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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85화 (185/200)

제185화. 신앙의 대가 (5)

청유백의 검들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주변에 있는 시체의 수는 대략 열.

사방이 적으로 가득 찬 이 상황에서, 일단 할 수 있는 최선의 첫 번째 수는 눈앞의 놈들부터 정리하는 것이었다.

방금 자신을 찾았던 화산파 제자는 전부 정리했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열하나, 스물셋, 서른여섯… 이런, 세는 게 무의미하구나.]

“아, 빌어먹을.”

[한둘이 아니야. 도망치는 것부터 생각해야겠구나.]

그것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 전부가 상대하기 벅찬 고수들은 아니었지만, 하나를 죽이면 둘이 늘어나서 자신을 쫓을 테다.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청유백은 도망칠 방법을 궁리했다.

가장 안전한 것이라면, 이 서녕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두 번 다시 이 성 안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사마신교 놈들이 당장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데, 여길 뜰 수는 없어.’

그거야말로 자살 행위였다.

가령─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곳에 있는 모든 무인들을 몰살시키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리고 그들을 전부, 청련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로 만든다면.

‘상상하기도 싫군.’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는 끔찍한 미래였다.

정파의 병신들 안위를 걱정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놈들이 몰살당하면 그 칼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마교일 테다.

“…….”

청유백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매에 감추었던 쪽지들을 꺼내었다.

하나는 백소하의 것.

그리고 하나는 알 수 없는 다른 누군가의 것.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것은 서신이 아닌 약도로, 이 성 전체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자세한 거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대충 성벽 내부의 대략적인 위치를 그려냈다.

“이 표식은 뭐지?”

[글쎄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구나……. 어느 방향인지는 알겠다만, 달리 유별난 것은 없느니라.]

천화는 공중에 둥실 뜬 채로 수많은 건물 너머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어디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이곳이 ‘어떤 장소’인가.

그러던 와중, 약도 한구석에 휘갈겨진 백(白) 자가 청유백의 눈에 들어왔다.

‘……백소하?’

아니, 아니다.

청유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고 해도, 자신보다도 빠르게 이곳에 도착했을 리는 없다.

못해도 하루 이틀의 시간은 더 필요하리라.

그렇다면, 이곳에 올 수 있는 인물 중 백자를 표식으로 사용할 법한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백소상.”

청유백의 뇌리에 그 이름이 스쳤다.

면식도 없고, 친분은 전혀 없었다만, 분명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천화가 대꾸했다.

[백소상?]

“백소하의 형이다. 인적만 알아. 청명휘 조의 일원이었다.”

왜 과거형이냐 묻는다면, 청명휘가 그 꼴이 난 이상 살아 있는지 어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른 조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으로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일단 움직여야겠어.”

어차피 달리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도 없다.

청유백은 이 표식이 있는 장소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은 뭐가 있기는 있으리라.

전부 죽어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든, 살아 있는 동료든 간에 말이다.

“후우…….”

청유백은 깊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안정시켰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방금 죽인 이놈들 이외에 다른 놈들이 자신을 발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기를 쓰기 시작하면 곧장 들킬 테니, 지금 당장은 그저 달려서 도망치는 것이 현명했다.

청유백은 검 두 자루를 끌러 검집째로 건물의 천장 틈새에 숨겨놓고는, 죽은 시체들의 삿갓 하나를 눌러쓴 채로 대로로 나섰다.

설마하니, 대로를 지나는 수많은 무인들을 하나하나 검사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 * *

눈이 부실 정도로 호화로운 방, 두 명의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순은 넘었을 법한 백발이 성성한 여인과 늙은 중.

두 사람 모두 이러한 과도한 금붙이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곳의 주인들 측에서 이런 방을 내어 주었으니 구태여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군요. 소림과 아미의 장문이 이런 방에 모여앉아 있다니.”

“허허, 그럴지도 모르겠구려.”

그리 무리한 가정도 아니었다.

드디어 물욕에 빠져 타락하고 만 것이냐고, 그리 물어 오리라.

뭐, 이 광경이 썩 합리적인 것은 아니었으니 합당한 지탄이기는 했다.

그들은 일단은 속세를 떠나 각자의 도를 닦는, 불가 문파의 거두인 소림과 아미의 대표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아미파의 대표로 참석한 그녀, 진명사태(眞明師太)는 지금 이 상황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소림의 방장께선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시진 않습니까?”

“흐음.”

늙은 중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목을 울렸다.

그녀의 눈빛과 마주하며, 몇 번인가 딴청을 피운 그는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의 저의를 모르겠구료.”

“현양대사. 내 말의 뜻을 알지 않습니까.”

“시주께선 도명자의 죽음을 보니 구태여 연민이라도 싹튼 것이오? 분명 세 번, 네 번씩은 모두의 동의를 확인했던바…. 의미가 없는 질문이라 생각되오만.”

현양은 찻잔을 기울이며 무심히 대꾸했다.

이날, 이 자리에 오대 문파의 대표가 모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공동파에서는 조금 차질이 있었는지, 잘못된 인선이 보내져 왔으나….

‘무얼.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다른 이들의 사정을 헤아려 줄 정도로 여유로운 사안이 아니었다.

서방의 알 수 없는 ‘교단’이 무림의 거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고 그것을 증명한 지 어언 수년.

그들은 이곳에 ‘영원한 삶’을 약속받기 위해 와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각자가 약속한 것을 치를 것이었다.

금전이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영원한 삶.’

얼마나….

얼마나 훌륭한 말인가.

현양대사는 깊게 숨을 내쉬며 그 말을 되뇌어 보았다.

평생 동안 불가의 법을 깨우치고, 윤회의 사상을 믿어온다 한들.

육안으로 본 ‘영생’의 앞에서는 전부 무의미한 것이었다.

한데, 죄책감이라니.

현양대사는 고개를 내저었고, 진명사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무의미한 죽음이 따를 것이라 듣지는 못했습니다.”

“무의미하면 뭐 어떤지요. 마교도든 아니든, 어차피 결국 세외 사파들의 목숨. 우리가 계도해야 할 이들의 목숨은 아니지 않는지요.”

“……석가의 가르침이 언제부터 선택적인 것이었던가요?”

“처음부터 그랬구려. 찾지 않는 이에게 열반은 없는 법이니.”

현양대사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지만, 내뱉는 말은 씹어뱉듯 말했다.

“진명사태. 외면하지 마시지요. 시주께서도, 그리고 소승도. 결국은 다 같은 대의를 위해 이곳에 있지 않는지요?”

“대의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대의.”

현양대사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생.

불가의 가르침에서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임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절에서 자라, 세수 백이 넘은 지금까지도 불가의 덕을 쌓고 있으니 말이다.

허나 그랬기에, 더욱이 그는 남들이 물으면 당당하게 대답할 ‘대의’를 지니고 있다 확신했다.

“생각해 보시구료.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해탈의 길로 이끌 수 있겠소?”

“…….”

“얼마나 더 많은 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며, 얼마나 더 많은 이에게 도움을 손길을 뻗을 수 있을 것인지.”

그는 진실로 그리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현양대사의 눈에 탐욕스런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자신이 사욕을 좇는다고는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극에 달은 광신이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요, 우리는 이미 그것에서 벗어날 지혜를 이룬 자요. 허나 우리의 의지로 더욱 남아 중생들을 계도하기를 택했으니, 우리는 마땅히 칭찬받아야 하지 않겠소.”

“…궤변일 뿐입니다.”

“허허, 무슨 말씀을. 사태께서야 말로 절박할 텐데! 위대한 진명사태가 없는 아미가 지금의 위세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그녀는 아미파를 십수 년간 이끌었고, 오대 거파의 위명에 걸맞게 그 세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사후에까지 유지되겠느냐라는 질문에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가 없던 탓이었다.

근 수년간 아미의 제자 중에는 이렇다 할 옥석이 나오지 않았고, 지금껏 공을 쌓아왔던 다른 제자들에게 장문의 자리를 넘기기에는 영 모자랐다.

진명사태 그녀가 죽는다면, 아미파는 곧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리라.

아미파에게도, 아미파가 보호하고 있는 거대한 도시들에게도 말이다.

“저는… 조금 더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그렇소. 그것이 사태의 대의가 아닌지요? 우리 모두에게 대의가 있는 게지…….”

“…….”

현양대사가 탐욕스럽게 웃었다.

영생.

얼마나 달콤한 말이던가.

자신은 오래 살면 슬프겠지만… 뭐, 봉사하는 일이니까.

‘그래그래, 슬프고말고. 클클클.’

결과적으로는 다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상관도 없는 파리 몇 마리 짓이기는 것 정도야… 무슨 문제가 있겠소? 그들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은 소승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기껏해야 작은 희생일 뿐일 테지요.”

“…희생.”

“뭐 청유백이랬던가… 뭐 하는 시주이신진 모르겠으나, 우리의 대의를 막아섰다는 것만으로 죽음의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소?”

청유백.

분명 처음에 듣기로는 서녕에 침입한 마교도랬다가, 이어 들려오는 제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마교도는 아닌 무인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허나 뭐면 어떤가?

어차피 죽인다는 결론은 전혀 바뀌지 않을 텐데 말이다.

진명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희생이겠지요…. 필요 불가결한 희생 말입니다.”

“이제야 깨달으셨구료.”

클클클.

현양대사는 감추지 않고 웃었다.

그 탐욕스런 웃음은 이미 명성 높던 소림의 방장의 것이 아니었지만, 진명사태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명사태는 곧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 몸을 일으켰다.

허나, 갑작스레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복면의 사내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현양대사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오?”

“묵련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신녀가 이곳에 당도했다 합니다.”

“신녀! 드디어 온 것이오?”

계속 부른다, 부른다 말로만 듣고 실체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말로 듣기로는, ‘그분’이 부활할 가장 중요한 촉매가 된다 했던가.

그렇다면, 아마 지체할 이유가 없으니 당장 그분을 강림시키기 위한 의식을 거행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구료. 진명사태, 함께 가시지요. 바퀴벌레를 잡는 일도 물론 퍽 중요하겠지만, 그분을 알현할 기회가 쉬이 오는 것은 아닐 테요.”

“청유백이라는 자는 어찌하구요?”

“제자들에게 일임해 두었소. 충분히 유능한 아이들이니, 고작 사람 하나 잡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라오.”

현양대사는 짐짓 웃음 지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고작 미꾸라지 한 마리가 대양(大洋)을 흐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천라지망을 빠져나갈 수 있으면 빠져나가 보라지. 결국은 잡히게 될 거요. 안심하고 제자를 믿으시구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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