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삶의 이유(4)
천화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이 순간 분노는 이미 공포를 덧씌웠으며, 돌이킬 수 없는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청유백은 온몸에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천화의 공포로 몸이 굳었듯이, 이번에는 분노로 인한 힘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천화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놈은… 네놈은 악인이다. 위선자라 칭할 가치조차 없다!”
“흐음, 그건 흥미로운 말이군.”
“뭐라?!”
“그건 짐이 정하는 것이야. 아무리 그대라 한들 가려 말해야 할 걸세. 선악을 정하는 것은 마땅히 짐의 일이거늘, 어찌 그대가 논한단 말인가?”
“이… 미친 새끼가……!!”
“후후, 그 욕조차도 그리웠어. 아아, 그날 밤의… 그대가 내게 속삭이던… 그래…….”
그는 고개를 숙여 신음했다.
“…저주를.”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잠시 후에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럴싸한 계획이 생각이 났다네. 흐음, 흐음, 좋아……. 우선 진(秦)을 다시 세우고… 짐의 첫 황후에 그대를 봉해 주지. 그것으로 어떻겠는가?”
“어떻기는, 뭘 어떻단 말이냐!”
“평생 짐과 함께하자는 말이지. 영원히!”
“뒈져 버려라…!!”
“격한 부정은 격한 긍정이라는 말이──”
─콰앙!
청유백이 그의 말을 끊으며 황금빛 기운과 맞부딪쳤다.
강력한 힘은 이제는 그 기운을 반쯤 뚫고 들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전부 관통하기에는 모자랐다.
그는 눈을 두어 번 끔뻑이더니, 청유백과 눈을 마주하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미안하네. 우자여. 그대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는가?”
“관심 없다.”
“무얼, 임금의 권주를 마시는 것 또한 신하의 의무 아니겠나. 지금 진실을 말해 줄 터이니, 곱씹은 뒤 반성해 보시게나.”
─파앗!
그는 다시금 청유백의 검을 비껴내어 몇 계단 아래로 밀려나게 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태도로 옥좌에 기대어 놓았던 유서온의 시체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 현대의 옥좌도 썩 나쁘진 않군.”
그 태도는 마치, ‘한 번 예의 차려 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는 청유백을 내려다보며, 황금빛 기를 조작하여 허공에 한 가지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거대하게 허공을 수놓는 그 문자는 단 하나.
진(秦).
청유백이 모를 리가 없는 문자였다.
문자라는 것은 본디 여러 의미를 내포하거나 다른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저 진이라는 문자는 오직 하나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문자였다.
나라 이름의 표기.
그리고 저 표기를 사용하던 나라는, 천오백 년 전에나 존재했던 고대의 국가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감히 건방지게도, 짐의 후대에 황제를 참칭한 역적이 있는 모양이야. 후대는 짐을 이리 부르더군.”
어쩌면 너무나도 오만한 말이었다.
후대가 황제를 참칭하다니.
자신의 앞에는 황제가 없었다는 말과도 같지 않던가.
허나─ 천하에 인간으로 나서 저 말을 맨정신으로 입에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오직 단 하나가 존재할 것이었다.
그리고 청유백에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황제(始皇帝)라고, 말일세.”
중원을 통일한 최초의 왕.
가장 처음의 황제.
통일 왕국 진나라의 황제를 사람들은 그리 일컫고는 했다.
허나 청유백은 조금의 반응도 없이 검으로 그 황금의 문자를 쪼개었다.
전혀 알 바 아니라는 투였다.
“……놀라지 않는군?”
“놀라야 할 이유가 있나? 과거의 망령 따위일 뿐인데.”
“과거의 망령이라. 우자여. 인간은 무릇 과거로부터 배운다. 배움으로서 학습하며, 학습으로써 미래로 나아간다. 그대는 학습하지 않는가?”
“어리석은 망령에게 배울 것은 없다. 필요한 것은 반면의 교훈뿐이지. 과거로부터 배울지는 모르나, 인간은 결국 더 나은 것을 받아들이며 발전한다.”
“더 나은 것! 그래, 멋진 말이로다. 허면 그대는 어찌하여 짐을 이리도 배척하는가?”
“……무슨 의미지?”
“당연하고도 또 무의미한 질문이로다. 그야 짐이 통치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완벽한 통치자의 독재. 훌륭한 이상향 아닌가?”
“끔찍하군.”
“끔찍하지 않다.”
시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썩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아직 진노하지는 않았다.
멍청하다면 멍청한 대로.
나름의 훈계가 필요한 인간이 있는 법이노라고, 그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유백은 받아줄 생각이 없었고, 다시금 검을 고쳐잡아 자세를 취했다.
시황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허나 우자여, 그대 또한 짐과 같지 않은가. 그대는 짐과 군주와 왕의 길에 대하여 거론할 자격이 있다. 그대는 짐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용자다.”
“네놈과 내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 천 년의 망집은 이제 끝맺을 때가 되었다.”
“뭐라……?”
그는, 시황제는 진심으로 당황하여 주춤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이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몇 가지 생각해 보더니 믿을 수 없다며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눈빛을 나누었다.
그리고 점차. 시황제의 표정이 천천히 경직되어 갔다.
“……하! 하하하! 그래, 그런 거였나! 그대는 정말… 멍청하군. 너무도 어리석어! 우자라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야. 하하하하!!”
시황제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그야말로 광소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을 웃음이었다.
청유백은 그의 바로 앞에서 황금빛 기운을 뚫어내려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시황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웃었다.
“오랜 역사에 이미 자아를 잃었는가? 이미 되찾을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은가? 하하하하! 이런, 우습구나. 우스워! 짐의 평생 이만큼 웃는 일은 처음 있는 것 같구나! 하하하!”
그리고는, 청유백을 향해 삿대질하며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놈은 멍청이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을 위해 짐과 대적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멍청이!”
“기억한다. 네놈을 향한 증오가 한시라도 식었을 것 같은가!”
“그래? 허면 대답해 보거라. 우자여… 아니, 천류하! 너와 짐의 악연이 무엇에서부터 시작되었느냐?”
“당연히 백 년 전 아닌가!”
청유백은 분노하여 일갈했다.
당연한 질문, 당연한 대답이었다.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수십 번을 똑같은 삶을 살았다.
거의 억겁으로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헌데, 이제 와서 저딴 질문을 던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황제는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그래? 허면, 네놈은 어찌하여 이번 생에 짐을 쫓았느냐?”
‘무신’이 아니라, ‘사마신교’의 짐을 말이다.
시황제는 그렇게 말을 받았고, 청산유수같이 이어진 말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짐이 그대에게 무슨 피해를 주었느냐? 사마신교가 청가에 먼저 위해를 가했느냐? 짐의 기억에, 황련이 그런 짓을 지시한 기억은 없다.”
분명 그러했다.
사마신교는 녹가에 관여했지만, 그것은 녹가주의 개인적인 일.
청가와는 연관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사마신교는 마교주를 죽였을 뿐 청가에는 위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교주를 죽여 청가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럼 다른 이유겠느냐? 허울뿐인 교주의 위(位) 때문은 아닐 테다.”
공을 세워 교주 자리를 얻겠다?
멍청한 소리.
공보다는 결국은 실력이다.
청유백은 결국에는 무력으로 다른 이들을 굴복시킬 자신이 반드시 있었으니, 그것은 썩 그럴싸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허면, 복수냐? 우리가 너의 소중한 사람을 죽였느냐?”
시황제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짐은 짐작 가는 일이 없지만, 혹여 있다면 이 자리에서 짐이 사과하겠다. 감히 이 영정의 고개가 바닥을 보겠노라고, 한 번 말하겠다.”
두 번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만큼 확신하고 있었다.
유서온의 기억을 전부 보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청유백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아닐 테다. 네놈에게 그런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을쏘냐.”
“…….”
“생각해 보아라. 청유백. 너는 무엇을 위해 싸웠느냐? 돈이냐? 명예냐? 권력이냐?”
“…셋 다 아니다.”
“그래? 그럼 무엇 때문이냐?”
“당연히, 교주가 되기 위해─”
“교주가 되고 싶다. 그래, 그것까지는 좋다. 원초적인 본능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이미 취한 것을 잃었을 때, 되찾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생물이니 말이다.”
시황제는 눈을 반짝였다.
“허나 어떻지? 이번 생애에 짐을, 사마신교를 쫓는 것은 대관절 무엇 때문이더냐?”
“그건…….”
“짐은 무신이었다. 진서령이었으며, 한때 무림맹주이기도 했다. 허나─ 그것이 대관절 어떻단 말이냐?”
“어떻냐니, 그야…….”
“네놈은 그 사실을 방금 알았다. 허면, 그것을 알기 전의 네놈은?”
“…….”
“그것을 모르는 네놈은, 무엇 때문에 짐을 적대하였느냐?”
청유백은 연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옳은 말이었다.
동시에, 청유백의 머리 한쪽을 쾅 때리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러했다.
‘……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러한 질문에 대해, 합리화만을 반복했을 뿐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요했으니 찾았고, 필요했으니 죽였다.
효율적인 길을 찾아 달렸더니, 그 앞을 사마신교가 막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 앞에 ‘왜’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청유백은 굳이 사마신교를 이리도 집요하게 쫓을 필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천마의 위(位)는 가장 강한 자에게 돌아가는 법.
공을 세우든 말든 몇 년만 지나면 청유백은 다른 후계자들을 힘으로 찍어누를 자신이 있었다.
천마지회가 진행 중일 때라면 모르겠으나, 영약도 동나고 사마신교를 쫓기 시작할 때 즈음에는 구태여 목숨을 걸고 그들을 쳐 죽일 이유가 없었다.
시황제는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교주의 위를 원했느냐? 가지거라. 탐한 적 없나니. 재물을 원했느냐? 가져가라. 네 원은 족히 채울 만큼, 재보의 산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왕궁의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켜, 그쪽에 보물고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재보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그리 말했다.
“허나… 못 하겠지?”
시황제는 웃었다.
“이상타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
“이미 세상의 모든 호사를 누려 보았고, 세상의 모든 절경을 눈에 담았을 그대가, 어찌 새로운 삶에서까지 하잘것없는 권좌를 탐하는지.”
청유백은 멈춰 서서 미간을 짓눌렀다.
기억이 흐릿했다.
마치, 정말로 뭔가를 잊고 있었던 것처럼.
청유백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대에게 의지가 남아 있다면 내게 분노했을 것이다. 그대의 피에, 붉은 연꽃에 기력이 남아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대를 두려워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없구나!”
“대체 무슨 소리를…….”
“여섯 번째 연꽃은 영원히 저버렸다. 이젠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시황제는 제멋대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육련의 마지막이 화려히 저버렸으니, 이제 짐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겠느냐!”
시황제는 광소(狂笑)했다.
사마신교의 연꽃은 분명 여섯이 있었다.
그 마지막 자리는 물론 ‘그분’ 즉 시황제의 자리였음이 분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원주인은 따로 있었다.
여섯 번째 연꽃.
붉은 피로 물든 연꽃의 주인.
육도의 홍련.
그러나 청유백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시황제는 그 사실을 진실로 기뻐했다.
“그대는 꼭두각시다! 어리석다는 말조차 아깝구나!”
황금빛의 연꽃이 순간 밝게 빛나 방을 가득 메웠고, 다음 순간 그것은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시황제의 손안에서 말이다.
“죽음을 받아들여라. 짐이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마. 이 짐이, 직접 자유를 하사해 주마!”
“어딜……!!”
천화는 녹색 기운을 일으켜 시황제를 막으려 해 보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는 온전했고, 이미 수 명을 죽여 얻은 힘이 있었다.
황금의 칼은 청유백의 검을 마치 허상처럼 관통하여, 그의 심장을 찔러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