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87화 (187/200)

제187화. 첫 번째 꾀 (2)

청유백 주변에 서 있던 적은 이미 전부 죽어 바닥으로 떨어졌고, 지금 가장 가까운 적도 열 발짝은 떨어져 있는 지금.

청유백은 팔을 교차하며 한 번의 큰 공격을 준비했다.

“…….”

마기가 압축한다.

그것은 공전하는 검에 흘러 들어가, 주변의 대기를 떨게 만들었다.

열 발짝.

결코 먼 거리는 아니다.

일류 무사 사이의 거리라면, 호흡 한 번을 채 내쉬기도 전에 좁힐 수 있는 거리다.

적들에게도 짧은 간격이었고, 청유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단 하나.

그마저도 좁힐 필요가 있느냐─

혹은 없느냐.

그 단 한 가지였다.

검이 하늘을 수놓으며 춤췄다.

경천동지.

지금의 공격이, 그런 단어에는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어 필요하겠는가?

사람의 몸은 바위처럼 단단하지 않으며, 바위을 가르는 힘의 만분의 일만 있어도 사람은 능히 죽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위력이 아닌 속도.

“……하!”

청유백은 허공을 찢어발기듯, 교차한 두 팔을 가로질러 내리그었다.

세 자루 검이 소용돌이치듯 청유백의 주변을 돌았다.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지라, 그것을 알아차린 이도, 알아차리지 못한 이도 있었다.

“저기 있다! 잡아라!!”

“…잠깐…! 물러서!”

그들 각자는 알아차린 것에 따라 최선의 반응을 취했지만, 결국 그들 사이를 가르는 차이점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뭐에 죽었는지 알고 뒈졌거나.

모르고 뒈졌거나.

그저 그뿐이었다.

검이 춤추었다.

열 발짝 너머, 이제 막 지붕에 올라서 청유백을 향해 달려들려 하던 적들의 목을 베며 스쳐 지나갔다.

찰나, 짙은 피 보라가 일었다.

검들이 그리는 호선의 크기는 점점 커져갔다.

용오름이 바람을 끌어들여 그 몸집을 불리듯이, 칼날의 바람은 형태를 지닌 폭풍을 만들었다.

주인 잃은 검극은 그 폭풍에 휘말려 함께 그 간극을 메꾸었고, 점점 넓어지는 폭풍은 근처 지붕 위에 있는 모든 무인들을 찢어발기고도 남았다.

차라리 일 대 일, 충분한 방비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그들 전부 모종의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거진 모두에게 이루어진 기습이었다.

이제 막 지붕 위로 올라와 주변을 살피는데, 갑작스럽게 사각에서 날아드는 칼날.

혹은, 지붕 위로 머리를 들이밀자마자 눈 옆에서 솟구치는 폭풍.

땅을 딛고 있지도 않은 인간이 그것에 어찌 반응할 수 있겠는가.

─고오오오…….

찰나가 지나고, 지붕 위에서 청유백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은 없었다.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기세는 여전히 엄청났지만, 당장 위에서 시체와 핏방울이 떨어지는 와중에 먼저 고개를 들이밀고 싶어 하는 인간은 당연히 없을 테다.

“…….”

청유백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끌어올린 마기를 갈무리하며, 세 자루의 검을 자신의 주변으로 둘러보았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조심스러워하며 몸을 사리는 것도 정말 잠시일 것이고, 미친 척하면서 먼저 올라오는 놈이 곧 생길 것이었다.

‘천화, 아직이냐?’

청유백은 골목 아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천화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골목에는 사람 하나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골목 전체에 진법이 펼쳐져 있는 듯 보였다.

[거의 다 됐느니라. 이쪽으로 와 있거라.]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붕 끄트머리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마기를 안정시켜감에 따라, 순간의 탈력감이 극심하게 찾아왔다.

본디 천천히 해야 할 과정이지만, 빨리 기척을 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쿨럭.

청유백의 다리가 순간 휘청였고, 입가에는 피 한 줄기가 흘렀다.

‘…무리했나.’

반동이 오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청명휘와 싸운 뒤부터 만신창이인 몸이었고, 조금 쉬었다고 한들 완벽하게 회복된 몸이 아니니 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충분한 휴식이었다.

청유백은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전신의 기맥을 내달리는 무력감의 크기가 생각보다도 거대했다.

마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강제로 수마를 향해 끌어들이는 것만 같은 감각이 몸을 지배했다.

[…다 됐구나. 오너라!]

“……그래.”

청유백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며 천화가 만들어낸 진법의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다음부터의 기억은 모호했다.

안개가 자욱이 낀 골목 사이로 하나의 문이 보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상황도, 주변의 파악도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케도 살아 들어왔군요. 기대하던 인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병적일 정도로 흰옷을 집착하여 차려입은 사내였다.

백소하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얼굴에는 백분을 바르고 신발까지도 허연 거죽을 사용하여 만든, 그런 사내.

청유백은 그를 향해 눈알을 굴리며 가까스로 입술을 떼었다.

“…조금만 쉬겠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시간은 제가 벌어 드릴 테니.”

청유백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 *

‘……여긴.’

시야가 흐릿했다.

다시 한번, 밝으면서도 오묘한 그 공간에 있다는 것을 청유백은 스스로 알아차렸다.

꿈.

그러나, 자신의 것은 아닌 꿈.

‘탈력감은 이것 때문이었나?’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꿈을 보여주려고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은 우연일 수 있었겠지만, 두 번째는 분명히 변명할 여지 없는 필연.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은 쉬이 직감할 수 있었다.

꿈이 아니라 마치…….

‘…기억.’

그래, 기억.

잊혀진 기억. 누군가의 기억.

그리고, 누군가 ‘청유백’이라는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기억.

청유백은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몹시 드물게도, 근거는 없었다.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저 그럴 것 같다는 비논리적인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나답지 않군.’

청유백은 자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것도 꿈속이라서 생기는 근거 없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후우…….”

청유백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생소한 건물들, 그러나 한 번은 보았던 건물들이었다.

‘이것이 누구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의, 어떤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럼에도, 청유백은 이 꿈이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무의미한 것은 아닐 테지.’

평범하게, 의미 없이 시작하여 의미 없이 끝나는.

그런 종류의, 꿈속 나라 이야기는 결코 아닐 테다.

청유백은 집중하여 주변을 꿰뚫어 보았다.

흐릿하던 풍경은 점점 뚜렷해지고, 알 수 없던 인간의 그림자는 점점 형태를 찾아갔다.

더욱 정확한 모습을 보고자 의식을 다듬으면, 꿈은 정확하게 기대에 보답했다.

청유백의 몸은 자연스럽게 건물 중 하나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지난번과 같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감각.

처음에는 불쾌한 그것이었지만, 두 번째가 오니 이제는 오히려 불쾌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커졌다.

“왔느냐?”

방의 문을 열자, 처녀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연령의 여인이 고개를 돌려 청유백을 맞이했다.

‘그래, 지난번에는 여기서 끊어졌던가.’

청유백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꿈, 마지막 장면에서 저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더랬다.

‘지난번에는 조금 더 어린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청유백은 여인과 눈빛을 마주했고, 그제야 자신의 눈높이도 지난번보다는 조금 높아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난번 꿈보다 못해도 십 년은 흐른 것 같군.’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한들, 청유백은 눈앞의 여인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십 년이 아니라 삼십 년, 오십 년이 흘렀다고 해도 분명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리 확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근거는 없었다.

‘……천화.’

청유백은 자신을 돌아보며 다가오는 천화를 보며 침음을 삼켰다.

지난번에는 스쳐 지나갔던지라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천화의 기억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장소는 천 년은 전의 과거라는 것이다.

성숙한 미녀로 성장한 천화는 맑게 웃으며 청유백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서 한번 보거라! 드디어 성공하고 만 것이니라.”

평소에 쓰는 천화의 말투와 비슷했지만, 조금 어색한 면이 있었다.

하기사, 고작 이십 대의 처녀가 늙은 노인 말투를 쓰는 시점에서 많이 이상하기는 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조에서 조금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 묻어나고 있었다.

청유백은 천화의 손에 이끌려 따라 들어가다,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퍽 드물게도, 청유백의 생각과 몸의 반응이 일치했다.

“그 할머니 같은 말투 좀 때려치우면 안 돼? 적응이 안 되네.”

“……할머니가 아니라 위엄 있는 거야. 평소에 안 하면 나중에 실수한단 말이야. 지난번에도 스승님께 혼났다고.”

“나랑 있을 때만이라도 선처해봐. 소름이 돋아서 말이 안 나오네.”

“노력은 해 볼게. 아니… 생각해 보면 말이야, 네가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아? 난 신녀고, 너는 호위 무사라고.”

“시끄러워.”

“이익…….”

위엄이 다 나가 죽었나…….

그런데 멀쩡히 말할 줄 아네.

‘어릴 적이라 그런가. 아니, 뭐면 어때.’

청유백은 하잘것없는 생각을 그만두고, 천화에게 이끌리는 팔에 힘을 빼며 그녀의 옆에 섰다.

천화는 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튼, 봐봐! 드디어 성공했다고. 어때?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천화는 드디어 ‘성공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을?

청유백은 순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 눈높이보다 조금 아래에 놓인 목관의 내용물을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시체, 아니. 살아 있나.’

그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온몸의 털과 피부가 전부 하얗게 새어버린,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의 육신이었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청유백은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청유백의 몸은 자연스럽게 대꾸하여 물었다.

“이게 몇 번째지?”

“세 번째. 이름도 지어줬어. 이번에는 하얗게 변하더라고. 얘는 백련(白蓮)이야!”

백련.

그렇다면, 교아를 만들었던 천 년 전의 기술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청유백은 그제야 자신이 보고 있는 과거가 무엇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청유백은 지금, 육련에 얽힌 기억들을 보고 있었다.

부채 조각들에 담겨 있던, 천화의 기억의 조각들일 테다.

“일어나는 건 확실해? 지난번에는 그냥 우워어거리는 시체였잖아. 피부도 파랬고.”

“그때랑 달라. 심장이 뛴다고, 심장이! 왜인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버리고 있기는 한데……. 뭐, 큰 문제 있겠어?”

“흐음.”

“곧 일어날 거야. 기다려 보자구!”

“그것 때문에 부른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안 될 것까지야.”

청유백의 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물의 심상이 전해져 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은 귀찮으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어딘가 기뻐하는… 미묘한 감정.

청유백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었다만, 어차피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목관에 누운 백련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봐, 봤어? 봤지?”

“봤어.”

“눈을 뜨려고 해! 어떡해! 역시 천재라니까! 세 번 만에 성공하다니! 봤지! 봤지, 그치!”

“봤다니까….”

청유백의 몸은 무심히 대꾸했다.

마치 이다음의 결과를 알기라도 하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실제로 청유백의 지금 생각이 비슷했으니 말이다.

기실, 놀라는 것이 도리어 더 힘든 일이었다.

백련의 부작용, 부활의 대가.

그 모든 것을 이미 두 눈으로 본 적이 있지 않던가.

백련이 시술된 소년은 몇 번이고 눈꺼풀을 움츠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조금씩 그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