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82화 (182/200)

제182화. 신앙의 대가 (2)

거짓.

무엇이 거짓인지는 명확했다.

놈이 빨랐다는 것이 거짓이든, 놓쳤다는 것이 거짓이든…….

결국, 후산은 지거광을 실수가 아닌 고의로 놓아 주었다는 소리였다.

“…….”

청유백은 멍하니 자신의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저, 몇 초 동안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무어라 추궁하지는 않았다.

굳이 이 자리에서 추궁하여 그를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 이유를 알아내고 뒤를 잡는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

‘놈을 죽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애당초,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한 시점에서 실패한 일이었다.

성공할지 못 할지도 확신할 수 없는 미봉책에 일을 맡긴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결과이리라.

청유백은 청률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벌써 서녕성 안인가?”

“그건 아냐. 반죽음 상태의 시체를 들고 문을 지나는 건 너무 눈에 띄잖니. 적진일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그러는 건 미친 짓이지.”

“그건 나쁘지 않군….”

기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성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상태가 호전되는 것 같아 보이기에, 청률과 묵태곤은 일단은 성문 근처에서 청유백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일단은 그 푸른빛의 실이 청유백을 꿰매는 것도 직접 보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시타가 계속 괜찮다며 안심시킨 결과였다.

청유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도 성의 가까이에 있었다.

관도에서는 조금 떨어진 수풀과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지만, 저 멀리 거대한 회색의 성벽이 보여 왔다.

저기가 서녕이었다.

청해성의 성도이자, 서쪽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그리고 지금부터 향해야 할 장소이기도 했다.

허나 문득, 청유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상한데.”

“뭐가?”

청유백의 말에 반사적으로 청률이 대꾸했고, 청유백은 성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너무 평온한데.”

“…그건 좋은 거 아냐?”

“평소에야 좋겠다만, 지금은 아니지.”

아무 이유 없는 평온은 없다.

안정과 평화에는 언제나 이유가 따르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또한 부단히도 이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청유백 일행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엇을 만났으며, 그곳이 이 서녕에서 기껏해야 수십 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장소는 결코 평온할 수가 없었다.

당장 퇴치와 토벌의 준비로 분주해야 할 것이며, 성벽 위의 무사들은 몇 배로 늘어나 주변을 경계하려 할 것이다.

인간은 미지를 두려워하고, 그 괴이들은 미지 그 자체였으니 그것보다도 더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령, 저곳에 모인 고수들을 고용하고 도움을 청하여 당장에 그 숲에 모인 괴이들을 토벌하려 움직였을 수도 있다.

…허나, 그리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또한 마땅히 이유가 있다는 소리일 터.

청유백이 가능성 있는 경우를 말하기 전에, 청률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것들이 있는 걸 모르는 것 아닌가? 놈들은 그 괴인의 명령을 따르는 듯했으니, 그 숲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

“아, 그렇겠네. 우리랑 같이 왔던 그 병신 같은 관군들도 전혀 몰랐던 눈치였잖아. 가능성 있는데?”

묵태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청유백 또한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실, 청률이 말한 경우는 차악의 경우였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청유백으로서는 참으로도 희망찬 상상인 것이다.

‘모른다, 라…. 정황은 그렇지만, 사실상 그렇지는 않겠지.’

세상 물정이 그렇게 속 편히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청유백은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인간들이 생각보다도 훨씬 무능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 또한 잘 알았지만, 이번은 아닐 것이다.

이 상황의 최악은 따로 있었다.

단순했다.

‘모든 것을 알고도… 무시하는 판단을 내렸을 경우.’

그 경우야말로 정말로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빈말로라도 희망차다 말할 수 없으리라.

서녕은 오로목제와 달리 관군의 힘도 나름 강한 도시일 터인데, 그곳의 관청이 침묵한다는 것은 즉─

[사마신교가 관까지도 구워삶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로구나.]

‘……그렇지.’

쯧.

청유백은 혀를 찼다.

아니기를 바라야겠지만, 저 성의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보면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알면서도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것이다.

청유백은 그리 확신했다.

“가만히 있는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아. 곤륜제전 덕에 검문을 통과하기는 쉬운 것 같으니, 일단 움직이지.”

“미리 말해 두겠소만, 우리는 서녕이 목적지였소. 저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마음대로 해. 처음부터 그런 동행 아니었나.”

청유백은 후산의 말을 자르며 그리 대꾸했다.

애당초, 자신도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를 불안 인자를 옆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시타가 눈에 밟히기는 하지만, 숙소가 어디인지만 알아 놓으면 어찌 감시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다.

“…….”

시타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어쩌랴.

시타가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한들, 무력에서 위협이 되는 것은 후산이다.

그가 거짓말을 했고, 지거광을 그냥 보내 주었다는 것이 사실인 이상 불안 요소를 머리맡에 남겨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는 일행들을 따라 청유백은 걸음을 옮겼고, 부축하려 하는 손길을 거절하며 발을 놀렸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천화….’

[왜 그러느냐?]

청유백은 잠깐 주저했다.

그냥 단순한 꿈일 뿐 아니던가.

이렇게나 다치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던지라, 그저 조금의 변덕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가 결국 청유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 * *

한편, 서녕 관청의 집무실에서는 온갖 수뇌들의 모임이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회의라고 부르기에는 그만한 격식이 없었고, 또 연회라고 부르기에는 그만한 여흥도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정확하게 자신의 목적, 그리고 이득만을 위해서 모인 자리였으니─

그냥, 일시적인 ‘모임’ 정도로 말해 두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었다.

누군가는 돈을 위해.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

누군가는 생명을 위해.

제각각의 이유로 이곳에 모인 이들은, 천하에서 가장 고명하고 강력한 문파의 수뇌들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문파 다섯을 일러 오대 거파라 했다.

화산, 무당, 소림, 아미, 공동.

그리고 이 장소에 모여 있는 이들은 각각 그 거파의 장문인, 혹은 그에 준하는 권리를 부여받은 장로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서로가 철천지원수인 관계도 있었으며, 혹자는 당장에 검을 뽑아 들지 못하는 것이 한인 이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리도 얌전히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 모임에, 이 일에 걸린 보상과 대가가 너무나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한때의 은원 따위는 쉬이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 모임도 그저 형식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럼 그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화산은 동의합니다.”

“무당 또한 동의하오.”

모양 자체는 회의의 형식을 띄고 있었으나, 결국은 이미 정해져 있는 ‘동의’라는 답을 끄집어내는 과정일 뿐.

그것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이미 대답이 정해진 질문에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허나 그러다 문득, 한 노인이 손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동의 장로, 이 도명자가 감히 논제를 하나 올리고자 하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하지만 호의적인 시선은 없었고, 대놓고 불쾌해하는 그 시선의 의미는 대체로 같았다.

‘왜 불필요한 시간을 끄는가.’

하지만 간공은 주눅 들지 않은 채로 꼿꼿이 자세를 유지했다.

결국, 이 긴 탁상의 가장 상석에 앉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사내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 노쇠한 장로급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외견은 실로 기이하다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에 동의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심지어는, 그 옆에 앉아 있는 서녕의 행수까지도 말이다.

“말해 보십시오.”

“최근 서녕의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소문을 들었소. 숲에 괴이가 날뛰고 사람들을 해친다 하던데… 빠르게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곳이 공동의 영역은 아니나, 결국은 사람을 구하는 일. 허락만 해준다면 문도들을 풀어 놈들을 토벌하는 데에 한 팔 보태겠소.”

“그건… 글쎄요…….”

“……? 고민할 여지가 있는 문제요? 이해할 수 없구려.”

도명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거늘,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너무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림 정파의 거두라는 자들이… 이 무슨 추태요? 당신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 혼자서라도 나서겠소.”

“…….”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하다니. 허! 선조께 듣던 당신들의 의와 협은 전부 거짓이었던 모양이군!”

도명자는 분을 참지 못해 고함을 내지르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양, 너무도 자연스럽게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검은 옷의 사내는 기이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상하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니? 무얼?”

“…….”

사내는 옅게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왼쪽에 앉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곤륜파의 장문인, 간공이었다.

간공은 떨리는 눈으로 변명했다.

“미, 미안하게 되었소. 하필 대표를 보내도 저리 말이 안 통하는 자를 보냈을 줄은…….”

“되었습니다. 뒤처리만 한다면, 실수는 용납될 수 있지요.”

“무, 물론이오.”

간공은 도명자를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도명자는 그 모습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뒤처리? 무엇을 말이오?”

“미안하오. 나를 용서치 마시오. 저승에 가거든 잘 살구려. 나를 기다리진 말고.”

“무슨…?”

─푸욱!

“……!!”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들어간 일격이었다.

도명자는 자신의 배를 꿰뚫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공격했다고?

그 고명한 곤륜파의 장문인이, 나를?

…어째서?

도명자는 자신의 배를 뚫고 들어간 그의 칼을 애써 붙잡으며 간공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무릎이 꿇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커, 커헉! 어, 어째서…?”

“……무지한 죄. 그리고, 대의를 이해하지 못한 죄요.”

“그게 무슨…….”

콰득.

도명자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간공은 칼을 비틀어 한 번 더 베어냈고, 도명자는 그대로 절명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장문인과 장로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그저 외면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그저 눈을 감아 버리기도 했다.

“…용서치 마시오.”

“아미타불…….”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무림의 거두들이 고작 각자의 욕망을 위해서 정의를 내버리는 순간이란, 검은 옷의 사내가 보기에 퍽 마음에 드는 장면이었다.

대의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 정의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장면이라는 것은, 분명 세상에서 제일가는 여흥이리라…….

검은 옷의 사내는 웃었다.

결국 그들은 각자가 원하는 욕망을 채우기는 할 것이다.

돈이든.

명예든.

혹은 그 다른 무엇이든 간에.

하지만, 의미는 없을 것이다.

‘…멍청이들.’

결국 그분은 곧 오실 것이고, 그 때에 구원을 받는 것은 진실된 신앙을 지닌 자뿐일 터였다.

검은 옷의 사내는 표정을 애써 다시 돌려놓으며, 차분하게 장내의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혔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자, 회의를 이어갑시다. 다음 내용은… 조금 특이하군요. 청유백이라는 청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