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삶의 이유(2)
후산은 허공을 마치 땅바닥처럼 짓밟고 뛰어올랐다.
두 번, 세 번을 연속해서 허공을 박차도 전혀 지치는 기색 없이 청유백을 압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것은 죽기 전 타오르는 마지막 불꽃.
능력 없는 자는 불태울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빛나는 별의 마지막 발악이었으니까.
청유백은 검을 교차하여 후산의 공격을 받아쳤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란 말인가? 저 아이를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이?”
산 제물.
그 단어에 후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기실, 저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청유백이 아는 바는 없다.
그저 되는 대로 지껄일 뿐이었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후산은 격앙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요, 명예올시다. 그녀도… 나도! 죽음 정도는 각오한 지 오래란 말이오!”
“멍청하고 미련하군.”
“우리 둘의 죽음으로 마을 전체가 풍요를 영위할 수 있다면 꽤 비싸게 팔리는 법 아니겠소.”
“……꼴같잖은 희생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겠소. 우리는 의무를 품고 태어났고, 그에 답해야 하오. 언제든.”
청유백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충은 상황을 이해했다.
저 ‘거래’라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물어볼 정도로, 청유백은 몰상식한 인간이 아니었다.
도리어─ 꿈에서 보았던 천화의 이야기와 어딘가 닮아 있어, 한편으로는 동정심까지 일고 있었다.
후산의 검이 허공을 갈라 청유백에게 쇄도했다.
검을 단순히 날려 보내는 것은 일거에 튕겨낼 뿐이었고, 급소를 노리고 찔러 들어가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들어올 뿐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바라는 것일까.
죽음을 각오한 자와 죽음을 피해야만 하는 자의 결투는 단연 전자가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청유백이 후산의 목을 노릴 때 즈음이면 이미 후산의 칼날도 청유백의 목젖에 닿아 있었고, 청유백은 검의 궤도를 돌려 그것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사요. 저 여인이 말했던 철학 따위 나는 모르오. 배울 겨를도 없었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소.”
그것은 생각하는 자의 역할이니.
후산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져 갔으나, 그의 박도는 단 한순간도 멈춰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알고 있는 것 또한 있소. 의무는 가슴에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를 지키는 일.”
후산이 허공과 기둥을 박차며 궤도를 틀었고, 그대로 공중에서 날아들었다.
청유백의 검이 사방에서 찔러 들었지만, 후산의 돌파가 더 빨랐다.
─촤악!
후산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었고, 그는 그대로 청유백에게 찔러 들어왔다.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
죽음이라면, 오히려 바라는 바이다.
목표는 오직 하나.
함께 죽는다.
─카아앙!!
화려하고 찬연한 불빛이 튀었다.
청유백의 손에 들린 흑색의 진천검과, 새하얗게 불태운 후산의 박도.
흑과 백의 화염이 한데 뒤섞여 불똥을 튀겨댔고, 서로의 코등이를 맞대며 힘을 겨루었다.
“내게는 그것이면 족하오.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 나를 숨 쉬게 하오. 나는, 그녀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사오.”
후산은 이 순간 자신의 과거를 돌이켰다.
태어나기를 칼을 품게끔 태어났다.
자라기를 칼을 안고서 자랐다.
남들이 괭이를 들 때 칼을 들었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논밭이 아니라 나무 그늘 밑에서 그 옆을 한가로이 지킬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말로만 듣던 주마등일까.
후산은 힐끗 뒤쪽을 돌아보았다.
황금의 연꽃은 아직 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형제여. 그대를… 막겠소!’
후산의 박도가 더욱 가속했다.
생명을 불태우는 그 연격은 그칠 줄을 몰랐고, 더욱이 신속했다.
쳐낼 수 없었다. 생명을 담은 그의 불꽃이 청유백의 검보다 간절했다.
비껴낼 수도 없었다.
비껴 치는 순간, 상상을 초월한 근력으로 궤도를 틀어 다른 급소를 찔러올 뿐이었다.
청유백은 다시금 바닥을 딛고, 다섯 개의 검을 전부 전개했다.
‘필요한 것은 시간.’
그리고, 부족한 것도 시간.
청유백과 후산,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
이 싸움에서 조금이나마 조건의 우위에 서 있는 것은 후산이었다.
청유백은 시간이 끌어질수록 다급해졌지만, 후산은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 될 뿐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검을 내리치고.
닿지 않으면, 죽을힘을 다해 내리치고.
그래도 닿지 않으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내리치고.
기어코 닿지 않으면, 그제야 미련 없이 떠나면 그뿐인 일.
어차피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능력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끌었다.
충분한 시간을 끌었다.
후산에게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나의 명예와 너의 명예는 다르다. 우리는 수평선을 달릴진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니, 결코 타협하는 미래는 오지 않을 터.”
“……분명히, 그럴, 테요.”
“허면, 답은 하나밖에 없는가.”
청유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헤아릴 겨를은 없었다.
후산은 그만큼 맹렬했다.
뒤 없이 날아드는 맹격은 청유백을 방어에만 급급하게 만들었고, 둘은 공간을 종횡무진하며 바닥과 기둥에 온갖 상흔을 입혔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느려졌다.
충분한…….
너무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청유백이 다시금 입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청유백은 소리 내어 비웃지 않았다.
제아무리 적이고, 제아무리 미련한 놈이라 한들.
명예를 위해 바치는 목숨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불꽃인 법임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은 부질없는 것.
명예란 어떤 경우에도 굽힐 수 없는 검이고, 둘이 부딪히면 하나는 반드시 부러진다.
그리고 동서고금 언제나, 명예란 승리자의 차지인 법이었다.
─푸욱!
청유백이 검이 쇄도했고, 후산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결과는 달랐다.
돌파하지 못했다.
후산은, 다섯 자루의 검에 심장과 목이 꿰뚫린 채 단숨에 숨을 거두었다.
전부 불태운 탓이었다.
선천진기를, 몸을, 근육을, 기력을.
마지막 터럭 하나까지 전부 끌어모아, 한 방울 땀까지 불태워 그 검격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청유백에게 닿았다.
─서억.
청유백의 앞섶이 갈라지고, 가슴팍이 옅게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분명히 심장에 닿았을 위치.
그러나 결국은 경험의 차이가 있었다.
그는 아직 젊었고, 생사를 건 사투를 몰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패배를 모른다는 것은, 그저 온전한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
목숨을 바친 생사결은 마지막 순간 그를 한 단계 위의 경지로 끌어올렸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청유백은 다섯 자루의 검을 동시에 뽑았고, 앞으로 천천히 쓰러지는 후산의 어께를 한 번 두들겼다.
“훌륭했다.”
그리고 저 위의 왕좌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일각?
아니, 어쩌면 그보다 조금 모자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 허공 위에 떠오른 황금빛 연꽃은 아직 꽃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유서온의 손 앞에, 그리고 시타의 머리 위에 떠오른 채로, 그 찬연한 광채를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유서온이 실성한 듯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청유백은 순간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로 막아서는 것도 없으니, 그저 마무리 짓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야 죽음이 두려워 영생을 얻고자 하니, 죽음의 앞에서 미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감사드립니다. 그를 죽여 주셔서.”
“……?”
“대가가 조금 모자랐습니다. 모래알처럼 모인 저 무인들을 죽여 충당하려 했으나, 어떤 범부의 소행으로 무산되었으니… 다른 무언가를 보태야만 했지요.”
유서온은 맑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후산의 이마에 황금색 연꽃의 문양이 피어났다.
그것에서부터 흘러나온 백색 기운은 아직 피어나지 않은 연꽃으로 스며들었다.
“저기 널브러진 오대 거파의 장로들. 그들은 퍽 훌륭했습니다. 질은 나쁘지만, 늙은 만큼 그 양은 경이롭기 그지없었지요.”
황금의 연꽃이 서서히 그 꽃잎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청유백은 기다리지 않았다.
곧장 계단을 박차고 올랐고─
“하지만 모자랐습니다.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 당신이 죽었다면 완벽했겠지만,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을까요.”
한 자루 칼은, 검은 섬광이 되어 그녀의 목 밑에 치달았다.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모든 게 완벽합니다…….”
“네년이 죽는다면?”
“그 또한, 상정한 바입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서온의 목이 반쯤 베어지는 순간에도.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신들 둘 중 하나로는 모자라던 차였거든요.”
─촤악!
선혈이 흘렀다.
옥좌가 피로 물들고, 쓰러진 몸에서 흐른 피가 천천히 계단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은 청유백은 순간 아차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미 찔러 들어간 검을 돌이키는 능력까지는 없었다.
“……무슨.”
[늦은… 게냐?]
그저, 이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을 지켜볼 뿐이었다.
유서온은 죽었다.
그러나 그 위에 피어난 황금빛 연꽃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몸에서 흘러드는 기운을 양분으로 삼아, 그 꽃잎을 조금씩 펼쳐 갔다.
황금의 광채가 찬란하게 피었다.
그 빛은 여명의 색.
찰나가 지나지 않아, 연꽃은 마치 때가 되었다는 듯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흘러나온 빛줄기는 마치 선녀의 깃털 옷처럼 요탕한 움직임을 보이며 시타의 이마로 흘러들어 갔다.
곧, 흘러들어 간 기운은 이마에 연꽃 문양을 새기며 그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청유백의 판단도 느리지는 않았다.
‘지금 목을 친다.’
청유백의 검이 움직이는 것과, 시타의 눈꺼풀이 조금 움츠리는 것.
그 두 행동이 일순간에 교차했다.
그러나.
─파앗!
청유백의 검은 시타의 목을 베지 못한 채, 도중에 멈추었다.
청유백의 실수는 아니었다.
그의 검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동정도, 연민도, 지금 이 순간에는 필요 없는 감정이었다.
악의도, 선의도 없이 그저 필요로 인해 죽여야만 하는 목숨을 아까워 할 정도로 청유백은 섬세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유백은 이 순간 시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설명이었다.
저것은 이미 시타가 아니었다.
청유백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위협, 위기, 경고, 분노, 갈증, 공포…….
수많은 위험 신호들이 머릿속을 울려댔다.
이유는 청유백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직 이렇다 할 무위를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 분위기는 청유백의 이성이 느끼기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청유백은 그것에 위압되어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마치─ 영혼에 새겨진 반응처럼.
“이런…….”
시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목 앞에 디밀어진 칼날을 천천히 손끝으로 밀어내며, 굳어 있는 청유백을 향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