누구나 할 줄 안다지만 정말 제 맛을 내기는 어렵지요. 이건 목수육(木鬚肉)인가요? 크으음, 향기가 정말 좋고, 모양도.”
목수육도 마찬가지. 돼지고기 다릿살과 계란, 목이버섯을 한데 지져냈을 뿐이다.
해원기의 연이은 탄성에 마지막으로 뜨끈한 탕과 만두를 내려놓던 소주가 살짝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 엄마 비위를 잘 맞추면 혹시 뭐라도 더 나올까 해서 그러는 건가?”
한 마디라도 더 종알거리는 소주 때문에 증대랑의 미간이 좁아지는데.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며 얼른 입을 열었다.
“비위를 맞추는 게 아니라. 이 지삼선은 간단해 보여도 감자, 가지, 고추를 칠성(七成)의 화력으로 차례대로 볶는 게 관건. 하나라도 잘못되면 곤죽이 되기 십상이죠. 게다가 목수육은 술과 간장을 적당히 맞추지 않으면 아예 이런 향기가 나지 않고, 미리 볶은 계란과 무르기 쉬운 목이버섯을 알맞게 투입해야 하니까. 냄새만 맡아도, 아니 보기만 해도 증대랑의 솜씨를 모를 수가 없습니다.”
주르르 쏟아지는 요리의 품평에.
소주의 종알거리던 입도, 증대랑의 좁아지던 미간도 맥없이 풀어지고,
탁자의 맞은편에서 찻잔을 들던 장노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 이거 정말. 쾌체 일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단 말이지? 하하.”
어느 집에서나 해 먹는 흔하디흔한 음식을 이렇게 정확히 평가하는 건,
해원기라는 이 청년이 실제로 음식을 제대로 할 줄 안다는 의미다.
장노이의 웃음에 증대랑 역시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 앉았다.
“판과를 걸치고 먼 길을 오가는 쾌체라더니 꽤 솜씨가 있는 모양이네. 이 증대랑의 손맛을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은 드문데.”
흐뭇한 표정.
객잔에 손님이라곤 해원기 혼자이니 당연하다는 듯 증대랑과 소주까지 한 탁자에 앉는다.
“아.”
해원기가 얼른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을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면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에 좋은 분위기까지. 오는 길이 무척 고달프긴 했지만 보람이 있네요.”
듣기 좋은 말.
게다가 단정하게 앞에 놓이는 젓가락까지.
듬직한 체구의 증대랑과 되바라진 입을 놀리는 소주조차 이 생면부지의 청년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객잔에 손님을 들인 게 아니라 오래 떨어졌던 가족이 다시 모인 듯한 분위기.
역시 소주의 가벼운 입이 먼저 나불댄다.
“못된 언니보다 이런 오빠가 있는 게 훨씬 낫겠네.”
“언니가 있어요? 어디에…….”
“아, 요 계집애가 또 그 못된 주둥이를.”
“하, 소주 언니가 하나 있지. 공부하러 타지에 있다네.”
객잔에 와서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궁금해하는 해원기,
질색하며 소주를 꾸짖으려는 증대랑,
그리고 얼른 말을 받아 소주의 머리통을 보호(?)하려는 장노이의 말까지.
한꺼번에 와르르 말이 섞여서 그야말로 한 가족 식탁 풍경이 되어버렸다.
필경 낯선 손님일 뿐이다.
한 탁자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지만 제대로 흥미를 느끼는 건 소주 하나.
증대랑과 장노이는 미소와 너털웃음을 더해주지만 시선은 해원기의 거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다.
“쾌체 일을 한 게 벌써 육 년이 넘는다고? 꽤 오래되었구먼.”
“네. 처음엔 고향인 당산(唐山)에서, 그 다음엔 사람이 많은 경사(京師)와 석가장(石家莊), 그러다가 아예 태항산(太行山) 줄기를 타게 된 거죠.”
“허어, 어째 그리 고생을 찾아다녔노? 사람 많은 데가 더 나을 텐데.”
“그게 꼭 그렇진 않더라고요. 경사나 석가장 같은 곳은 경쟁이 어마어마해서. 흠, 토박이가 아니면 제대로 발붙이기도 쉽지 않답니다. 남이 하지 않는 걸 맡으려면 장거리라도 뛰어야지요 뭐. 오, 이 두부탕(豆腐湯)은 혼돈(餛飩)이나 면을 넣으면 더 맛있.”
“집엔 안 돌아가요?”
열심히 먹던 해원기의 손이 멈추었다.
증대랑과 장노이가 은근히 내력을 알아보려 묻는 걸 뻔히 짐작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다가,
소주가 불쑥 묻는 말에 조금 변한 표정.
두부탕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가 조용히 대답한다.
“집은… 새해를 지내고 바로 떠났군요.”
가라앉은 음성과 아련해진 눈빛 때문에 질문을 던진 소주가 괜히 입맛을 다셨다.
괜한 걸 물었나?
그러나 장노이는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들며 말을 받았다.
“그렇지. 새해는 온 가족이 단취(團聚)할 때니까. 먼 타지를 다니는 일이라 식구들이 걱정이 적지 않을 터, 명절에는 돌아가야지. 암.”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는 건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가족들은 다 무탈하던가?”
먼 길을 오가는 쾌체 일이라도 명절에는 집으로 돌아가 지내기 마련. 마침 입춘을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니 어떻게 설을 지냈는가 묻는 건 흔한 인사다.
그 잠깐 새에 해원기는 표정을 회복했고,
“네. 정성껏 예를 다해 모셨습니다. 덕분에 며칠은 조용히 쉴 수 있었죠.”
목소리도 다시 밝아졌지만.
이 대답에 장노이와 증대랑의 표정이 묘해지고 소주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잘 지냈다는 의미 같은데 그 표현이 영 특이하다.
명절 중의 명절,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죄 모여서 격식을 차릴 새 없이 떠들썩하게 노는 게 일반적이다.
정성스런 예로 모셨다느니, 조용히 쉬었다느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데.
“그러고 보니 꼬마 아가씨 언니도 얼마 전까지 객잔에 있었겠네요.”
소주에게 타지에서 공부하는 언니가 있다고 들었고,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까 새해를 지내고 떠났으리라.
그쯤 짐작하고 건네는 말에 소주가 대뜸 입을 삐죽거렸다.
“치, 명절 챙길 줄이나 아나? 벌써 몇 년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
“소주!”
“한참 중요한 공부를 할 때고, 어흠,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 시간을 내기 어렵지. 우리도 꽤 아쉽지만 또 한편으론 든든히 여긴다네.”
증대랑의 꾸짖음과 이어지는 장노이의 간단한 설명. 또 말을 끝맺지 못한 소주의 입이 댓 발이나 나온다.
화제가 슬쩍 넘어갔다.
소주의 이름은 증명주(曾明綢).
자란 환경이 남달라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조숙한 아이. 타고난 성격이 활발해 말이 많더니 아홉 살 무렵부터는 아예 어른을 놀려대기 시작했고, 이제는 빈번하게 엄마인 증대랑과 말다툼을 벌인다.
증대랑도 워낙 강한 성격이라 곧장 손찌검을 하기 일쑤요, 어떻게든 두 모녀 사이를 풀어놓는 게 장노이의 일상이 되어버렸는데.
가만 따져보면 그게 다 소주의 언니가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
장노이가 소주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형수를 닮아 겉으론 뻣뻣해도 뒤로는 항상 소주를 지켜준 든든한 언니지. 소주는 사실 증대가(曾大哥)를 빼다 박은 성격이고.’
쾌활했던 큰형, 반면에 여자답지 않게 굴강한 형수. 그 사이에서 나온 두 자매는 신통하게도 부모의 성격을 각각 나누어 받았다.
그렇게 옛 기억까지 떠올리던 장노이의 눈썹이 훌쩍 올라붙었다.
“하, 이 객잔이 이렇게 활기 넘치는 건 전부 꼬마 아가씨 덕이군요. 부럽습니다.”
“응?”
헤벌쭉 벌어지는 소주의 입가와는 달리 증대랑의 표정도 묘해졌다.
좋게 말해 쾌활한 거지, 그 되바라진 성격을 처음 본다고 모를 수 있나.
허나 그냥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어서.
증대랑의 음식을 칭찬할 때처럼 진심이 담겼다.
기껏 열두 살 먹은 계집애. 그런데도 꼬박꼬박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며 반말도 섞지 않는다.
해원기의 맞은편에 앉은 소주가 코를 찡긋거리다가,
“꼬마 아가씨는 좀 그렇고. 그냥 명주라고 이름을 부르면 돼요. 헤헤.”
쑥스럽게 입가를 닦으며 풀어진 웃음을 흘리자.
이번에는 증대랑과 장노이가 마주 보며 눈을 껌뻑였다.
어이없는 정도를 넘어 믿기 어렵다는 의미가 교환되고, 세상 착하고 귀여운 소주를 다시 한번 훑어보아야 했다.
버릇없고 되바라진 꼬마 계집애가 어느새 여우방망이가 되었나.
제 이름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밝히는 건 거의 태어나서 처음인 듯하다.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지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다.
“오, 증명주. 정말 예쁜 이름이군요. 그럼 이 객잔은 증대랑과 따님, 그리고 장 아저씨 세 분이서만? 하아, 대단하십니다.”
소주의 언니는 중요한 공부로 몇 년간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으니 단 세 사람이 외진 산속에서 살아가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터.
꽤 감명을 받았나.
혼자서 몇 번이나 머리를 끄덕거리곤 토실토실한 만두 하나를 집어 드는 모습에.
장노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음, 대단하달 것까지야. 그런데 자네는 얼마나 머물 셈인가?”
만두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얘기가 자꾸 묘한 방향으로 틀어지는 느낌에 대놓고 물어볼 작정을 해서인데.
해원기가 만두를 쪼개면서 입맛을 다셨다.
“쩝, 오래 있을 수 있나요. 서둘러 산동으로 넘어가야 할 처지, 이렇게 잘 먹은 김에 날이 밝으면 바로 출발하렵니다. 생각 같아서는 증대랑의 요리를 좀 더 맛보고 싶지만.”
이쪽은 진짜 식욕 때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만두 조각에 목수육을 얹어 덥석 입 안에 넣는 모습이 절로 군침을 돌게 할 정도다.
증대랑도 음식 접시를 해원기 쪽으로 밀며 말을 받았다.
“그렇구먼. 하긴 일정이 바쁘지 않고서야 이 길을 택했을 리 없지. 그럼 아예 교자(餃子)를 조금 빚어놓았다가 두부탕 남은 거랑 같이 줄까? 아침 식사로.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속이 든든할 거여. 에, 허면 계산을 먼저…….”
혼돈 대신에 교자면 큰 선심을 쓰는 셈이요, 그런 만큼 일찍 떠날 손님에게 미리 돈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식사 중에 돈 얘기를 꺼내서 증대랑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짓자.
해원기가 얼른 허리춤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다 뺐다.
“움움, 아, 고맙습니다. 당연히 계산을, 어.”
먹느라 바쁜 입으로 말까지 하면서, 옷에다 쓱쓱 닦은 손을 허리춤의 주머니에 넣는 동작이 부산스럽다.
단정한 생김새에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말투지만 어째 행동은 객잔 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엉성한 구석이 있고,
그러지 않아도 희한한 허리띠가 궁금했던 소주가 상체를 내밀어 살피는데.
“어어?”
“흠.”
“이건.”
꺼낸 물건에 놀라 주머니 속은 들여다볼 새도 없었다.
종이로 접은 돛단배처럼 둥그런 아랫부분, 허나 뾰족한 돛대 대신에 계란 노른자처럼 볼록 얹어진 위쪽, 그리고 손바닥 가득 하얗게 빛나는 자태.
소주가 눈길을 뺏기는 동안 장노이가 또 침을 꿀꺽 삼켰다.
“백은(白銀)… 은정자(銀錠子)는, 흐음.”
“은원보(銀元寶)는 정말 오랜만이군. 쾌체 행색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돈이야.”
한쪽 팔을 탁자 위에 올린 증대랑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제야 장노이의 표정도 굳어지고, 소주 역시 풀어졌던 미간을 좁히며 해원기를 쳐다보니.
조금 전까지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 대신에,
기묘한 냉기가 흐른다.
솨아아.
덜컹, 덜컹.
더 거세진 바람 탓에 덧창이 요란스럽게 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