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삶의 이유 (1)
뚜벅. 뚜벅.
청유백의 발소리가 공간 안에 고요하게 메아리쳤다.
그것은 거대한 대전(大殿)이었다.
그야말로 왕을 알현하기 위한 장소.
몇 개의 기둥이 나란히 세워져 떠받치고 있는 긴 복도의 끝에 계단이 보였다.
계단의 근처에는 말라비틀어져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시체가 다섯 개 널브러져 있었으며.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마교의 후예여.”
왕좌의 옆에 서서 청유백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그녀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분명 강하지 않다.
무인으로서는 삼류, 아니 어쩌면 그 이하.
그러나 청유백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청유백은 대전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네가 한 짓인가?”
“동정인가요? 혹은 분노?”
“그럴 리가.”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저들과 청유백 사이에 어떠한 종류의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황련.
그에 관한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의 문답으로 능력의 편린을 찾는다면 그야말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다만 그녀 또한 알고 있는 것인지, 황련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대답할 의무는 없지 않나요?”
“그도 그렇군.”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도 아니었으니, 포기는 빨랐다.
애초에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러 예까지 온 것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청유백은 천천히 대전의 복도를 걸었고, 문득 황련이 저 위에서 입을 열었다.
“동행하신 분도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
황련은 오로지 청유백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어딘가를 경계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그를 향한 시선.
정확히는─ 청유백의 안에 있는 천화를 향한 시선이었다.
청유백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천화는 녹색 기운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을 드러낸 그녀는 말마따나 몹시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량한 재주는 있는 모양이구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불초 소첩, 황련의 유서온…. 그분께서 안배하신 길을 걸을 뿐이온데.”
“그놈의 ‘그분’. 우습기 짝이 없군.”
청유백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수수께끼의 조각은 점점 맞춰지고 있었다.
육도홍련을 만든 것은 천화이며, 천화는 누군가와의 거래로 그 비술을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정황상─ 당연히 ‘그분’이 그 당사자일 것이라는 사실까지.
청유백은 코웃음치며 이죽거렸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칠 구멍을 찾는 나약한 자를 섬기는 꼴이라니.”
“그분을 안배하는 크나큰 영광을 목전에 두고…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시나요?”
“너희의 꼴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에는 힘과 의가 있을진저, 당신의 말에는 억압하는 힘은 있지만 의는 담겨 있지 않군요. 저희는… 저희의 신앙을 좇고 있는 겁니다.”
황련, 유서온은 덤덤하게 답했다.
“신앙. 그놈의 신앙.”
청유백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으나, 그녀는 말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어떤 신앙도, 그 어떤 긍지도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불멸의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이 긍지를 논하는가?”
청유백은 계단을 사분지 일쯤 걸어올라갔다.
청유백의 등 뒤에서 칼들이 펼쳐지며 원형을 그려 돌았다.
유서온이 대답하지 않자, 말을 받은 것은 천화였다.
“헛된 우상, 헛된 꿈. 영생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우매한 아이야. 네가 목전에 둔 것이 무엇인지 알아라. 그 너머에 있는 것은 그저 공허뿐일진저─”
그녀의 진홍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아직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눈앞의 여인을 배제하고 조각을 더욱 취한다면, 이제는 감춰진 진실에 대가갈 수 있을 것이었다.
허나─ 온전하지 않다고 한들, 정보의 편린만으로도 알 수 있는 진리가 있는 법.
“영생은 그저 허망한 한낮의 꿈일 뿐이니. 아이야. 너는 꿈을 꾸고 있구나.”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는 깨어 봐야 아는 것이지요. 무릇 불변하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데, 사람의 가치라 하여 어찌 다르겠습니까.”
“너는 영원을 얻는다면 사람의 가치가 불변하리라 믿느냐?”
“당연한 일입니다.”
유서온은 말을 이었다.
그 말에는 한 줌의 주저도, 부끄러움도 없었으며, 마치 불변하는 진리를 내뱉는 것처럼 담담했다.
그녀는 품에서 부채를 꺼내었다.
조각이 아닌, 온전한 모양의 부채.
…아니, 온전하지는 않았다.
그 형태는 부채의 모양을 띠고 있었으나, 그 조각이 모자라 다른 부채들보다 확연히 작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조각은 청유백에게 있으리라.
그것으로 손바닥을 내리친 유서온은 점차 걸어 올라가는 청유백과 눈을 맞추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영생을 얻는다면 영원한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천하 만물의 영장은 그 위치를 영원히 지킬 것이며, 사회의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영원히 노력할 수 있겠지요.”
“허, 네가 본녀를 가르치느냐? 내에게 너의 영혼이 보인다. 너는 사람을 죽여 네 손에 피를 묻혀 보았느냐? 무언가의 가치를 네 손으로 짓밟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로 돌려 버리는 죄악을 네가 아느냐? 사람의 가치가 불변할 것임을 어찌 네가 판단하느냐?”
“그분께서 저를 그리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스승을 섬겼구나. 인간의 가치가 무엇에서 비롯하여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라.”
느릿한 청유백이 발걸음이 마침내 계단의 절반에 다다랐다.
하지만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유서온은 물러설 기색 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정의와 저의 신앙은 이미 굳건할지언저, 다른 무엇도 이 마음에 균열을 내지…….”
“쫑알쫑알 시끄럽다.”
그러나, 청유백은 계속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발걸음 또한 멈추지 않았다.
“네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설득인가?”
“저는 그저 대화를…….”
“내 눈에는 위기 앞에서 꾀를 부리는 여우가 보이나, 그 노력이 가상하여 지금껏 들어 주었다. 하지만 무의미했던 모양이군.”
“우, 우리의 대화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대화 끝에는 분명 타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총명하고, 영민하다. 그러나 오만해. 네가 입에 담는 것은 설득도 아니요, 하물며 대화도 아니다. 단지 설교를 하고 있을 뿐.”
청유백은 점차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속도를 높였다.
검들은 스스로 빛을 내며 어둠을 밝혔고, 계단 꼭대기의 왕좌가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너의 뜻은 옳다. 그릇된 신앙이라 하나, 그렇게나 신앙을 피력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믿음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는 소리일 테지.”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아니.”
청유백은 코웃음 쳤다.
이해?
굳이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글쎄.
“시간을 끌고자 저항하는 발버둥은 즐거이 보았으니, 끝을 맺을 시간이 온 것뿐이지.”
정의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늘에 빛나는 별의 숫자만큼 사람이 있으며, 사람의 숫자만큼 정의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서로의 정의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저 포용하고, 받아들이고, 공존할 뿐이다.
포용하고 공존할 수 없다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힘으로서 강요하는 것이다.
청유백은 애초에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눈에 보이자마자 목을 친다.
목적은 오직 그뿐이었다.
귀엽게도 하찮은 논리를 설파하기에 조금의 유예를 주었을 뿐이었다.
‘한데, 저건…….’
문득 청유백의 눈에 왕좌가 비쳤다.
유서온이 서 있는 곳의 뒤편, 그야말로 황제에게나 어울릴 법한 옥좌가 있었다.
이런 변방에 있기에는 심히 부적절한─ 그런 물건이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그곳에 사람이 앉아 있는 듯 보였다.
미동도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정신을 잃은 상태.
‘뭐가 되었든, 중요한 것일 테지.’
그렇다면 단번에 둘의 목을 전부 베면 될 뿐이다.
청유백은 점차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이내 도약하여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의 목에 칼날이 닿을 것이 분명했음에도, 유서온은 무뚝뚝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카아앙!
그러나 칼날은 다른 무언가와 부딪혀 튕겨났다.
대신하여 칼날을 받아낸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
청유백은 계단 조금 아래로 물러선 순간, 어느새 청유백과 유서온의 사이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미안하오. 형제여.”
“……!!”
길지 않은 인연이었으나, 청유백은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과 그것에 담긴 의지는 청유백이 알던 사내와 너무나도 달랐다.
후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군.”
“동의하는 바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후산을 무시하며 청유백은 힐끗 저 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 위에 있는 건…….’
청유백의 시선은 그제야 어둠에 닿았다.
어둠이 드리워져 보이지 않았고, 유서온이 몸으로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었으나, 이곳. 계단을 올라온 위치에서는 그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 옥좌에는 시타가 있었다.
정신을 잃은 채로, 옥좌의 팔걸이에 얼굴을 기대어 있었다.
‘과연.’
청련과도 무언가 모종의 연이 있는 것 같더니, 결탁 관계였나.
청유백은 숨을 내쉬었다.
정을 내어주지 않은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생각하며 기도를 가다듬었다.
그것은 후산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우리는 거래했고, 나는 그것을 마무리 지어야만 하오. …마을을 위해.”
후산은 거대한 박도를 두 손으로 꼬나쥐고 청유백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후산의 뒤편에서 황금빛 꽃봉오리가 피어올랐다.
“시작하겠습니다.”
유서온이 시타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로, 그 손끝에서 이마로 황금색의 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
청유백의 본능이 그리 속삭였다.
‘시간을 끈 이유는 저것에 있었나.’
청유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날아올랐고, 후산이 공중에서 그를 맞았다.
청유백이 처음으로 날린 검 두 자루를 여유롭게 튕겨내더니, 그 거대한 박도의 기세로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나를… 넘어서야 할 거요!”
“멍청한 소릴.”
청유백은 검을 밟고 도약하여 후산의 검격을 피했다.
공중에 떠 있는 이상, 아무리 패도적인 공격이라도 다음 수는 없다.
한번 피해 내면 다음 공격까지 반드시 틈이 생기는 것이다.
청유백은 그리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허나─ 그곳에는.
“크흐아아아압!!”
“………!!”
허공을 밟고 도약하여, 청유백에게 두 번째 일격을 꽂아 넣는 후산이 있었다.
그 기세는 첫 번째 공격보다도 맹렬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청유백은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멍청한 놈. 일각도 되지 않아 죽을 파리 목숨이 되었군.”
“상관없소. 이게… 나의 의무요!!”
후산의 전신에서 백색의 기운이 치솟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맑고 정순한, 생명 그 자체의 기운.
그는 선천진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