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언(引言)
강호의 풍문이란 게 본래 그렇다.
진실인지 혹은 거짓인지보다 그만큼 매혹적인 얘기인가가 중요하다.
풍문이란 누군가에게서 듣고 또 그걸 남에게 떠들어대는 것이니까.
그저 들은 얘기인데.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그걸 떠든 이가 그만큼 믿음직한지, 직접 목격했는지. 아니,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조차 따지질 않는다.
그런데도 그걸 굳이 입에 담아 남에게 전할 생각이 드나 보다.
입에서 귀로, 또 귀에서 입으로.
한 사람을 건널 때마다 더 부풀기 마련이어서.
신주의 영웅(英雄)이 얼마나 위대하고, 지부의 마왕(魔王)이 얼마나 무섭고, 벽세의 사신(邪神)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같은 그런 얘기들 말이다.
허나 오랜 풍문이 전설이 되어 전한다 해도,
설사 그 전설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도,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잊히는 법이다.
한때 세상을 뒤덮을 광풍처럼 퍼진 소문이라도 말이다.
워낙 믿기 어려운 얘기였지 않나.
지나간 일일 뿐.
아무리 신기해도 자주 듣다 보면 질리게 마련이고, 또 차츰 의심하게 되는 거다.
‘그게 설마 진짜 있었던 일이겠어?’
라고.
그래서,
세상은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원한다.
언제부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전혀 알 길 없으면서도,
그렇게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자극, 새로운 감동. 물론 강호의 풍문이 본디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특징을 가지긴 하지만.
그 가운데 사람이라면 지닐 수밖에 없는 아련한 희망이 담기는 것도 당연하다.
아련한 희망이라.
세상은 워낙 어지럽고 강호는 워낙 험악해서,
사람이 사람을 시기하고,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여.
정(情)을 잃은 세상, 정이 끊긴 강호.
언제나 조바심을 내고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삶.
그 삶을 밝혀줄 한 줄기 희망을 새로운 소문에 싣는다.
누군가 없을까, 따뜻한 정으로 구해줄 이 없을까.
어떤 어려움에 처했더라도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도와줄 이가 있었으면.
게다가 그가 참으로 부드럽고 다정하다면.
믿음직(信)하고 의로운(義) 이.
지켜주고, 도와주고, 보살펴준다면 안심하고 기대어 다시 사람에게 정을 붙이고 살아갈 것 같은데.
어쩌면 이건 희망이 아니라 지독히 편협한 욕심일지 모른다.
이 각박한 세상 어디에 그런 인물이 있을까.
신의를 지키면서 협의를 행한다고?
아마 힘겹고 괴로운 삶이 불러온 헛된 망상일 게다.
신의가 있다 해도 남을 돕는 협의는 또 다른 문제.
뜻이 아무리 높아도 그 뜻을 행할 힘이 있어야지, 괜스레 잘난 척 나서다간 험한 꼴을 보기 십상이고.
바른 말 한 마디 했다가 헛되이 목숨까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힘을 지녔다고 해도 또 무슨 이득이 있기에?
이(利)라는 글자 앞에서는 신의고 협의고 다 의미 없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생각해 보면 절로 쓴웃음이 나올 허망한 바람일 뿐.
헌데.
만약에,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 이가 있다면 말이다.
정말로 뜻과 힘을 갖추고서 남을 즐거이 돕는 이가 있다면 말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의 변화가 언제나 한결같이 운행하듯이,
사람의 정(情) 또한 한결같을 게다.
습무지도(習武之道)는 곧 위인지도(爲人之道)요, 익힘은 곧 쓰임이라고 했다.
무를 익힘은 남을 위함일지니.
검(劍)은 흉기라지만,
그 검을 익혀 사람의 정을 찾는 이.
그가 걷는 무도(武道)는 결코 힘으로만 지배하려는 패도(覇道)가 아니라,
진정한 사람으로 사는 궁극의 왕도(王道)일 터.
그리고,
헛된 망상이든 허망한 바람이든.
가녀린 희망에 응해 사람을 돕는 이에게,
단 하나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참다운 사랑이리라.
참다운 사랑을 찾는 이.
신의를 지키고 협의를 행하는 이.
믿기 어렵지만 그런 이가 정말 있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얼핏 들리는 듯하다.
정확히 어떤 이인지는 몰라도 그저 그를 형용하는 놀라운 구절과 함께.
풍화절세(風華絶世), 응양구천(鷹揚九天).
풍모와 재주가 세상에 견줄 데 없이 뛰어나고, 그 기세는 마치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매와 같도다.
춘(春), 풍지서(風之序)
풍비(風碑).
-바람(風)은 무엇이냐?
바람은 변화(變化)이다.
천지간에 바람이 없는 곳은 없으니 이를 일러 팔풍(八風)이라 하도다.
동쪽은 명서풍(明庶風), 동남쪽은 청명풍(淸明風), 남쪽은 경풍(景風), 서남쪽은 양풍(凉風), 서쪽은 창합풍(閶闔風), 서북쪽은 불주풍(不周風), 북쪽은 광막풍(廣莫風), 동북쪽은 융풍(融風)이라 부른다.
무릇 바람이 움직이면 온갖 충류(蟲類)가 살아나므로 그 글자가 풍(風)이 된다.
미물조차 그 생명을 얻는 바이니 무엇이 그 생기(生氣)를 대신하겠는가.
만물(萬物)이 자생(滋生)하고 만상(萬象)이 갱신(更新)하는 바탕이라,
음양(陰陽)이 노(怒)하여 이루어지기에,
이를 변(變)이라 하고.
또한 하늘의 때에 맞추어 팔풍이 바뀌는 법이니 율이불간(律而不奸)하여 상서롭다.
그러므로 풍(風)의 본래 글자는 봉(鳳)과 같구나.
그러나 천지의 운행이 어찌 정률(定律)로만 이루어질까.
가녀린 미풍(微風), 따뜻한 훈풍(薰風)과 달리 견디기 어려운 광풍(狂風)이나 숨이 막히는 질풍(疾風) 또한 드물지 않은 건,
꽉 막힌 세상을 제대로 숨 쉬게 하려는 의지일지니.
그 의지를 배운 이들이 다시 다른 뜻을 더했도다.
바람은 빠름(快)이요, 바람은 흩어짐(散)이다.
흘러가는 풍속(風俗)이요, 느껴지는 기풍(氣風)이다.
어디선가 들려온 풍문(風聞)이고,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리는 감화(感化)까지.
고로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화(化)가 되었다.
요컨대,
바람은 대변(大變)의 근원이고, 대화(大化)의 시초라서.
변화가 이에 달렸도다.
잊지 말라.
울연대관(蔚然大觀)의 풍광(風光)도, 무진적성(無盡摘星)의 장보(藏寶)도,
대해염천(大海炎天)의 화합(和合)도, 천금비상(千禽飛翔)의 웅위(雄偉)도,
백기제조(百器製造)의 공교(工巧)도.
바람의 지극한 비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바람이 불어야 구름(雲)이 일고, 구름이 일어야 우레(雷)가 치며, 우레가 쳐야 비(雨)가 내리는 것을.
이로 인해 세상 밖에서 함부로 나오지 못했음을.
변(變)을 알았다 해도,
화(化)를 깨달을 때까지는,
결코 동문(洞門)을 벗어날 수 없으리.
삼가 지밀경(至密境) 풍뢰동(風雷洞)의 입구로 이 비석을 세운다.
심오하고 난해한 글귀가 잔뜩 새겨진 거대한 석비.
그 석비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어린 소년이 짧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동구(洞口)에서부터 이렇게 어려운 얘기라니. 더구나 천외육가(天外六家)가 전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건 아무리 지밀경이라고 해도 좀…….”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년의 혼잣말이 흐려지며 눈이 둥그레졌다.
동굴 입구를 가릴 정도로 큰 석비의 바로 뒤쪽에,
웬 인물이 무릎을 꿇은 채 석비를 향해 커다란 머리를 숙인 광경.
얼핏 뒤쪽에 받친 조각으로 여길 정도로 석비와 똑같은 느낌이라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소년이 말을 끊고 무거운 눈썹을 내렸다.
보통 사람보다 큰 머리엔 한 오라기의 머리털도 없고 숙인 목을 따라 양쪽의 귓불만 길게 늘어졌다. 바짝 마른 왜소한 몸매가 다 드러나는 낡은 도복, 머리와 목, 바닥을 짚은 손등까지 주름이 가득한데.
소년이 다물었던 입을 다시 열었다.
“석화(石化)되었다.”
푸른빛이 살짝 빛나는 눈동자. 사부에게서 배운 동시안(洞視眼)이 저절로 움직여 이 기이한 광경이 무엇인지 밝혀냈다.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많은 노인, 바닥에 거친 자리를 하나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건 이른바 석고대죄(席藁待罪)의 자세요, 그 자세 그대로 숨이 끊겼건만.
시신뿐 아니라 걸친 도포와 손바닥이 짚은 거친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 늘어진 풍성한 흰 수염까지 모조리 돌이 되어서,
하나의 정교한 조각상으로 화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그것보다 동시안이 저절로 일어난 일에 소년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운용하는 데에 꽤 집중이 필요했었는데.
마치 반가운 이를 만난 것처럼 이 기이한 조각상을 훑어대고, 기어이 풍비 뒤쪽 면에 조그맣게 새겨진 글귀를 찾아낸다.
-세상에 간섭하지 않고 세상을 지키려는 삼공(三公)의 유지(遺志), 육가지명(六家之命)은 마침내 모두 깨져 버렸다.
이 못난 늙은이가 혼세(混世)가 크게 성숙하는 기미를 제멋대로 판단하여 천리(天理)를 속이고 감히 세상에 나감으로써.
천외(天外)는 기어이 그 소이(所以)를 다하지 못했더라.
망령되이 제 재주만 믿고 제멋대로 신선인양 천의를 모독했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하랴.
천기가 비록 제자리를 찾아 육가지명 역시 세상에 녹아드는 게 당연한 때라 해도,
스스로 지은 죄, 스스로 벌해야 마땅하리.
다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못난 늙은이의 풍화지상(風化之像)이 장차 마지막으로 풍뢰동을 찾는 분께 작은 도움이 될 터.
청강보병(靑江寶甁)을 자물쇠 삼아 이제지검(夷齊之劍)의 열쇠로 열고 해동천응(海東天鷹)이 길잡이가 되어 이곳에 이르신 분.
입구의 풍비(風碑)와 출구의 뇌비(雷碑)에 개의치 마시길.
풍뢰가 지닌 변화의 요결은 본래의 주인에게 바로 돌아갈 것이라.
언제나 사람과 함께하려는 다정(多情)의 힘이 되리다.
인세를 떠나기 전에 풍뢰동의 모든 것을 풀어 남겼으니 일독(一讀)으로 족하리.
죄만(罪萬)한 늙은이가 감히 아뢰나이다.
“헛!”
소년이 탄성을 토하며 머리를 퍼뜩 들었다.
놀라운 일.
이 조각상으로 보이는 시신이 새긴 듯한 글귀는 마치 자신이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니.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이 등에 맨 기다란 고검(孤劍)을 찾고, 시선은 아득한 공중에 초점을 맞춘다.
삐이잇.
까만 점처럼 보이는 해동청 한 마리가 주인의 시선에 답해 울어댔다.
“이런 기막힌 일이…….”
소년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는 건 얼마 전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사부에게서 검을 처음으로 전해 받은 날 밤.
흥분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몰래 망고암(望古巖)에 나와 검을 꺼내보았다.
사부가 귀왕검(鬼王劍)을 제하고서 전해 주었다기에 다시 한 번 자세히 검신을 살펴보고 싶었다.
얼마나 무섭고 슬픈 검이었을까.
사부조차 함부로 뽑지 못했었다던데.
그러면 십대검상(十大劍相)의 한 자리는 어떻게 하지? 과연 나는 사부의 십대검상을 다 이어받을 수 있을까?
이 고죽지보(孤竹之寶)는 어떻게 한 자루가 전혀 다른 열 자루의 검으로 변하는 걸까?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그만 동강(東江)이 어깨에 앉아 머리를 건드리는 것도 몰랐었다.
어려서부터 키운 희귀한 해동청.
밤에 혼자 나와 검만 만지작거리니까 장난을 걸고 싶었나.
딴생각에 빠졌다가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동강과 뒤엉켰고 동강의 퍼덕거리는 날갯짓에 고검이 손을 벗어났다.
망고암은 바로 바닷가 절벽.
사부에게 받은 날, 고검을 바다에 빠뜨려서야!
간신히 검극을 잡아채다가 소매에 넣어두었던 청강주(靑江珠)가 튀어나왔고, 공교롭게도 고검의 날에 쪼개지면서 희한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물안개로 화한 청강주가 전신을 뒤덮으면서 뒤엉킨 동강에게도 일부분이 닿더니,
그대로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나 마치 꿈을 꾼 듯했지만,
갑자기 온몸을 떠는 동강을 보면서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깃털이 파도치듯 출렁이며 두 날개가 죽죽 늘어나고 부리와 발톱은 아예 새파랗게 예기를 뿌리며 커져 갔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도도한 흐름, 그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장강대하(長江大河)의 힘과 다름없었다.
나중에 사부에게서 청강주가 본디 수원지정(水源之精)이었다는 해석을 듣고서야 간신히 이해했지만.
이게 또 이렇게 풍뢰동과 이어질 줄이야.
그리고 이 돌로 화한 노인이 예견했을 줄이야.
한참을 멍하니 있던 소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사부님이 예전에 세상 어떤 물건도 인연 없이 닿지 않는 법이라고 하시더니만. 대체 나에게 어떤 인연이기에 천외의 잊힌 힘이 전해지는 걸까?”
오른손이 살며시 고검의 손잡이를 쓰다듬고,
시선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동시안의 푸른빛이 사라진다.
“탁 소숙이 천금가(千禽架) 천응령(天鷹嶺)의 기연으로 범천법뢰(梵天法雷)를 통해 무극경(無極勁)을 깨달았다고 들었는데.”
역시 사부에게 들은 얘기.
당세에는 극히 소수의 인물만 아는 고사(故事)지만.
천외육가라는 사라진 과거와 얽히는 인연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다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섣불리 동요할 정도로 그간의 공부가 허술하지 않았다.
소년이 검병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석화된 시신을 향해 정중한 예를 취했다.
“저 해원기(海元基)가 노인께서 기대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남기신 인연을 찾은 처지에 어찌 태만하겠습니까. 소중히 여겨 잘 배우겠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산 사람을 대하듯.
가만히 말을 건네고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정하게 동굴로 향하는 걸음.
해원기가 동굴로 접어들자,
스스스.
조각상이 아주 조금씩 가루로 화하기 시작했다.
석화(石化)가 아니라 풍화(風化)라고 남긴 노인의 글귀대로.
입구가 곧 출구요, 풍비가 바로 뇌비이듯,
단단한 돌도 결국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이다.
절령제일(節令第一) 입춘(立春)
입(立)은 시작이라는 뜻이라, 입춘은 바로 봄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허나 때아니게 광풍이 불고 폭우가 내리며 심지어 눈까지 쏟아지니.
봄은 왔다는데 봄 같지가 않구나.
그래도 문득 비추는 햇빛 한 가닥, 뜻밖에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
다시 살아나는 즐거움을 기대하도다.
어차피 봄은 시작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