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개전(開戰) (2)
움직이는 시체, 그리고 푸른 안광.
이미 익숙한 것이었기에, 청유백은 당황하지 않고 놈의 목을 끊었다.
쓰러진 시체에서 끊어진 목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고, 청유백의 발목을 붙잡은 손은 곧 힘을 잃고 스러졌다.
“대단한걸.”
“…….”
그리고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 문 앞에서 청련, 지거광이 손등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부채 조각을 들고, 한 손에서는 서서히 뻗어 나와 넘실거리는 푸른 실을 머금은 채.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청유백을 쏘아보고 있었다.
“백병전이라! 맞아. 언제나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칼부림이긴 하지. 연출은 화살이 더 멋질 것 같긴 했지만 말이야…….”
지거광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부채 조각을 휘둘렀다.
청유백의 주변에 꿰뚫린 채 널브러진 시체들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떨어진 부위는 푸른 실로 꿰매어져 다시금 붙어갔다.
목이 잘리거나 머리가 박살 난 시체들을 제외하면, 일어나는 것은 대략 삼십.
“그래도 조언을 받아들이는 게 훌륭한 각본가의 모습 아니겠어?”
그것들은 일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나, 청유백의 주위를 포위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위‘하려’ 했다.
청유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아직 채 일어나지 못한 괴이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 세 자루가 허공을 날아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못한 괴이들을 썰어댔다.
그것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괴이들은 특별히 방어의 수단을 지닌 것도 아니었으며, 자세를 잡고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력하게 땅을 짚고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고, 무방비한 목을 치고 지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여긴 숲도 아니거니와… 시야를 방해할 엄폐물도 없다.”
청유백은 깊게 숨을 내쉬어 기도를 가다듬었다.
지난번보다 숫자도 적고, 괴이들의 질도 저열했다.
게다가, 쓰러져 있는 시체를 이제 막 일으키는 과정이라니.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기다려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푸욱!
청유백은 아직 일어나려 발버둥 치는 마지막 괴이의 목에 검을 내리꽂고는, 지거광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일어나려 하는 괴이는 없었다.
지거광의 손짓도 멈추어 있었고, 청유백의 검들도 바닥에 내려앉아 명령을 기다렸다.
서로 아무 행동 없이 그저 기 싸움을 하는 듯 보였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섬전처럼 스쳐 가고 있었다.
청유백이 가장 먼저 주의한 것은,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의 숫자였다.
‘…멀쩡한데도 일어나지 않는 시체들이 있다. 한 번에 일으킬 수 있는 숫자에 제한이 있는 건가?’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었다.
청유백은, 고작 반 시진 전 천화가 자신에게 일러 주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묵련에 대한 이야기를 한 직후의 말이었다.
[청련은… 본녀도 확신할 수 없느니라. 기억은 온전히 돌아왔으나, 본녀가 만들었던 것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괴리가 있구나.]
‘처음에는 어땠는데?’
[그 괴이 하나하나의 모습이 바로 본녀가 만든 ‘청련’이었느니라. 완벽한 실패작이었지. 시체를 일으켜 움직일 수는 있으나, 이성을 잃어버리는…….]
‘도움이 안 되는군.’
묵련하고는 싸우지 말라.
청련은 뭔지 알 수가 없다.
청유백은 그때 혀를 한 번 차고 넘기려 했지만, 천화는 구태여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하지만 청련은 결국 실패작이다. 절대적인 불사는 이룰 수 없어. 결국은, 죽이다 보면 죽는다는 소리니라.]
‘……그리고 그게 놈이 도망친 이유일 테고.’
[바로 그렇다.]
“…….”
꽈득.
청유백은 기억을 한 번 돌이킨 뒤, 검을 이를 악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어찌 되었든, 배제해야 하는 적.’
벨 수 있는 적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손이 멈춘 지거광과 시선을 나누던 청유백은 숨을 고르며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서서 관망해 주기를 바랐나? 무시에도 정도가 있을 텐데.”
“무시라니. 그냥… 도입부라고.”
“그래? 절정에서는 부디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지,”
서로가 서로의 수를 탐색하는 과정이었다.
상대를 어지간히도 깔보지 않은 이상, 비장의 한 수가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리고 먼저 움직인 것은, 지거광이었다.
“걱정 말라고.”
지거광은 부채 조각을 크게 휘저어 허공에 푸른 호선을 그렸다.
부채에서 뻗어 나온 푸른 빛의 실은 그물처럼 얽혔고, 그 전부가 하늘을 메웠다.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빠르지는 않았다.
적에게 맞으리라 생각하고 펼친 것이라면, 그야말로 우습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청유백은 제자리에서 검 두 개를 움직여 하나는 그물을, 하나는 지거광을 향해 쏘아 보냈다.
“……!!”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났다.
하나는 베어냈고, 하나는 베어내지 못했다.
지거광의 목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하늘을 메운 그물은 베어도 곧 다른 실들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그물을 짜내었다.
“츳.”
청유백은 일단 물러서야만 했다.
저 그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신속하게 몇 번을 더 베어내도 곧장 새로운 그물이 얽혀질 뿐이었으니.
그리고, 방금 베어낸 지거광의 목을 힐끗 돌아보았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놈은 죽지 않았다.
목에서 뻗어 나온 푸른 실이 머리를 향해 슬금슬금 기어갔고, 기어코 그것을 집어 자신의 목 위에 다시금 얹고야 말았다.
[한 번 해 보지 않았느냐?]
“혹시 모르잖아.”
하지만 역시 의미는 없는 모양이다.
‘저놈 혼자 약점이 다른 건가?’
가령 심장이라던가.
청유백이 문득 든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려던 찰나, 마침내 하늘에서 내려앉던 그물이 땅을 덮었다.
청유백은 뒤로 물러섰기에 맞지 않았지만, 지거광과 청유백의 사이에 있던 시체와 괴이들은 그것에 뒤덮여 마치 푸른빛 무덤이 생긴 듯 보였다.
일견 보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함정인가?’
[그건 아닐 게다. 저 실 자체에 공격적인 능력은 존재하지 않아. 최소한, 본녀가 만든 것은 그러했다.]
방심할 수는 없지만, 청유백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설령 저 그물을 밟으면 순식간에 묶여 버린다거나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밟지 않으면 그만이다.
너무도 눈에 띄었고, 애초에 검을 날려 공격하는 청유백에게는 무의미한 함정이었다.
그리고, 그러던 다음 순간.
“……!!”
청유백은 그 그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하게 되었다.
─그그그극…!
그물은 바닥을 긁어내듯 수축하여 괴이들을 하나로 모았고, 그것은 둥근 형태가 되어 마치 정말로 시체로 무덤을 쌓은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지거광의 근처로 다가가 다른 형태를 취했다.
그것은 지거광의 몸을 타고 올라 감쌌고, 점차 하나의 형태를 띠어 갔다.
그리고 곧─
형태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창백한 괴물이 되어 일어났다.
“자, 절정이다. 어때, 만족스러울 것 같나?”
그것은 부러진 뼈와 손으로 이루어진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몇 개고 박힌 몸과 머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혐오감이 들게 만들었다.
괴물.
그것을 달리 무엇이라 칭할 수 있을까.
청유백조차도 한순간 헛숨을 들이쉬며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당연했다.
저주받을 저것의 형태는, 자연에서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원혼이 울부짖는구나. 세상에. 지성 없는 이조차 고통을 호소할 정도란 말이냐?]
천화는 그리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이의 감정마저 일었다.
맹세컨대, 그녀에게는 결코 저러한 괴물을 만든 과거가 없었다.
기억을 잊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저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만들었더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청련’이 저런 형태를 띠는 것은, 온전히 후대의 연구이고 발전일 것이었다.
……물론, 저것을 ‘발전’이라고 이를 수 있다면 말이다.
[피해라!]
천화의 말과 동시에, 청유백이 도약한 자리의 돌바닥이 산산조각 나 산개했다.
그것의 주먹이 내리꽂힌 자리에는 아주 모래알이 되어 후두둑 떨어지는 돌가루들이 언뜻 보이고 있었다.
청유백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혹시 불사의 연구라는 게… 적을 죽여서 내가 죽을 일이 없게 만드는 뭐 그런 종류였나?’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청유백이 천화에게 이죽거릴 새도 없이, 지거광의 주먹은 다시금 청유백을 향해 쇄도했다.
이번에는, 그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어디 볼까.”
청유백은 두 자루 검을 날려 보내어 날아드는 괴물의 주먹을 측면에서 받아쳤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곧, 날아들던 주먹은 허공에서 무력하게 떨어져 내렸다.
─쿠웅!
잘린 팔은 굉음을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고, 검은 그대로 괴물의 목과 팔을 난도질하며 날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것은 지거광이 아닌 청유백이었다.
─콰아아앙!!
주먹이 없다면 뭐 어떻단 말인가.
괴물은, 그렇게 말하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청유백을 내려찍었다.
팔이 통째로 잘려나가도 괴물의 질량은 그 자체로 흉악한 무기였다.
주먹이고 나발이고, 저 거대한 몸체로 한 번 내려찍기만 해도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 이상 그대로 압사당할 것이 분명했다.
청유백은 간발의 차로 놈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지거광은 그런 모습을 비웃으며 떨어진 팔을 향해 걸어갔다.
“큭큭큭. 어때, 만족스럽나? 많이 준비했다고.”
팔이 거의 몸통만 한 크기여서, 차마 한 팔로 주워 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녹아내려 흡수되듯 괴물의 몸통을 뒤덮더니, 다음 순간 아무 일 없었다는 양팔이 되어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 그래. 만족스럽군. 훌륭하기 그지없어.”
청유백은 당장 마기를 전부 끌어올리기보다는, 차분하게 진정시켜 검들을 주변에 띄웠다.
어차피 베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저 베어도 베어도 또다시 재생된다는 사실 뿐.
청유백은 검을 쥐어 자세를 잡았다.
“그래.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지? 더 해 보자고. 절정은 말이야, 모름지기 강렬해야 하거든. 포기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콰아앙!
언뜻 보기에 무식한 공격이었다.
지거광은 그 거대한 몸뚱어리를 이용하여 그저 계속 내려찍을 뿐이었고, 청유백은 그것을 피하고 공격하기의 반복이었다.
미련하고 둔한, 오히려 비효율적인 방법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청유백이었다.
놈에게는 피해가 쌓이지 않으니, 피로가 쌓이는 것은 청유백 뿐이다.
게다가 지거광이 지키는 입장이니, 청유백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부 갈아 버릴까? 한 번에 쓸어서 재생을 못 할 정도로 분쇄해 버리면…….’
그대로 소멸할까?
지금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오직 그것뿐이었다.
계속 도망치면서 팔이니 다리니 하는 것들을 썰어도 놈은 계속 재생했다.
어디를 찌르고 베어도 재생하니, 저 안쪽에 놈을 죽일 수 있는 핵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러다, 찰나의 순간.
─덜그럭.
청유백이 도약하여 내려앉은 바닥의 돌이 무너져, 한순간 균형이 흐트러졌다.
“……!!”
“하하! 발밑은 언제나 조심해야지!!”
지거광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멍청한 반복이 아니라, 정확하게 청유백을 노린 일격.
청유백은 순간, 전신에서 마기를 끌어올렸다.
‘피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그리고 네 자루의 검을 동시에 휘둘러, 지거광의 팔과 몸을 동시에 분쇄했다.
자신과 부딪칠만한 면적을 자르고 쪼개어, 공격이 무로 돌아가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