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삶의 이유(5)
공허.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청유백이 처음 느낀 감각은 그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져지는 것도,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 또한, 똑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죽음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청유백은 일순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앵.
그러나 종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범종을 넘어, 하루의 끝을 알리는 만종의 소리.
세 번, 다섯 번을 넘어, 이윽고 열 번을 쳐대는 거대한 종의 소리였다.
그래, 기억이 난다.
분명히 이 도시에 들어오고 나서 몇 번인가 신경에 거슬렸던 소리였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그때 느꼈던 의문의 기시감은 이것 때문이었던가.
기묘하게도, 청유백이 같은 삶을 다시 시작할 때 들었던 종소리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던가.
‘그럼… 이번에도 다시 시작하는 건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갑작스레 다시 어려져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빛이 다시금 찾아오지는 않았다.
첫날, 청유백이 살수에게 습격당하는 날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청유백은 기억을 되짚었다.
마지막 순간, 그 빌어 처먹을 과거의 망령이 무엇이라 지껄였는지 돌이켜 보았다.
육련. 그리고 홍련.
‘육도의 홍련이라 했다.’
육도홍련신공.
청유백이 익힌 무공의 이름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익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무공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시간을 되돌리는 효능 따위는 없다는 것 또한 잘 기억하고 있었다.
…최소한, 청유백이 기억하기로는 그러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있는가.’
청유백은 스스로 자문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곳은 공허했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천화의 목소리도, 그 시황제의 목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뿐.
청유백은 웃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원래 그랬지. 항상 그랬어.’
언제부터였던가.
이제는 그 질문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느 수준의 경지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는 모든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야만 했다.
어떻게 강해져야 하는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그 누구도 자신을 가르치지 못했기에, 자신이 스스로 알아내야만 했더랬다.
그 상황이 오랜만에 다시 온 것뿐이었다.
청유백은 웃음 지었다.
……혼자.
그래, 혼자.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왜인지, 가슴 한쪽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만 같은 단어이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피어났다.
따스한 기억.
그 편린이 청유백의 볼을 매만졌고, 청유백은 일순간 천 년 전의 한 장면을 보았다.
* * *
그것은 소년과 소녀였다.
그들은 처음엔 다투었지만, 점차 서로를 인정해 나가며 각자의 위치를 찾아 나갔다.
“하백. 나… 신녀로 간택받았어.”
“뭐? 그러면…….”
소년은 웃었다.
두 사람은 기뻐 보였고, 두 사람의 미소가 교차했다.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기억해? 내가 신녀가 되면, 네가…….”
“당연히, 너를 지킬 무사가 되겠다고. 그렇게 맹세했었지. 기억하고 있어.”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서로를 보며 웃어 보였다.
* * *
빛은 다른 장면을 비추었다.
다시금, 그것은 소년과 소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성장하여 자신의 본분을 다할 나이가 되었으며, 그들의 앞에는 낯선 청년이 있었다.
“인사드립니다. 서복이라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 유명한 통일 제국의 사신께서, 이 변방의 마을에는 왜…….”
“다름이 아니오라, 황제께옵서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 계셔서 말입니다.”
“황제?”
“아아, 괘념치 마시지요. 스스로를 높이는 것을 좋아하셔서 말입니다. 아무튼, 어떠십니까?”
자신을 서복이라 소개한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그 예법은 완벽했으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어딘가 사람을 매혹하는 매력마저 있었다.
“당신들이라면 들어 주실 수 있을 것 같군요. 곡식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조금의 거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정말이십니까? 이 가뭄에… 이 변방까지 곡식을 빌려주실 수 있으신 겁니까?”
“가능하고말고요. 성공만 하신다면… 이 서복의 목숨과 진나라의 명예를 걸고, 마을의 모두를 평생토록 풍족하게 지원하겠습니다.”
“……!!”
소년과 소녀는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최근 발생한 기근 탓에, 마을 사람들이 몇 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수십 명이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헌데, 저 거대한 왕조에서 약속하는 풍요라니!
무슨 거래라 한들,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서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행복이 찾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시간은 흘러, 소년은 더욱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
청년의 눈앞에는, 똑같이 나이를 먹어 조금 중년이 된 서복이라는 이가 있었다.
청년은 죽간들을 확인하며 서복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자료를 어떻게 모은 겁니까? 그야말로 수만 명을 생매장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데…….”
“하하, 그건 기밀입니다. 저희 측에도 유능한 인재가 많다고만 말해 두지요.”
“흐음, 그렇습니까?”
뭐,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 정보와 결과가 있다면, 그녀의 연구는 조금 더 박차를 가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들은 빨리 결과를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마을의 안정을 위해서.
* * *
첫 번째 꾀를 내어 불사를 탐했으니, 그것을 일계(一界)의 묵련이라 했다.
두 번째 방법으로서 새로운 방법을 찾았으니, 이선(異線)의 청련이라 했고.
세 번째에서 비로소 하늘에 닿아, 삼천(三天)의 백련이라 했다.
네 번째에는 죽음에 닿아 사경(死境)의 녹련이었고.
다섯 번째에는 온전하여 황제께 헌사했으니, 그 이름이 오온(五蘊)의 황련(黃蓮)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비술은 완성되었으나,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과로였다.
“천화! 정신이 들어?”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어…?”
“이틀,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이. 천화, 쉬는 게 좋겠어. 황제한테는 내가 갈게.”
“아냐. 나는… 나는 마을의 신녀야. 황련을 집도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니까……거래를 마치기 위해서는 내가 가야만 해.”
“하지만 반년이 넘는 여행길일 거라고!”
“괜찮아. 네가… 같이 갈 거잖아.”
“…….”
그녀는 사내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녀가 쓰러진 것은 최근 잠을 청한 빈도가 줄었기 때문일 테다.
오히려 여행을 하며 숨을 돌리면, 조금 더 건강이 나아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그러나, 비극은 찾아왔다.
사내가 의심하지 않은 탓이었다.
설마 이 거대한 통일 제국의 황제가, 스스로 약조한 것 하나조차 지키지 않을 정도로 비열하고 치졸할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사내는 무력했다.
그가 아무리 수련을 쌓았다 한들, 결국은 시골 변방의 무사 한 명일 뿐이었다.
그녀는 천재였지만, 사내는 그러하지 못했다.
쉼 없이 노력할 정도로 인내심은 뛰어났지만 재능은 평범했으며, 그런 범인으로서는 세상을 휘저을 만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상대가 황실이라면, 더욱이 그러했다.
그는 홀로 황궁에서 쫓겨났다.
목숨을 부지한 이유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재밌다는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황제의 면상이 똑똑히 기억날 뿐이었다.
함께했던 여인을 잃어버린 채로, 그는 마을로 돌아왔다.
어쨌든 약속은 지킨답시고 황제에게서 받은 재물들을 마을에 전한 뒤에는 다시 황실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천화를 찾으러 말이다.
그러나 마을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마을의 사람들이 아니라─
거대하게 불타는 산의 광경뿐이었다.
“아아아아악!!”
온갖 비명과 신음이 마을에 가득했고, 온 산에서 죽음의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가 아는 사내가 한 명 보였다.
뒷짐을 지고서, 그 광경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사내가.
“서복!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아… 미안하게 됐습니다. 폐하께옵선, 질투가 많으신 분인지라…….”
자신 외에 다른 이가 영생을 지니면 안 되니, 제거하라 하셔서 말입니다.
서복은 웃으며 그리 말했다.
사내는 단칼에 그 목을 베었다.
주변에서 학살을 감행하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단숨에 달려왔으나, 사내는 곧장 숲속으로 도망쳤다.
불타는 숲은 가혹했으며, 추적자들이라고 한들 맨정신으로 쫓지는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마을은 불탔으며, 천화의 연구는 종잇조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산기슭에 위치한 연구동은 찾아내지 못했다.
퍽 비밀스러운 장소였고, 천화가 죽었으니 이제는 그만이 아는 장소였다.
사내는 통증에 신음하며, 가슴의 공허와 육체의 고통에 울부짖었다.
그리고, 복수를 맹세했다.
* * *
저주한다. 저주한다.
아니, 나약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저주?
그딴 머저리 같은 방법에 복수를 맡길쏘냐.
신은 뒈졌다.
아직 뒈지지 않았다면, 내가 목을 비틀어 죽여 버릴 것이다.
“천화…….”
찾아야 했다.
그녀의 연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천명을 비틀어 인간의 영혼을 다룰 수 있다면.
그녀 또한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천화의 시체가 없으니 그것은 불가능할까.
사내는 끝없이 생각했다.
방법이 있다면.
천륜을 거슬러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뿐이었다.
시간을 거스를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 증오스러운 황제의 목에 검 한 자루를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이 한목숨 전부 내버려도 상관없다고, 사내는 그리 결의했다.
천륜을 어긴 죄로 지옥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다고 해도, 그 또한 바라는 바이다.
그곳에는 반드시, 그 황제가 찾아올 테니까.
죽음의 뒤에도 영원히 놈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 * *
시간이 흘렀다.
사내는, 그녀가 남긴 연구를 토대로 여섯 번째 연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샛길.
사람의 길이 아닌, 피로 물든 수라의 길.
하늘에서 피어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여섯 번째 꽃이라.
육도(六度)의 홍련(紅蓮)이라 했다.
시간을 거슬렀다.
사내의 아집은 대단했고, 결국은 목표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 과거에 그녀는 없었다.
어째서일까.
황련 때문인가?
천화 또한 천륜을 어긴 일인이니, 그 벌을 받은 것일까?
사내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없으니 사내의 눈에는 하나만 비치게 되었을 뿐이었다.
복수가 허망하다고?
누가 그러던가.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대체 어떤 머저리가 그러던가?
복수가 허망하다는 말을 지껄이는 병신은 복수하지 못하는 무능자일 뿐이며,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경우는 그 복수가 충분치 못했을 때뿐이다.
복수의 새싹까지 전부 잘라 버린다면, 감히 그 누구 복수를 생각할까.
“죽인다. 반드시. 반드시……!”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수련을 쌓았다.
시간을 반복하며 강함을 쌓았다.
계절을 반복하며 깨달음을 쌓았다.
이윽고.
황제의 목에 그 검을 꽂아 넣고, 이윽고 그를 죽여 버렸다.
* * *
그러나 그 대가는 잔혹했다.
육련은, 언제나 그 대가가 있었다.
묵련의 대가는 수명이었다.
청련의 대가는 지성이었으며.
백련의 대가는 기억이었고.
녹련의 대가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황련의 대가는 영혼 그 자체였다.
그러나 황련은 대가를 남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 그 영혼을 불태움으로써 영생을 영위할 수 있었다.
…전부, 황제의 요구대로 그녀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황제는 말했다.
불필요한 인간들, 악인, 죽어 마땅한 이들─
그들을 ‘소비’하여 영원한 태평성대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그녀는 순진했고,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어떨까.
여섯 번째 연꽃은 그녀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온전한 우연의 산물이며, 목표는 ‘영생’이 아닌 ‘복수’.
자신이 찰나밖에 살지 못한다고 해도, 반드시 놈을 죽여 없애겠다는 하나뿐인 집념이었다.
그렇기에 대가 또한 가혹했다.
사내는 처음에는 그 대가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시간을 계속해서 반복할수록 그 대가를 체감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잊혀 갔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 세상에서 사라져 갔다.
하백이라는 사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없던 것이 되었으며, 분명 지난번까지만 해도 자신을 기억하던 옆집의 아이는 자신을 보고 수상한 사람이라며 경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반복할 때마다 그 현상은 심해져 갔고, 기어코 언젠가는─
그 누구도, 사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하지 못했다.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인사를 하더라도, 뒤를 돌아보면 그 존재를 잊어 순식간에 허상으로 사라졌다.
단순했다.
홍련의 대가는, 존재 그 자체였다.
* * *
사내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을 때, 그는 한 가지 선택을 했다.
‘놈은… 돌아올지도 모른다.’
황련은 온전한 불사의 비술이었다.
천화를 죽이고 그녀의 영혼을 앗아간 것이 황제라면, 그 근원까지 쥐고 있으니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자신은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사내는 결단했다.
‘그래. 교단을 만들자.’
천존(天尊)을 짓밟고 승불(昇佛)을 짓이길 강력한 힘의 집단을.
저 가증스러운 중원의 존재 전부를, 이 손으로 찢어 죽일 교단을.
그리고 언젠가, 저 황제라 칭하는 자가 환생의 때를 기다릴 그 날에─
하늘이 허락하여 자신을 땅으로 돌려보내는 날이 온다면, 복수의 칼날을 갈아낼 수 있는 장소를!
사내는 직접 준비하기로 했다.
사내는 스스로를 천마라 칭했다.
그리고 강함을 숭상하며, 죽어버린 마을 사람들 대신 주변의 민중을 모아 보호했다.
그들은 교단을 믿었으며,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갈구했다.
그들 중 가장 강한 여섯 개의 세력이 생겨났다.
사내는, 그들 중 다섯에게 그녀가 만들었던 이적의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
피로 물든 의지만큼은 자신의 것이기를 바랐기에, 마지막으로 남은 세력에게는 조금 다른 이름을 주었다.
시대가 지나고, 강산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이리 일컬었다.
천마신교(天魔神敎)라고.
강함을 숭상한다.
복수를 열망한다.
풍요를 갈망한다.
그들은 원초적인 것을 추구했다.
단순한 이유였다.
그들이, 단지 그것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콰득, 콰드득.
어둠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청유백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섯 개의 검은 혼연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쏟아부어 황제와 대결하고 있었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을 되돌렸군. 무의미한 짓이다.”
“안다.”
“뭔가 달라졌군. 기억을 보았나?”
“그래.”
청유백은 단답했다.
그 이상의 말을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싸움의, 어떤 시점인가.
곧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천화가 공포를 극복하고 몸이 풀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대화의 내용은 사뭇 달랐다.
“그렇군… 보았군. 전부 보았어. 허나 달라. 그대는 하백이 아니로군.”
“말 그대로다.”
“허어. 그렇다면… 말을 바꿀까.”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옥좌에 올라앉아, 청유백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자여, 나와 함께하자. 그대의 몸을 달라 말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적대할 이유가 없으니, 능히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삶, 영원한 권위. 그 반을 네게 주겠다.”
황제는 손을 내밀었다.
천하의 반을 주겠노라고, 그리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진심이었다.
청유백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고, 아랫사람으로 거둔다면 그 누구보다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허나, 청유백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거절하지.”
“허어, 어째서냐?”
황제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대는 하백이 아니다. 그는 이미 소멸했다. 존재하지 않아. 우자여, 그대는 그저 복수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의 기억을 지닌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다.”
“안다.”
청유백은 마기를 끌어올렸다.
네 자루의 검은 버렸다.
필요한 것은 단 한 자루.
저것을 찢어발기고 돌파할 수 있는 단 한 자루면 되었다.
황제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일갈했다.
“진실을, 과거를 알고서도 어찌 싸우는 것이냐! 너는 짐과 싸울 이유가 없다! 너는 하백이 아니야!!”
“그 또한 안다.”
“허면 어째서냐!!”
청유백은 웃었다.
황제가 분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청유백의 생각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마따나 청유백은 하백이 아니다.
그의 기억을 보았다고는 해도 결국 다른 정신으로, 다른 것을 배우며 자라온 청유백은 하백과는 판이하게 다른 타인일 뿐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청유백은 그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었다.
허면, 정의 때문일까?
저자는 명확한 악이어서.
명확하게 악취 나는 쓰레기 같은 자여서, 청유백이 정의감에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나는… 정의에 대해 왈가왈부할 정도로 바르고 올곧지 않다.”
더하여, 시대를 걱정하는 것 또한 아니다.
“왕도에 대하여 토의할 정도로 현명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존립에 대하여 이야기할 정도로 시대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타인의 복수를 대신해줄 정도의 자비로운 인간도 아니었다.
“네놈에게 복수할 사적인 감정도 없다. 나는 하백이 아니다.”
청유백은 그럼에도 검을 들었다.
칠흑의 검기가 진천검을 감쌌다.
천마를 상징하는 검과, 마교를 상징하는 검기가 한데 뭉쳐져 새벽녘의 달빛과 같이 빛났다.
“단 하나다. 아주 단순한 단 하나의 답이다.”
너무나도 단순해서.
그 입에 담는 것이 우스워질 만큼 단순한 답이었다.
“천하를 나눠 가질 수는 없지 않나? 황제를 참칭하는 자여.”
“……!!”
천마는 탐하는 자다.
풍요를 탐하고, 힘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여, 결국 그 정상에 다다른 자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고, 만들어지기를 그렇게 만들어진 자다.
그리고 나아가, 천하를 삼키리라고 스스로 다짐한 자다.
천하의 반?
하, 어찌 만족할 수 있으랴.
“하, 하, 하, 하하하하하하!!”
황제는 미친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당찮고, 한심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영생이 필요 없단 말이냐? 네놈은 반쪽짜리다. 네 몸에 깃든 천화는 구천을 떠도는 조각 중 하나일 뿐이야! 그녀의 혼이 있다 한들, 능력은 짐에게 있다!”
“필요 없다.”
청유백은 가벼이 단답했다.
그리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황제는 오히려 더욱 분개하여 소리쳤다.
“네 가치가 시간을 버티지 못하여 쇠락하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 언젠가 영락하고 노쇠하여 스러지는 것이 두렵지 않느냔 말이다!”
“반문하고 싶군.”
그것이 어찌 두렵지 않을까.
당연히 두려웠다.
노쇠하는 것이 두렵고, 죽는 것이 두렵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미 삶에 초연하거나 미친 광인뿐일 것이다.
그러나, 청유백의 눈빛은 여전히 반짝였다.
“목적도 없이 그저 영위하기만 할 뿐인 삶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청유백의 검이 번쩍였다.
섬전처럼 치달은 한 자루의 검이 황제에게로 쇄도했고, 황제는 황금빛 검기를 형성하여 그것을 막아내었다.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사람은 종착점을 지닌다. 과거의 망령이여.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고, 그것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삶이라는 것은 가치를 지닌다.”
그것이 삶이다.
목표를 이루고. 꿈을 좇고.
웃고, 떠들며.
설령 좌절하더라고, 다시 일어나 그것을 향해 달린다.
끝끝내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자의 뒷모습은 후인들에게 유의미한 학습을 일깨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
“허나 네놈의 가치는 뭐냐? 이미 죽어 스러졌을 몸을 이끌고 나와, 패악을 부리는 것 외에 네놈이 지니는 가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칠흑색 검기와 황금색 검기가 맞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격을 수십 번 주고받았으나, 두 사람의 실력은 비등했다.
이미 수십 번을 부딪쳤던 검격이었다.
쉽사리 기울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짐은 황제다! 군주다!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그러나, 여전히 힘은 황제가 더 강했다. 죽음을 흡수하고, 영혼을 흡수한 탓이었다.
“군주란 군림하는 자다!! 네놈 따위가, 짐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단 말이다!!”
황제는 격앙했다.
이미 한 번 시간을 되돌린 것을 아는 만큼, 몇 번이고 다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되돌려지는 시간은 수십 년이 아니다.
바로 지금이다.
휴식도, 안녕도 없다.
이 시간이 반복된다면, 그저 영겁의 세월 동안 전투만을 반복하게 되리라.
그것은 황제가 바라던 영생이 아니었다.
그의 영생은 풍족해야 했으며, 행복해야 했고, 언제나 쾌락으로 가득해야만 했다.
“아까 내게 왕에 대해, 군주에 대하여 논의할 자격이 있다고 했나?”
청유백은 뚜렷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이 시간은 영원히 흘러갈 테니,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소멸할 때까지 그 이야기나 진창 나누어 볼까.”
청유백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다시금, 칠흑과 황금의 검기가 폭발을 일으켰다.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황제는 청유백보다 강하지만, 시간은 무한히 반복된다.
청유백의 영혼이 다하거나, 황제의 의지가 다할 때까지.
그리고 그것이 끝날 때, 시대의 천하를 거머쥘 자가 이 자리에 서 있으리라.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